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9화

“그런데 카리타스는 어디서 자? 거기 다 어른들 아냐?”

“어른인 게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가 있어서 너희 쪽에 신세를 져야 할 거 같아.”

카리타스가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한 말에 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침구를 나누어주던 두코는 멈춰버린 폰의 손에 2인용 침구를 얹어주었다.

“어, 어?”

“둘이 같이 자는 거 아녔어? 어서 들어가.”

“네. 두코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자연스럽게 카리타스는 이불 끝을 잡고 걸어갔다. 프라이에는 아이들에게 잘 자리를 배정해주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빈자리로 이끌어주고 다음 아이들을 맞았다.

“이리 줘봐. 다른 애들처럼 까는 건 할 수 있어.”

넋이 나간 폰에게서 이불을 가져온 카리타스가 척척 자리를 잡았고 베개까지 놓은 다음에도 폰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자 카리타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폰의 소매를 잡고 당겼다.

“혹시… 나랑 같이 자는 게 불편해?”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혼자 자는 날이 많아서 친구랑 같이 자는 건 어떨지 궁금했거든.”

폰이 거절할 생각으로 멈춘 게 아닌 거란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카리타스였다. 하지만 다른 거주관 아이들, 특히 자신이 모르는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폰이 언제나 자기 곁에 있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에 카리타스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폰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는 몰라도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와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카리타스가 옆을 돌아보자 폰은 필사적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듯 뻣뻣한 어깨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말을 걸었다가는 어색해지기만 할 것 같다는 판단에, 카리타스는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 누웠다. 카리타스가 눈을 감자, 눈치를 보던 시도폰이 슬쩍 그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규칙적이고 작게 숨을 내쉬는 카리타스의 모습은 영락없이 잠에 빠진 사람의 것이었다.

‘자는 거 맞겠지?’

슬금슬금 몸마저 카리타스 쪽으로 돌린 폰이 조용히 그 옆모습을 관찰하다가 정말로 잠들어버렸고 그때까지 깨어있던 카리타스는 가까이 들리는 숨소리에 눈을 떴다.

‘밤이라 그런지 얼굴이 잘 보이진 않네. 아쉽다.’

다행히 어둠에 적응하자 얼굴 윤곽이 보였고 카리타스는 조심히 손을 뻗어 폰의 볼을 한번 찔러보았다. 깨어있을 땐 어딘가에 닿으면 잘 반응하는 폰이었지만, 잘 때까지 예민한 건 아니었는지 폰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에 푹 빠져있었다.

‘뭔가 더 했다가는…, 자자.’

살짝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리고 카리타스도 눈을 감았다.


“너희 뭐 하냐? 추웠어?”

두코의 잠긴 목소리에 먼저 눈을 뜬 것은 카리타스였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야는 깜깜했고 숨쉬기가 불편하진 않지만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 바로 위에선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고 귀가 닿은 곳에서는 심장의 진동이 느껴졌다. 상황파악 완료. 카리타스는 시도폰의 왼팔에 깔려있던 제 오른팔을 빼냈다.

“폰,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응….”

앓는 소리를 내던 폰은 잠깐 깨어나는가 싶었지만, 다시 도로롱 소리를 내며 더 세게 카리타스를 안았다. 카리타스가 윽,하고 소리를 내자 두코는 킬킬거리며 웃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잠버릇 심하네. 괜찮아?”

“기분은 괜찮은데 숨쉬기는 안, 괜찮아요.”

결국, 두코가 시도폰의 볼을 세게 꼬집어서 깨운 뒤에야 상황이 해결되었다. 눈을 뜬 시도폰은 제 품에 쏙 들어가 있는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악마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을 하냐며 카리타스가 서운해하자 바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정신은 아닌 듯, 시도폰은 세수부터 하고 오겠다고 도망가버렸고 두코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냐 나도 재밌었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두코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너무 격식 없게 대하는 거 불편해?”

‘아 어쩐지. 장난은 쳐도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더라니.’

카리타스는 살짝 떨리는 손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기껏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폰이 아니라면 아무도 자신을 평범한 아이로 대해주지 않는 걸까.

“전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아 그래? 그럼 너도 말 편하게 해! 폰한테는 반말하고 나한테는 존대하니까 영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너만 괜찮으면…, 어라 우, 우는 거야?”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거예요.”

단호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엔 물기가 어렸다. 두코는 당황하며 카리타스의 눈가를 벅벅 문질렀고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프라이에는 그 꼴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뭐 하는 거야?”

“아니, 편하게 말하라고 했더니 갑자기 울길래. 달래주고 있었지.”

“안 울어요.”

“응, 그래. 폰한텐 말 안 할게.”

두코가 카리타스를 살짝 안아서 머리를 토닥였다.

“나도 그렇고 두코도 그렇고 네가 사제라고 해서 거리를 두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 폰이야, 이상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하고도 잘 지내니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까지는 말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서운해할 거라는 걸 고려하지 못했네. 미안해.”

프라이에는 사과하면서 다른 거주관 아이들에게 편하게 말해도 그 아이들은 받아줄 테니 나중에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카리타스는 두코의 품에서 빠져나와 자리에 우뚝 섰다.

“괜찮아졌어요. 이제 아침 먹으러 가요!”

“부활했네~. 폰은 먼저 먹고 있으려나?”

“저기 다시 오고 있는데 영 자세가 불안해 보이네. 쟤 지금, 손에 그릇을 몇 개 들고 있는 거야! 넘어지겠어.”

확실히 그릇 네 개를 한 번에 들고 오는 것은 무리였는지 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재빨리 뛰어간 프라이에와 두코가 두 그릇씩 빼앗았고 뒤따라온 카리타스는 목소리를 골랐다.

“가져와 줘서 고마워.”

“응?”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도폰이 좀 더 카리타스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자, 두코가 그사이를 가로막고는 식기 전에 빨리 먹자며 능청을 떨었다. 옆에서 프라이에가 거드는 분위기에서 폰은 차마 카리타스에게 울었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남부에서 출발한 지 사흘째가 되자 마차는 낮인데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첫날과 이튿날이야 여행에 대한 설렘을 잔뜩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매일 보던 얼굴이다 보니 이젠 이야기할 거리가 다 떨어져 버렸다.

몇몇 아이들은 책이라도 읽으면 재밌으리라, 책을 펼쳤지만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다들 덮은 채로 눈을 감았다. 심심해하던 폰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프라이에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노트가 든 주머니를 품에 안고 눈을 감고 있었다.

“프라이에, 자?”

“아니. 근데 멀미가 나서. 말, 걸어도 제대로 대답 못 해줄 것 같아.”

“어어. 미안, 힘내.”

폰은 그제 서야 평소보다 창백한 프라이에의 얼굴을 알아차리고 맞은편에 있는 두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라이에와 다르게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잘 자고 있었다.

결국, 심심해진 폰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안타깝게도 삼 일 내내 같은 풍경이라, 처음 봤을 땐 웅장했던 숲도 지금은 그저 지나가는 길로만 보였다.

“심심하구먼….”

“너도 그렇니?”

“스키피, 일어나 있었어?”

“응. 할 게 없어서 프라이에처럼 눈을 감고 있었지만.”

“너도 혹시 멀미해?”

시도폰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스키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따분해하던 두 사람은 여전히 조용한 마차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림이라도 그리자며 프라이에에게 재료를 빌려 갔다.

프라이에가 ‘이상한 거 그리지 말고, 종이 찢지 말고.’라며 당부했지만 두 사람이 제대로 그것을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스키피는 앉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시도폰은 바깥 풍경을 그렸다.

필기구가 깃털 펜 한 자루와 잉크 통 하나였기에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덜 심심하며 좋다고 폰이 웃자 프라이에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뭐야. 재밌는 거 하네. 나도 그릴래.”

“두코는 뭐 그릴 거야?”

“나? 생각나는 건 딱히 없는데. 음식이나 그릴까나.”

스키피는 너답다며 펜을 넘겼다. 한 종이 위에 아이들의 얼굴과 나무, 흙길, 음식이 같이 그려져 있으니 꼭 일기 같다며, 간신히 눈을 뜬 프라이에가 나중에 이 위에 오늘 자 일기를 써야겠다고 기뻐했다.

“근데 이건 무슨 음식인 거야?”

“돼지 뒷다리랑 채소볶음.”

“맛있겠네. 색도 칠할 수 있었으면 진짜 배고팠겠다.”

마침 두코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네 사람은 다른 아이들이 깨지 않게 작은 소리로 웃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당일 저녁으로 비슷한 음식이 나왔고 두코는 게눈 감추듯 자기 몫을 다 먹어버렸다.


두 번째 워프가 진행되고 얼마 뒤, 드디어 북부의 설원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눈발이 휘날리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지만, 베론은 정반대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 그것도 성인이 아닌 아이들이 포함된 집단이 이동하는데 눈까지 내렸다면 통솔하는 것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설원에 들어가기 전 워프 지점에서 다 같이 옷을 껴입었는데, 자그마한 아이들이 옷까지 두껍게 입으니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처럼 동글동글해 보였다.

베론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카리타스를 보며 시도폰이 심각하게 중얼거렸고 우연히 그걸 들은 두코와 프라이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리타스…, 굴러떨어지지는 않겠지?”

“베론 님께서 본인 목숨보다 귀중하게 생각하실 거야.”

“프라이에가 말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깨를 으쓱거리는 두코의 등 뒤로 끈 하나가 슬그머니 늘어졌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 걱정하지 마.”

“너희, 옷은 제대로 껴입었니? 두코, 너 거기 끈 풀렸다. 뒤돌아봐.”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두코가 결국 풀린 끈을 찾지 못하고 뒤돌았고 프라이에가 꼼꼼하게 다시 매듭을 짓는 동안 다른 거주관 아이들은 눈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좀 설렌다.”

“남부는 거의 눈이 안 오긴 하지.”

“우리 언제 다시 멈추지? 눈 만져보고 싶은데.”

“먹어봐도 되려나….”

아이들의 조잘거림에 옆에서 동행하던 기사가 말을 얹었다.

“너희 앞으로 눈은 지겹게 볼 건데 벌써 놀고 싶으냐? 조금만 더 가면 마지막 워프 지점인데, 그쯤에서 쉴 거니까 그때 실컷 봐라.”

기사는 창으로 멀리 있는 워프 지점을 가리켰고 아이들은 잔뜩 들떠서 내리자마자 눈싸움부터 하거나 눈밭에 누워보고 싶다고 떠들었다. 시도폰은 카리타스 크기만 한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며 몸을 풀었고 두코는 자긴 추운 게 싫다며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쉬운 맘에 시도폰이 몇 번 찔러보았지만, 두코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마차에 몸을 파묻듯이 뉘어버렸다.

“안 된다.”

하지만 베론은 아이들에게 눈을 만지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아직 본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옷이 젖어버리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다가 북부에 도착하면 너희는 두 달 동안 눈을 질리게 볼 텐데 벌써 그걸 즐겨버리면 나중에 심심할 거다. 거기, 군소리 그만하고 마차에 타도록.”

은근슬쩍 눈싸움을 계획하던 아이들이 폰을 중심으로 뭉쳐있다가 마차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북부로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나무와 땅의 색에 설레던 폰은 갑작스러운 비보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표정으로 마차에 주저앉았다.

“그렇게까지 상심할 일인 거야?”

“스키피, 넌 눈 가지고 놀아본 적 있어?”

폰이 바로 고개를 젓는 스키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더 흔들리자 옆에서 프라이에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거기에 정신이 번쩍 든 폰이 손을 놓았다.

“미안, 프라이에. 아무튼, 난 눈싸움이 정말 하고 싶었고 책에서만 보던 하얀 눈이라는 것도 만져보고 싶었거든. 겨울 호숫물보다 차가운데 솜처럼 생겼고 만지면 순식간에 녹아버린다던데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북부 가면 실컷 본다니까,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스키피의 아주 타당한 지적에 폰은 할 말이 없다며 사그라들었다.

점점 강해지는 바람 소리와 차가워지는 공기에 두코는 잠도 못 자겠다며 투덜거렸고 그 옆의 아이는 담요를 꼭 쥔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마차 중간에 불 속성 신성 도구를 둔다고 해도 마차가 넓은 편이라 공기가 빠르게 데워지지는 않았다.

추위 속에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워프 지점이라는 곳에 도착한 마차로 카리타스가 들어왔다.

“어서 와, 밖은 상당히 춥지?”

“괜찮아. 바람을 직접 맞는 것도 아니고 옷도 잘 입었어.”

“여기, 이쪽에 앉아.”

시도폰이 카리타스를 맞았고 스키피는 살짝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서 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눈을 기대하던 때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매서운 추위에 마차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말했고. 그 말에 베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카리타스를 마차로 데려다주었다.

“잠시 실례할게.”

카리타스가 스키피와 시도폰 사이에 앉아서 다리를 오므렸다. 아이들은 예상보다 카리타스를 잘 받아주었고 그 중 스키피가 유독 관심을 보였다.

스키피는 고전을 좋아하는 카리타스가 우연히 꺼낸 책 이름 하나를 듣고는 자기도 좋아하는 책이라며 이야기를 이끌어갔고, 지난 휴식 시간에는 그 얘기만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폰은 말 한마디도 붙여보지 못했다.

카리타스에게 친구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인데도 정작 처음 그를 발견하고 밖으로 이끌고 나온 자신이 대화할 기회가 줄어드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다른 친구들한테는 딱히 이런 적 없었는데.’

“쌍방인 거네?”

“그렇지!”

문득 코지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바람에 폰의 어깨가 잠깐 움찔거렸지만 아무도 알아채지는 못했다. 아직도 책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은 등장인물의 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지와 도서관에 갈 때마다 고전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읽어둘 걸 그랬다.

‘쌍방이잖아. 둘 다 바보였던 거고.’

처음엔 신기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으로 발전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고, 항상 차분해 보이는 모습이 멋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카리타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편한 상대가 되어버리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좋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불안하게 그런 마음으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카리타스가 신경 쓰인다는 건 무슨 뜻일까?

“폰, 얼굴이 빨간데…. 덥냐?”

프라이에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폰의 안색을 살폈다. 그 말에 당사자보다 놀란 카리타스가 말을 끊고 폰의 손을 덥석 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카리타스의 미지근한 손이 폰의 이마에 닿았다. 다른 손은 아까부터 폰의 손 위에 얹혀서 손이 차갑지는 않은지 확인한답시고 계속 남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카리타스의 처방은 역효과가 너무 강했고 시도폰은 신성 도구가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것 같다고 둘러댔다.

“그러니까 잠깐만 나갔다 올게. 금방 식겠지.”

“같이….”

“아냐 괜찮아. 감기 걸릴라.”

단호하게 동행을 거절한 폰은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카리타스를 등지고 마차를 빠져나왔다. 티 나게 불편해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계속 있었다가는 솔직하게 전부 이야기해버릴 것 같았기에 시도폰은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막사 주변을 걸어 다녔다.

‘머리를 좀 식히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마차 둘레에 발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돌아가려던 폰의 발목을 잡은 건 앳되지만 어딘가 잔뜩 심술이 난 목소리였다.

“방한 대책이 왜 이런 것밖에 없는 거죠. 두꺼운 옷과 작은 온열 도구만 주고 어떻게 이 추위를 견디라는 거예요? 게다가 큰 온열 도구는 평민들이나 타고 있는 마차에만 배치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안타깝게도… 다른 대책이랄 건 없습니다. 이전 북부 수행도 다 이렇게 진행되었고요. 아,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신전 쪽 인원이 전부 말에 탑승한 것 정도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방한을 생각해서 다들 마차에 타셨는데 이번만 개별로 가는 걸 선호하더군요.”

‘설마 카리타스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베론 쪽 나무 뒤로 몸을 숨긴 폰은,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들었다. 신전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고 어쩌면 성직자가 적성이 아니라 다른 게 적성에 맞았을지도 모르겠다며 폰은 혼자 실실 웃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생각보다 유치하고 쪼잔했으며 폰의 심기에 매우 거슬리는 것들이라 그 웃음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그 꼬맹이 사제는 그다지 추워 보이지 않던데 우리한텐 왜 그런 걸 주지 않는 겁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화해했지만, 센이 얀과 폰이 싸울 때 끼어들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불쑥 대화에 참견했다. 자기보다 몇 살이나 어려 보이는 아이가 따뜻해 보이는 게 그렇게 거슬리는 일인가.

“그건 제 신성력으로, 제 몸에서, 열을 낸 겁니다. 부러우시다면 몸에 불이라도 붙여드리죠.”

베론은 지친 건지 화난 건지 모를 표정으로 말을 한마디씩 끊어가며 이어갔다. 아무리 비꼬아도 같이 타자는 말은 안 꺼내는 걸 보면 그건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음식은 왜 그 모양인 겁니까?”

“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상한 건 확인할 때마다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재료가 세 가지밖에 안 되는 데다가 간을 거의 하지 않는 건지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평소 드시는 것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 될 걸 알고 있긴 합니다만 여기까지 와서, 그것도 여행이 목적이 아닌, 수행하러 온 사제가 그런 것을 불평하면 되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지적인데도 예비 사제는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에 베론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고 상대편은 그걸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묻지도 않은 제 가문 이력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자기 가문에서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는지, 그래서 왕께 하사받은 영토가 얼마나 넓고 비옥한지 등등, 도무지 사제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랑의 향연에 의외로 순순히 듣고 있던 베론이 말을 잘라먹었다.

“그래서 그게 사제가 될 본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제란 본디 속세와 거리를 두고 신의 뜻을 따르는 동시에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가문의 영광과 부는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우셨을 텐데요.”

“아직 북부까지는 소식이 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작년 탄생일 연회에서 성기사단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시면서 사제직과 봉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희가 사제가 된다고 해서 가문을 버릴 필요는 없게 되는 것이지요.”

베론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이전까지는 베론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시도폰은 처음 듣는 말에 놀라 잠깐 숨을 멈췄다.

사제직과 다른 직업을 겸임하지 않는 것은 분명 신께서 내린 규율이 아니긴 하지만, 신을 섬기는 일에 사사로운 정이 얽히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다들 지키고 있는 규칙이었다.

사제는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베론을 올려다보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물러났다. 삼류 악당처럼 도망가는 꼴이었지만 시도폰은 저를 등진 베론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베론 주위의 눈이 미세하게 녹고 있다는 사실까지 종합해, 베론이 무지하게 화가 많이 났으리라 예상한 폰은 조용히 베론의 반대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거기, 누구지?”

“히익!”

분명 사람 세 명을 눕힌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어느새 베론은 폰의 바로 뒤에서 나무를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화를 내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자 폰의 내려앉았던 심장이 슬금슬금 제자리를 찾았다.

엿들었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얼떨떨했다. 폰이 자기소개하기도 전에 베론은 카리타스는 어디에 두고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애들은 전부 춥다고 안에 있습니다. 카리타스도 같이 있고요.”

“그럼 너는 왜 혼자 밖에 나와 있니?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아까까지 사제와 말싸움 비슷한 것을 하던 베론은 시도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녹이는 대신 어투를 녹인 것 같았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상태로 폰은 어물어물 대답을 이어갔다.

“저는 갑자기 더워서… 잠깐 식히려고 나왔어요. 마차 주변만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궁금해서 와본 거고, 절대로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차마 더워진 이유까진 말할 수 없어서 폰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폰의 말과는 다르게 베론의 눈에는 추워서 손을 덜덜 떨고 얼굴이 창백한 아이 하나가 보일 뿐이었기에, 베론은 무릎을 꿇어서 시도폰과 시선을 맞추었다.

폰을 향해 뻗어오던 베론의 손이, 꼭 쥐어진 폰의 양손 앞에서 멈추었고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따뜻하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건 효율이 낮지만 따뜻하게 만드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단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따뜻해졌어요.”

아무리 신성력이 좋은 힘이라지만 전시 상황이 아니라면 수혜자의 허락을 받고 행해지는 것이 기본이었다.

베론은 긴장한 아이가 제 상태를 자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원격으로 열을 전달해 준 것이고 그런 베론을 바라보던 폰의 머릿속에선 매번 손을 덥석 잡아 오던 카리타스가 떠올랐다.

‘물론 카리타스야 언제든 손을 잡아도 괜찮지만….’

“내가 봤을 땐 이미 충분히 시원해진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지 않겠나?”

“아,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전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못했고, 아무도 답해주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이라 속에만 품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폰, 두코, 프라이에가 같은 건물에서도 다른 구역으로 분리되는 이유, 카리타스가 신전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이유, 폰과 카리타스가 절대로 같은 곳에 있을 수 없으며 만나고 싶다면 몰래 만나야만 했던 이유. 방금 사제와 베론의 대화를 듣고 이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졌다.

이 사람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론은 여전히 피곤하지만 평온한 눈으로 폰을 내려다보았다.

“신께서는 신성력을 주셔서 그걸로 우리의 구역이 결정되잖아요. 그리고 우리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신분이라는 게 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요. 그러면, 그런 거면 사람 사이에 귀하고 천한 건 정말로 정해져 있다는 건가요?”

말하다가 숨이 거칠어진 폰은 잠깐 말을 끊고 침을 삼켰다.

“뭐든 간에 풍족한 사람이 적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게… 신이 정한 규칙인가요?”

폰의 말이 끝나갈 때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이 베론과 폰의 옷에 달라붙고 주위를 하얗게 물들여갔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고 적막이 두 사람을 무겁게 누른다.

그런 생각을 어쩌다가 하게 되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베론은 계급과 지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그건, 절대 아니란다.”

일단 부정부터 내뱉은 베론은 말을 고르는 듯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내어놓았다. 지친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연민과 슬픔이 눈으로 흐트러진 베론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겠지. 네가 듣거나 보고 싶지 않아도 수도 없이 많은 차별이 있을 거고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슬퍼할 거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하든,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타고난 것은 전부 우연이고 거기엔 우리의 책임이 없으니까.”

“하지만 저희의 운명은 신께서 정하시지 않았나요? 그걸 우연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요?”

“흔히 신께서 운명을 정한다고는 하지만, 신께선 우리의 탄생을 축복하시되 우리가 나아갈 방향으로 직접 손을 잡고 끌어주는 분은 아니라고 하시지 않든?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든, 중요한 건 신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란다.”

베론의 말에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시도폰은 떨떠름한 감정이 남아있는지 그다지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불균일한 풍족은 오히려 독이기도 하니…. 너무 어려운 이야기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타고난 것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면 너와 성녀님은 못 만나는 게 운명이었겠지만 이미 만나고 친하게 지내고 있지 않나?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받아들이는 건 네 마음이다만.”

“어, 제가 성녀님과 친…하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성녀님께서 말에서 내리실 때마다 항상 먼저 달려오는 게 너니까.”

눈에 띄게 당황한 폰은 손을 꼼지락거리고 괜히 발로 얕게 쌓인 눈을 차며 ‘그, 그런가요? 남들이 보기엔 좀 이상한가요?’라고 물었다. 코지가 옆에서 그걸 봤다면 ‘몸을 그렇게 꼬다간 등나무가 되겠다!’라고 지적할 법한 자세였다.

“나는 농담은 잘 하지 않아. 진심으로, 나는 네가 그분의 곁에 잘 있어 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린 시절의 추억만큼은 대체하기 힘드니까.”

“네. 시키지 않으셔도 저는 계속 카리타스를 보고 싶어서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있지만… 아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옆에 계속 있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야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열심히 수련해서 사제가 되는 것이겠지. 신성력은 얼마나 되지?”

꽃이 피어나려다가 냉해를 입고 죽어버리는 것이 의인화되면 이런 느낌이겠거니 싶은 표정으로 시도폰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거주관에서 최하위 신성력을 가진 아이들이 모인 곳이 5구역, 시도폰과 코지가 있는 곳이었다.

“저… 5구역입니다.”

눈은 잦아들었지만, 적막감은 이전보다 더해졌다. 침묵이 길어지고 폰의 눈이 점점 네모나게 변하려던 때에 베론은 변명 아닌 변명을 어떻게든 생각해내야 했다.

“뭐, 꼭 신성력이 있어야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 북부에서 훈련하면서 두 구역 정도는 건너뛰는 일도 있었으니 네가 이번 수행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만 읽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었군요!”

베론은 그게 100여 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생략했다. 수행을 통해 신성력이 상승하는 경우는 왕왕 있었지만, 대부분 이미 신성력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에서 조금 더 올라간 것이지 한 구역 이상으로 뛰어넘는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방방 뛰며 신나는 폰에게 베론은 전하고 싶었던 말을 다급하게 꺼냈다.

“아무튼, 자길 믿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니 앞으로도 그분을 도와주길 바란다. 단장님만 하셔도 내가 없었으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은 베론은 폰에게 마차로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의문 하나를 풀고, 또 다른 의문을 얻은 폰이었지만 아직 북부에 도착한 것도 아니고 기사단장을 만난 것도 아니니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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