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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타입 11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 리본

최근 들어서 리본이 이상해졌다.

사와다 츠나요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서류에서 눈을 떼자, 집무실 한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늘씬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모든 게 검었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모자, 의상, 눈동자까지. 마치 검은색에 잡아먹힌 사람과도 같았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겉으로 보았을 때 멀쩡했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멀끔한 차림새를 한 탓에 더더욱 그랬지만….

오랫동안 리본과 함께 지낸 츠나요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본이 특정한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상해진다는 걸.

*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이어 복도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몇 시간 전까지 츠나요시의 집무실에 있었던 리본이다. 그는 여전히 검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쓴 채 걸어가고 있었다. 차림새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일정 간격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에는 무수히 많은 문들이 있다. 제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문이다.

리본의 시선은 올곧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자의 눈이었다. 그는 복도의 문을 지나쳐,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의 마지막 문에 도달했다. 그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리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어두웠던 복도와 대조적으로 환한 거리였다. 해가 저문 지 오래였으나, 가로등과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거리를 밝혔다.

리본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멈춘 건 어느 한 작은 집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주택이었다. 리본은 익숙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리본은 문에서 한두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벌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이 서 있었다. 여성의 태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툭 건들기만 해도 깨질 것 같은 유리공예품을 다루는 손길과 흡사했다. 여성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가 리본과 마주쳤다. 리본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의 그에게서 볼 수 없는 미소였다. 여성은 미소를 보자마자 어깨를 움츠렀다.

“아, 안녕… 하세요. 오늘도 올, 오실 줄은 몰랐어요.”

개미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였다. 여성은 타인을 대하는 게 무척 어려운 듯, 계속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안색이 창백했다.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나? 며칠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못 올 수 있으니 그 전까지 만나러 온다고.”

“네… 네! 그랬었죠. 그, 그렇지만 리본 씨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못 올 줄 알았어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이야. 뒷세계에서 살아가려면, 그 누구보다 사소한 약속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해. 하나.”

하나.

그 호칭을 듣자마자 여성의 두 눈이 커졌다. 아냐. 나는, 나는 하나 씨가 아냐. 나는 유메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메는 끝끝내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저 가엾게 떨리는 두 손을 억지로 붙잡은 채 리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리본과 같이 있는 삶은 나쁘지 않았다. 리본은 다정했다. 이따금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마피아에 몸 담그고 살았던 리본이다. 표정을 쉬이 드러냈다가 죽을 수 있으니까. 유메는 리본이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차라리 제 곁에 있으면 좋겠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괜찮았다.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왜 하나가 아닐까?

유메의 두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힐끗 리본을 보았다. 리본은 유메가 사는 집에 여러 번 와보았다. 횟수만 헤아리면 백 번은 넘기지 않을까? 익숙하다는 듯 푹신한 쿠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소파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다. 유메까지 앉으려면 두 사람의 거리가 상당히 좁아야 가능했다.

쿠션이 최대한 쓰러지지 않도록 쌓으며, 리본은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렸다. 앉으라는 신호였다. 그 말에 유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자신의 집이지만, 어째서 리본 씨가 집주인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 집도 리본 씨가 구해주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메는 타고나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서툴렀다. 자신감도 부족했다. 무엇을 해도 잘 되는 일이 없었으며, 그 끝에는 지독한 자기혐오만이 남았다. 자기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메는 알고 있다. 리본이 유메를 통해 죽은 옛 연인을 보고 있다는 걸. 연인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유메의 추측이었다. 유메는 하나를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나,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의 인간.

하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유메는 의아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과 닮은 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몰래 하나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자세한 내역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에 대한 정보는 모두 철저한 보안 속에 감춰져 있었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유메가 그 보안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유메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차라리 알아내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메의 추측에 하나는 마치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감싸주는, 하늘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과 정반대로 밝고 쾌활하며, 모두와 잘 지내는. 아마 저처럼 음침하게 말하지 않겠지. 그런 사람이어야 리본의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한낱 망상이었음에도 유메는 꽤 많은 타격을 받았다. 지금의 스스로는 전혀 사랑할 구석이 없다는 점이.

좁은 소파에 앉아 있었던 탓에 리본의 온기가 유메에게 닿았다. 따뜻했다. 나, 살아있구나. 유메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리본과 이렇게 닿을 때마다,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마다 유메는 행복했다. 비록 자기 자신에게 해주는 게 아니었지만.

리본에게서 달콤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지금 제 행동이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쓰고, 그 사람인 척 하고 있으니까. 아마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유메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유메에게도 변명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리본을 속여가며, 일부러 하나의 이름을 빌려 쓰지 않았다. 애초에 하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었다. 먼저 리본이 유메를 보고 하나라고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은 유메로 쭉 남아있을 수 있었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리본은 유메에게서 무엇을 보고 하나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메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심한 탓에 간단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아.’

눈가가 흐릿해졌다. 조금씩 눈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천천히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리본과 있을 때마다 유메는 한두 번씩 울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못난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서였다. 유메는 하루에 몇 번이고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욕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리본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만약 리본이 자신의 정체를 안다면. 지금껏 하나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하나가 아니었다면. 유메라는 걸 알았어도 그는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줄까? 아니,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지금처럼 친근하게 굴지 않겠지. 아예 무시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서러웠다. 왜 자신은 뛰어난 점이, 남들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걸까. 이래서야, 하나인 척 하는 것도 힘들 텐데.

스스로의 이기적인 면모를 볼 때마다 유메는 구역질이 났다. 끔찍했다.

“괜찮나?”

커다란 손에 유메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일정 간격으로 토닥여주는 손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유메는 참지 못한 채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슬픔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본은 참을성 있게 유메가 울 때마다 토닥여주고, 안아주었다. 그 다정함이 죄라는 걸, 리본은 알고 있을까?

유메의 울음이 그치자마자 리본은 낮은 탁자 위에 올려둔 티슈 몇 장을 가져왔다. 티슈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쳐냈다. 자국이 남지 않도록, 콕콕 찌르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실컷 운 덕분에 어느 정도 진정했다. 유메는 부끄럽다는 듯 손을 들었다.

“저, 제가 혼자 할 수 있어요…. 티, 슈 주세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

티슈를 빼앗으려고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보았다. 하지만 끝내 티슈를 뺏지 못했다. 뺏으려고 할 때마다 리본이 움직였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의 체격 차가 많이 났다. 리본이 두 손을 위로 올려버리면, 유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까치발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마다 정말 짓궂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리본이 눈물을 다 닦아낸 모양이다. 티슈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함부로 눈가를 문지르지 마.”

“알, 았어요.”

눈가를 문질렀다가 붉게 달아오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리본은 종종 이렇게 유메를 어린애 취급했다. 아니. 하나를 어린애 취급한다고 하는 게 옳을까? 리본의 다정함은 모두 하나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유메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때는 리본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유메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하나가 아니라 유메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리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끝은 하나가 이 세상에 없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리본이 사라지는 꿈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실종되거나, 혹은 하나의 곁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살아있어도 유메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리거나.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메는 쉬이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만약 그 꿈이 예지몽이라면 어떻게 될까. 리본이 죽거나, 사라지는 견딜 수 없었다. 무시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쪽은 하나인 척 사칭하고 다녔으니까. 거기에 해당하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지가 맞았다.

꿈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있을 법하다는 말은 곧 유메를 우유부단하게 만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는 소리다.

리본은 유메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있었다. 유메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최대한 눈을 비비지 않았다고 해서 운 흔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슬픈 일이라도 있었나?”

“…리본 씨가 떠나는 꿈이요.”

“내가?”

“네. 저를, 저를 두고 저 멀리 가버렸어요. 아는 척 하지 않았고요.”

“내가 너를 두고 떠날 리가 없잖아, 하나.”

또.

또 시작이다.

자신은 하나가 아니라 유메인데, 왜 리본은 자꾸 하나라고 부르는 걸까.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에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만 남았다. 리본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하나’를 두고 저 멀리, 어디론가 떠나는 말이 와닿지 않은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 리본 씨는 하나 씨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지고 싶은 바보가 어디겠어. 스스로만 해도 구질구질하게 리본의 곁에 있고 싶어서, 하나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으니까.

“너는 예전부터 걱정이 많아. 내가 말했지, 나는 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겠다고.”

“그럼, 그럼 제가 떠나버리면요? 제가, 리본 씨를 두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하나. 나는 끝까지 있겠다고 하면, 있을 수 있어.”

있을 수 없다니.

자연스럽게 유메의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 유메라는 걸 밝힌 순간. 잠자코 그 말을 듣더니 이내 하나의 곁에 가겠다며 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는 리본…….

안돼. 안 된다. 그럴 수 없어.

리본이 죽는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유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끄덕임이었지만, 리본은 알 수 있었다. 리본은 그대로 유메를 끌어안았다. 달콤한 향이 유메에게서 풍겨왔다. 리본은 토닥이는 대신 유메의 손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연인 사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애정 표현이었다. 유메는 늘 리본의 애정 표현이 낯설었다. 유메에게 해주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걸까? 이 애정 표현을 받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으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리본이라면 유메가 부정적인 말을 꺼내자마자 눈치 빠르게 알아낼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입 밖으로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달고 살았던 말이었는데, 왜 중요한 순간에만 나오지 않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리본은, 제가 좋아요?”

“당연한 질문은 하지 말도록.”

당연한 질문이라니.

당신이 좋아하는 건 제가 아니라, 하나 씨잖아요.

유메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얼핏 보았을 때 리본은 멀쩡했다.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느끼고 있는 걸까? 만약 이대로 리본의 환상을 깨트리면 어떻게 될까? 리본은, 무너지지 않을까. 온갖 가정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유메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칫 잘못하다가 어두운 늪에 빠져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저도, 리본 씨가 좋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너는 예전부터 사랑한다거나,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자주 입에 담았지. 그만큼 나를 좋아하나?”

“네, 네… 좋아해요. 그렇지만, 저는.”

안 된다.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말하다가 무심코 하나가 아니라는 걸 털어놓을 뻔했다. 리본은 유메를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눈빛으로 유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의 재촉 같이 느껴지면, 착각이려나. 유메는 두 눈을 깜빡였다. 문득, 한 가지 생각난 게 있다.

리본이라면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니까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 씨가 자신처럼 부정적인 인간은 아닐 텐데. 얼핏 접했던 소문도 모두, 모두 좋은 말뿐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자신은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왜, 리본은 속아주는 척 하는 거지? 왜? 무엇을 위해서?

의문이 끝없이 유메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 번 든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리본이 정말 자신의 어설픈 연기에 속았다니, 말도 안 된다. 분명 눈치 빠르고, 머리 회전이 남다른 리본이라면 진작 알아차리고도 남았다. 자신은 어설프게 하나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까. 알아차리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저, 저, 리본 씨. 저 말할 게 있어요.”

“응. 무엇이지?”

“저는, 하나가 아니라, 유, 유메예요!”

처음으로 제 이름을 말할 때 크게 소리 내어 보았다. 몇 번 더듬긴 했지만 그래도 유메라는 이름을 확실히 입에 담았다. 좋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약간의 희망을 품은 채 리본을 보았다. 부디 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누지 않으면 좋으련만. 쿵, 쿵. 유메의 심장이 거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본은 유메의 말을 들었을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지긋이 유메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어라고 말하고 싶은 듯, 손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뒷목을 몇 번 긁적이거나 혹은 한숨을 쉬거나. 말하지 못해서 답답한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번에는 그런 거짓말인가.”

“네?”

“너는 종종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발언을 종종 입에 담았더군. 그런 장난을 쳐도 무슨 재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너는 하나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

“그런 거짓말만큼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도록.”

다소 강압적인 말투였다.

복잡했던 머리가 이번에는 텅 비었다. 거짓말이라니. 유메는 사실대로 털어놓았을 뿐이다. 하나가 아니라 유메라는 건 거짓이 아니라 참이었다. 하지만 리본은 그게 거짓이라고 부정하고 있다. 유메는 넘어갈 수 없다는 리본의 말에서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리본은 유메가 아니라 하나를 보고 있겠지. 유메가 다치면 하나가 다친다고 생각하겠고, 유메가 아프면 하나가 아프다고 생각하겠지. 리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니까.

여기까지 오니 더 이상 서글프지 않았다. 오히려 우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비록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봐주지 않는 건 씁쓸했지만. 그래도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유메보다 하나인 척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유메의 마음은 점점 심각할 정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자기혐오는 끝내 자기 자신을 분리했다. 끔찍하게 싫었던 자기 자신을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리본에게 필요한 건 유메가 아니라 하나였다. 리본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하나가 살아있기 때문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자신은 계속 리본 앞에서 하나인 척 굴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이런 유메를 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욕하겠지만……. 끔찍한 자기 자신보다는 좋지 않을까? 어차피 자신은 무엇을 해도 욕을 먹는데.

아무도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데.

유메는 조심스럽게 리본의 손을 잡았다.

“응, 리본 씨의 말이 맞아요.”

“거짓말이라는 건 순순히 인정하는 건가?”

“그래도 가끔 저는 제가 아니라 유메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이상한, 걸까요?”

자연스럽게 흐르던 말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버벅거렸다. 리본 씨는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저는 계속 저 자신을 유메라고 생각하게 돼요. 하나 씨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도저히 안 돼요. 리본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속내였다. 문득 리본은 이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해줄지 궁금해졌다.

리본은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대로 콕, 유메의 미간 부분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유메는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리본에게 맞을 줄이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메의 두 눈이 커졌다. 껌뻑이며 의아하다는 듯 리본을 보았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말도록.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건 좋지 못한 증세야.”

그러면서 리본은 그대로 유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건 좋지 못하다니. 유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리본이 원인이었다. 리본이 자신을, 자신을 하나라고 했기 때문에. 온전한 유메로 봐주고 있지 않아서,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건데. 유메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렸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면서 혼날 것 같았다.

‘하나 씨는 정말 리본 씨에게 사랑받았구나.’

투덜거린 후에는 언제나 하나를 부러워했다. 죽어서도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도 살아있는 하나를 만났더라면, 좋아했으려나. 유메는 양쪽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리본만이 아니었다. 하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를 좋아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 살아갔던 걸까. 유메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하나처럼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부러워하게 된다.

자신은 평생 사랑받고 살았던 경험이 없으니까. 자신조차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있기나 하나? 없겠지. 유메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아무 장점이 없다. 장점 대신 단점만 잔뜩 있었다. 유메는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리본에게 매달렸다.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도 리본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매달릴 줄 알았다는 듯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하나 너는 그랬지. 속상하거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매달리는 게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다니.”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야. 그저 내가 없을 때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풀어나갈지 걱정이 되는 거지.”

그렇구나.

하나 씨도 속상하면 자신처럼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구나. 처음으로 안 사실이었다. 유메는 힐끗 리본을 보았다. 어쩔 수 없다며 말하는 사람치곤 눈빛이 따뜻했다. 이런 식으로 매달리는 걸 좋아하나? 하나만이 아니라, 리본에 대한 것도 처음 알았다. 이런 사람이 밖에서 잔혹한 마피아 일원으로 있다니. 유메는 한껏 리본에게 매달렸다. 코끝으로 그의 체향이 스쳤다. 알싸한 향. 마치 옅은 박하향을 맡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리본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제 곁에 있으면.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무리 하나인 척 굴어도 본질은 유메였다. 타인인 척 굴어도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특히 유메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환자였다. 이런 사람이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품어줄 하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가? 정답은 NO였다.

유메는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리본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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