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캐스궁] 고해

※ 캐릭터 붕괴 주의

※ 저의 종교관과 관련이 없으며, 종교라는 소재를 차용한 창작품일 뿐이니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 !!!연애 안함!!!

※ 캐스영궁으로 봐도 상관은 없지만, 민감하신 분은 열람에 주의하세요

※ 포타에서 이사 중!


죄없는 이들은 잠에들어 아무도 신을 찾지 않을 시간.

어둠이 깔린 성당 앞에 도착한 아처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부터 오는 긴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달빛만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풍경 속, 창문 너머로 유일하게 아롱거리는 주홍빛에 시선을 빼앗길 따름이었다. 아처는 그 빛에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 50명 남짓의 이 작은 건물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유일한 성당이었다. 평화를 기도하는 이들, 현명한 조언을 구하는 이들, 이웃의 안녕을 묻는 이들은 언제나 온화한 빛을 품고 있었기에 이곳도 언제나 빛으로 가득했다. 아처는 무신론자였기에 보통의 성당이 어떤 모습을 갖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소의 빛이 사라진 건물 내부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와중에 유일하게 빛을 품고있는 고해소의 모습이란, 심해 깊은 곳으로 저를 이끄는 아귀의 초롱과도 같았다.

고해소에 대한 첫 인상은 커다란 장롱 정도였다. 혹은 감옥이거나.

입구로 보이는 곳에 걸린 커튼을 걷어내자 사람 한명 다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절로 숨이 막혀왔다. 극단적으로 한정된 공간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정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죄악에 사로잡힌 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처는 이제 도망갈 길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몸을 숨기듯이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자 눈은 절로 빛이 있는 곳을 향했다. 작은 나무창 건너편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캐스터…….’


아처를 이 곳으로 부른 신부의 이름이다.

캐스터는 푸른 머리에 붉은 눈이라는, 100m 밖에서 봐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처음 본 그의 행동거지는 '경박하다' 평할 수 있는 부류에 속해있었기에 자신을 신부라 주장하는 그의 말에 아처가 코웃음을 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후줄근한 후드를 걸친 체 웃는 잘 빠진 얼굴을 보고서 바로 ‘신부’라는 직업을 떠올리긴 어려울 것이다. 모델이면 몰라도.

하지만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서 기도문을 읊는 그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가 신을 모시는 가장 현명한 사자라는 사실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을거라 확신했다.

그는 깨끗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웠으며 기민하고 직선적인 인물이었다. 캐스터는 호쾌한 성격에 배려심이 깊은, 흠잡을데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아처를 바라볼 때의 시선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을 뿐이다.

그렇다. 아처는 그가 불편했다. 눈이 마주칠 때 마다 몸 구석구석을 탐색당하는 것 같은 꺼림직함이 잔잔히 공기 중에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숨기고 있든, 모조리 끄집어내질 것 같은 감각. 그의 앞에 서면 죄를 지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함에 떨게된다. 아처는 그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 영향인지 특히나 성당 근처에선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던 칠흑을 몸에 두른 그는 평소보다 더 고결해 보였기에. 모두가 그와 함께 기도하는 아침에도 아처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왜 여기에 오고 만걸까. 평소에도 대화를 주도하며 사람의 의중을 사정없이 찔러대던 캐스터였기에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걸어올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처가 고해소 안에 들어온지도 10분이 넘어가는 무렵, 그는 아직까지도 말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희미해 들리지 않는다. 아처는 그런 캐스터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불편한 공기가 환기되지 않은 체 작은 상자 속을 메꿔간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해가 진 시간만큼 기분은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앉아있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슨 연유로 자신을 이 곳으로 불렀는진 몰라도 오늘은 상념에 빠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분명 좋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될터이니.

아처는 참지 못하고 고해소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그 때, 드디어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도망가는거냐?”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다.


“죄를 고해라, 아처.”

“…….”

“나와 그분이 들을 수 있도록.”


아처가 숨을 삼키는 소리만이 밀실에 울려퍼졌다.

나의 죄.

얼마 전에 들었던 불쾌한 노이즈가 낀 목소리가 머릿속을 횡단하는 기분이 든다.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발걸음과, 그 등을 쫓던 붉은 시선이 떠올랐다.

떨리는 숨소리에 얽혀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아처의 목에선 깊이 잠긴 목소리가 세어나왔다. 마주잡은 속은 떨리고있었다.


“…파더.”

“…….”

“지옥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전 그 곳에서 왔습니다.

아처는 정부군에 소속된 군인이었고, 테러리스트가 범람하는 내륙의 최전방에서 배치되어있었다.

그 곳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고아가 많았다. 아주아주, 많았다. 제대로 된 신분 하나 없는 아이들을 주워다 정부군으로 훈련시키며 고기방패로 써먹는 일은 흔했고, 아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아처는 꾸역꾸역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왔다. 다리가 분질러지고 배가 뚫리고 머리가 깨져도 죽지는 않았다. 부대원이 전멸해도 아처는 살아돌아오는 상황이 몇번 반복되자, 군사기지 내 사람들은 아처를 귀신 보듯이 굴었다. 아처와 함께 작전을 하게되면 죽는다는 근거없는 소문만이 일파만파 퍼져 군사기지 내에서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전장을 지휘아는 윗선들은 고립된 아처에게 관심을 가졌다. 쓰기 좋은 말이 하나 생겼단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처에겐 숨어있는 난민 캠프를 발굴해내거나 테러에게 가담한 이들을 색출해내라는 지령이 내려졌다. 정찰대라는 이름이 붙긴했지만 동료는 없었다. 살아돌아오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지원도 넉넉치 않았다. 아처는 어쩔 수 없이 무소속의 용병처럼 생활하면서 격전지를 떠돌았다. 총격에 스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난민들과 함께 포격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정부군인 걸 들켜 쫓기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퇴역 전 마지막 포인트에 도착하게 된다.


그 곳은 국제구호단체에서 지원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난민 캠프였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배치된 정부군의 병사들도 간혹 눈에 밟혔다. 아처는 부러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캠프는 쾌적하진 않지만 식사자리와 잠자리가 갖춰진,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다. 아처는 그 곳에서 전쟁 난민으로 섞여들어가 치료도 받고, 밥도 먹고, 잠자리도 제공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지역에서 이런 환경을 접하는 건 드문일이었기에 밝은 낯빛의 사람들이 당황스러웠다. 이 곳의 사람들은 전장 중에 마주친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유했다.

표면 상 용병이라는 입장 탓인지 아처는 이것저것 부탁받는 일이 많은 편이었다. 식사를 만든다던가, 도구를 만들어 준다던가, 기계를 고쳐준다던가. 의뢰라는 이름에 잔심부름을 끝내고나면 작은 보수와 함께 손재주가 좋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낯선 반응이었다. 군대에선 임무가 끝나고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독방의 침대 위에서 다음 업무가 하달될 때 까지 웅크리고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으니까.

사람들의 태도 말고도 아처가 가장 놀랐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여태껏 아처가 봐온 ‘아이들’이란 말라비틀어진 인형마냥 어미의 품에 안겨있는 ‘어떤 물체’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이 곳의 아이들은… 살아있었다.

울고, 경계하고, 화내고, 웃는 하나의 ‘사람’이었다. 사람 중에서도 너무나 약해 화기는 커녕 날붙이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약한 사람. 저절로 손이 많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아처는 아이들을 돌보고, 캠프의 사람들과 관계를 깊이 다져갈 수록 캠프에 배치된 군인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은 숫자로 합니다. 상대의 머릿수를 줄이는 건 전술의 기본이죠. 그 땐 전쟁난민들이 살기 위해 테러에 가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군입장에선 모든 난민들은 미래의 테러리스트로 보였을테죠. …그래서 죽였습니다. 위험분자라 낙인찍고 화마에 휩쓸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

“이 사람들은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그저 살고싶어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전 해야만 했습니다.”

“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격전지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수십에서 수백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나갔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아처와 같은 고아 출신의 병사들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한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전쟁을 위해 살아가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전세는 테러리스트에게 기울고 있었다. 돌발적으로 사람들을 습격에 금품과 식량을 갈취하고 마음가는대로 사람들을 죽여댔지만, 일반인과 테러군을 구별짓기 어려운 상황에 정부군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긴 만무했다. 테러군과 같이 무차별적인 폭력대응을 하는 날엔 국제 사회에서 받는 모든 지원이 끊길테니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정부군은 아처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고한 일반인을 죽이는 것도 ‘테러에 가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찰대의 보고 하나면 합당한 작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하는 짓은 테러군과 같은, 그 이상으로 악랄한 짓이었지만 전쟁은 말했다시피 숫자 싸움. 정부군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겸사겸사 테러군을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라 밖으로 나가 준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악.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아처는 못할 것이 없었다. 그랬어야 했지만…

난민캠프에서 머무르던 구호 단체들이 철수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처는 그 캠프의 작은 평화를 위해 무모한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국제 단체가 철수한 직후, 아처는 사람들을 모아 이 캠프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 규모에, 보호해줄 공익 단체도 없으니 언제 테러군이나 정부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아처가 하달받은 임무 내용이 그랬다. 아군이 철수한 후 공습을 요청해라.

다행이도 캠프 내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지, 설득은 잘 먹혀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룹을 나눠 머무를 지역을 물색하고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처는 곧 해어지게 될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무사해야 한다고 무운을 빌어주었다. 잘자라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며 아처는 자신이 누군가를 향해 웃어준게 이번이 처음이란 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들에게 건네받은 통신기를 아직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잘도 웃을수 있구나, 하고.

하지만 복잡한 심정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캠프엔 지옥이 찾아왔다.


“테러군이 있었던 겁니다. 그 규모의 사람들 틈에 없을리가 없었을텐데…….”


아처는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 알아챈걸까. 통신기를 건네받던 장면을 들킨걸까? 아니면 기계를 고칠 줄 아는 걸 보고 처음부터 의심했던걸지도 모른다. 그 근방에서 기계를 만질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인이거나 테러군 아니면 정부군이었을테니까. 단순한 소거법만 대입해봐도 답은 금방나왔다. 제 안일함과 어리석음에 치가 떨렸다. 이제와서 그 내막따윈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총격이 시작된 건 아침이었습니다. 난민들이 캠프를 떠난다는 것을 안 테러군은 아직 남아있는 보급품을 가로채기위해 쳐들어왔고,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은 난민들이 캠프를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저를 요구했습니다. 정부군 소속이니 어떻게든 인질로 써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겁니다.”


아처는 코웃음을 치며 어리석은 놈들이었다고 일갈했다.


“그들이 난민들로부터 저를 넘겨받은 직후,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치들은 몰랐던 겁니다. 제가 버리는 말이었다는 걸.”


큰 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한 테러군들의 족적은 일찍이 정부군에게 알려졌고, 그 목적지가 아처가 있는 곳이란 걸 안 상층부는 망설임 없이 공격을 지시했다.

캠프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쑥대밭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혼란을 틈타 빠져나온 캠프의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삶의 흔적이 있던 곳은 모조리 타버렸고 누군지 모를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습니다. 숨이 붙어있는 자들에게 어떻게든 손을 뻗으려 했지만, 철조각이 가득 박혀 넝마가 된 팔로는 아무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감정을 죽이려는 듯 아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뱉었다. 아직도 타버린 살결의 역한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숨을 삼키고, 뱉어내는 그 일련의 소리조차 형편없이 떨리고 있어 아처는 속으로 저를 비웃엇다.


“그나마 다행인건 절 순순히 테러군에게 넘긴 덕분에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기 전, 절반정도의 난민들은 캠프를 떠나 무사할 수 있었단 겁니다. 하, 웃기지 않습니까 파더? 절반밖에 죽지 않아 다행이라니. 그 말을 하고있는게 이런 위선자란게,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는 목소리엔 웃음기는 먼지 한톨 담겨있지 않았다. 아처는 저려오는 왼팔을 쥐어짜며 말을 이었다.


“그 공습 이례 전세는 정부군에게 기울었습니다. 더 이상 정찰대는 필요가 없어졌고, 팔을 다친 전 더 이상 군인으로 지낼 수 없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상이랍시고 불러줄 이도 없는 이름과 함께 아처는 이 마을에 던져졌다. 버려졌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찾아온 상처 투성이의 우중충한 남자는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아처 자신도 이 곳에서 잘해보자는 생각은 없었다. 쥐죽은듯이, 지급된 주거지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생활을 이어갔다.

캠프에서 만났던 한 자원봉사자가 아처의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오지만 않았다면, 답장을 하려 방 밖에 나오지 않았다면 아처는 방 안에서 질식사든 고독사든 했을것이다. 편지를 부치기위해 방을 나온 그 날 캐스터를 만났으니까.

 건물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처를 본 캐스터는 눈썹을 한번 치켜 올리더니 별안간 씨익 웃어보였다.


‘이사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형씨.’


그 핀잔이 캐스터와 나눈 첫 대화였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아처를 이끌고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을 소개라는 이유에서다.

아처가 캐스터와 만날 약속을 했던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을 나누지도 않았을 뿐더러, 애초에 아처는 그 날 이후로도 방 문을 나선적이 없다. 그저 어느 이른 새벽, 인기척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아처의 눈앞에 캐스터가 서있었을 뿐이다. 혼란스러운 정황에 잔뜩 경계하며 노려보던 아처의 눈 앞에 캐스터는 열쇠더미를 짤랑, 흔들어 보였다. 나이 비슷한 남자끼리 친목 좀 다져볼까합니다, 했더니 주더라. 캐스터는 그렇게 말했다. 기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거지로 끌려나온 아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캐스터와 함께 돌아다니는 걸 본 사람들은 아처를 ‘신부님의 친구’라 부르면서 가게며 마을의 명소를 안내해 주었다. 캐스터는 힘없는 여인들과 어르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아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캐스터는 틈만나면 아처를 끼고 돌아다녔다. 멋대로 집에 침입하고선 배가 고프다 칭얼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성화에 못이겨 재료를 사고자 상점가에 들르는 건 정해진 순번이었다. 그리곤 요리가 입맛에 맞았는지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리퀘스트도 많아지기 시작했고… 아처는 캐스터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방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물론 항상 귀신같이 붙잡으러 와서 큰 소용은 없었다.

마을의 유일한 성직자이며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남자. 그는 그 입장을 이용할 줄 알았다. 권력남용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아처가 캐스터와 함께 있는 풍경이 마을 사람들에게 익숙해 질 때 쯤, 아처는 큰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온화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사람들에게 맞춰주기 위해 억지로라도 한번 더 웃으려 애를 써야했다. 그건 마치 캠프에서 지내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캐스터가 있었다.


불가사의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아처는 출신지도, 직업도 불분명한 히키코모리 남자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 인사는 건낼 수 있을지 언정 본인의 시간을 써가면서 챙겨줄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아무런 득이 없다. 처음엔 신앙에서 기인한 아가페적인 무언가가 아닐까, 원래 오지랖이 넓은 성격인건가, 의문을 가져보았지만 그건 잘못된 가정이었다. 적어도 아처가 봐온 캐스터는 보살핌은 능하되 ‘선’이 명확한 인간이었으니까.

설령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해 온데도 캐스터는 그 사람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철저히 제 3자로써 지켜봐주고, 조언을 하며 스스로 그 영역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에 쉽게 들이는 일이 없었다. 즉, 그는 현명하고 뛰어난 '조언가'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문은 커져만갔다. 해결사가 아닌 조언가의 입장을 고수하는 캐스터. 그가 아처의 영역에 쉼없이 발을 들이미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거 무단침입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이들에겐 절대 하지 않던 사적인 질문이나 스킨쉽에서 조차 캐스터는 서슴이 없었다.

일생을 전장에서 보낸 아처는 너무나도 손쉬운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적 접촉은 물론 스킨쉽 자체를 꺼려한다. 등에 닿는 손, 어깨 동무, 팔을 붙잡히는 것 등 모두 아처에겐 불쾌하다는 감각으로 귀결되는 행위였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왼팔은 특히나 그 감각에 예민하여 몇번이고 이웃들에게 안좋은 기억을 남길 뻔 했었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은 괜찮다며 웃어주었지만 아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도든 무고한 이들에게 향하는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주 잠깐, 반사적인 반응에 스쳐지나가는 순간일지라도 아처는 그들이 느꼈을 공포심에 온몸이 떨려왔다. 지금 서있는 곳은 전장이 아니다. 앞으로는 그 곳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죄없는 이들에게 해악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가슴 속에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조심성 없었다며 미안하다 다독여주는 주름진 얼굴에 아처는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캐스터는 달랐다. 대단한 근육이라며 가슴과 팔뚝을 향해 서슴없이 뻗쳐오는 손길에 불쾌감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그만두라며 밀어내도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당황하긴 했어도 불쾌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캐스터와의 공방 사이 가슴 안쪽에 먼지와 같이 차곡차곡 쌓이는 막연한 응어리에 아처는 초조해졌다. 그저 그만했으면 좋겠다란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캐스터의 손이 왼쪽 팔을 붙잡았을 때였다. 쌓여있던 무언가가 팍,하고 터져 올라오는 감각에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캐스터의 손을 난폭하게 쳐낸 뒤였다. 피가 식는단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일순 냉정해진 사고는 딱 현황을 파악할 만큼만 작동하고, 역류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무수한 탄피의 철조각이 박혀 피가 흘러내리던 기억. 목에 닿았던 불쾌한 온기. 제 몸을 움직이겠다는 당연한 의지가 차단된 절망감. 그리고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려 애를 쓸 때 마다 전류마냥 흐르던 통증 따위가 머리 속을 지배했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두번 다시 그 곳엔 설 수 없다.

남아있던 이성으로 힘겹게 기억을 걷어내자 기억 속의 손이 아닌 현실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았았다. 눈앞엔 뿌리쳐진 손을 바라보는 캐스터가 있었다.

둔해진 머리로 맞다, 먼저 캐스터에게 사과를 해야지. 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왼손을 그러쥐는 악력에 정신이 들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캐스터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웃고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잡은 손을 더 강하게 쥔 캐스터는 좋다고 말했다.


‘뭐가?’


무의식적으로 나간 얼빠진 질문에 그는 날것의 감정이, 기분 좋다고 말했다.

약간의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한 손을 비틀어 빼려하자 캐스터는 다른 손으로 아처의 왼팔을 쓸어올리며 작게 기도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러고선 이마를 맞대고 미소짓는 것이다.

아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알고있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언제나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캐스터가 아무 말 없이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하니까. 내일 또 오겠노라 인사를 하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테니,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 정돈. 그거 정돈 괜찮은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틀 전인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난민들이 향한 곳이 테러리스트들에게 검거당했다는 소식이었죠.”


아처는 캐스터와 마지막으로 갔던 바에서 들은 라디오의 음성을 떠올렸다. 시끄러운 바의 소음들 사이로 들리던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 그것이 들려주는 단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처의 뇌리에 박혔다.

그리고 아처는 도망쳤다. 더 이상 바 안에, 이 마을에,  캐스터의 앞에 서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잔당들 중 그 캠프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었던 것이겠죠. 정부군은 확실하게 승기를 잡고있었습니다. 테러군에겐 마지막 발악이었을테고, 남아있는 싹을 남김없이 잘라내려는 정부군에 의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되겠죠.”


자신의 죄악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렇게 또, 자신으로 인해 발목이 잡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리라. 

아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심각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고였으나, 흐르지는 않았다. 눈동자에 담긴 건 이제 허무 뿐이었다.


“전쟁은, 악은 끝날 겁니다. 그렇지만 전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팔만 남은 체 또 살아남았습니다. 구원받아야 하는 이들은 모두 배신 당했는데 난, 왜 나만은…….”


절망에 물든 목소리.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땐 어떻게 해서든 보여주지 않았던 일면이다.

아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어떤 흐느낌도 새어나갈 수 없도록. 마치 그럴 자격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 인영이 창 너머에 있는 캐스터에게 보이지 않았을리 만무한대도.


“…알려주시겠습니까, 파더. 이 죄악을 끝내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하면 좋은건지…….”


제발, 캐스터.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불린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캐스터는 나지막히 말했다.


“무릎 꿇어.”

“…뭐?”

“그냥… 무릎 꿇어.”


의문을 묵살한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처는 좁디 좁은 밀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커튼으로 가려진 시야는 어두웠고 밤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만에 토해 낸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남아있는 기억의 찌꺼기와 감정의 잔해들은 머리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지친 눈으로 막연히 고개를 든 그 때.

커튼이 열리고 달빛을 등진 캐스터가 나타났다.


검은 사제복과 대비되는 푸른색이 아처의 눈을 뜨이게 했다. 아처의 죄 앞에 침묵을 고수하던 현명한 신의 사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처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역광에 가려진 캐스터의 얼굴은 아처가 그의 그림자에 완전히 삼켜지고 나서야 또렷이 보였다.

붉게 빛나는 그의 눈은 마치 사랑스런 아이를 보는 듯한.

욕망어린 연인을 보는 듯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양립하는 두 감정을 캐스터의 눈동자에서 읽으며 아처는 다가오는 그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뇌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저항할 의지 따윈 이미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아버린지 오래다.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은 그저 그 앞에 있느니라.”


느리게, 느리게 다가오는 하얀 손은 아처의 목을 쥐고, 뺨을 훑고, 눈가를 매만졌다.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요.”


턱을 들어올려 입술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받으며 아처는 눈을 감았다. 잠이 들 , 또는 죽음을 기다리 듯.

부서져가는 이성을 뒤로한 체 지금은, 이 순간 만큼은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자 했다. 과거의 죄는 사라지지 않고, 속죄하되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할 수 없는 죄라면 잠겨 죽어도 좋다. 오히려 그리 하겠다. 그것이 네 품 안이라면.


“…곤고한 사람이로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착각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망한 몸에서 내 너를 건져내리라.”


곧 두 사람의 숨이 겹치고 이를 지켜보던 달은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쳤다. 눈을 가리듯이, 또 다른 죄악의 탄생을 탄식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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