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창궁] 실패 감각

고딩 창궁

※ 포타에서 이사 중!



실패 감각이란 말이 있다.

물론 진짜 있는 말은 아니고 내가 방금 만들었다. 이게 뭐냐면, 말 그대로 확신에 가까운 강렬한 실패의 예감이란 소리다. 뽑기를 하는데 돌연 '아 이건 안된다'는 삘이 꽂힌다던가, 술 첫잔을 마셨는데 '오늘은 술이 안받네'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고등학생이 이걸 어떻게 아냐고? 글러먹은 형제가 있으면 알게된다.

지금부터 하려는 행위가 철저하게 실패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고 대체로 그게 맞는 순간이 있다. 스탭이 제대로 꼬여 넘어지기 직전처럼, 고백을 받은 소꿉친구의 눈썹이 미묘한 각도로 틀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솟아나는 감각.


“랜서, 나는…….”

“…….”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속된 말로 조졌다고 한다.


‘플랜A는 망했군.’


빤히 예상했던 반응에 좀 억울하기까지 하다.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미안하지만 여기선 나도 할 말이 많다.

10년 넘게 부대끼고 산 친구 사이이니 남들을 대하는 것 보단 거리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사람친구 사이에 모닝키스 같은 건 안한다. 수련회에서 6명이랑 같은 방에서 자 본 경험을 근거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잠 덜 깬 친구놈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스킨쉽은 등짝 스매시 정도였다. 운동하고 왔을 때 땀 닦아주면서 웃지도 않고, 머리카락 정리해 준다면서 몰래 입맞춤 같은 거 안한다. 안한다고!

그게 '친구'끼리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난 오늘부터 너 말고 친구 없다. 다른 놈들은 아무도 없을거다. 솔직히 모닝키스는 이제 익숙해져서 나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머리카락 쥐고 막, 그랬을 땐 정말. 머리통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건 오해 살만 하지 않은가? 아마 창문에 비춘 모습을 내가 보고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젠장, 친구 놈들이 아처 자식 카사노바니까 조심하라고 떠들 때 웃어넘기는게 아니었는데….


“미안하지만 네 기대에 부흥해주지 못할 것 같다.”

“…….”

“…정말 미안하다.”


거절한거면 거절한거지 그렇게 미안해 할 건 또 뭐람. 저러다 울겠네.

물론 녀석 성격 상 그 만큼 내 표정이 좋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기분이 안좋긴 하다. 차였는데 좋을 인간이 얼마나 있겠냐만.


“그…나는…….”

“뭘 그렇게 허둥대냐? 누가보면 너가 차인 줄 알겠다.”

“……넌, 괜찮은가?”

“아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윽, 하고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인다. 그러니까 왜 네놈이 그런 반응을 하는 거냐고……. 끝까지 사람 햇갈리게 만드는 놈이다. 날 불쌍히 여기게 될수록 나한텐 잘된 일이지만 말이다. 이제 플랜B로 간다.


“학창시절에 추억하나 만들어보자고 한거였어. 유학가면 이제 너랑 못만나잖냐.”

“그렇지만 연락정도는”

“안하지. 난 널 그런 의미로 좋아하고, 넌 날 친구로 밖에 안보는데. 난 자학엔 취미 없다.”

“…….”


주저한다. 그래, 좀 더 고민해라. 날 더 가엽게 여기라고.


“다 무시하면서 너랑 얘기할 자신은, 솔직히 없어.”


아처가 죽고 못사는 슬픈사람을 연기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잿빛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 약한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나이기에 더 파급력이 크겠지. 이런 반응이 낯설것이다. 나이스 이미지메이킹, 과거의 나.

아처는 망설이다 입술을 달싹였다. 슬슬 미끼를 물 때가 됐나.


“…그럼.”

“그럼?”

“이제, 나와는 두번다시 연락하지 않을 생각인건가?”


이건 좀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백중에 백은 '내가 도와줄 일 없나?'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슬퍼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둔 아처의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아처가 한 말은 마치…….


“나랑 연락 못하는게 싫어?”

“그, 그런게 아니라! 우린 네 부모님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니 언젠가 네 소식을 물어올 수도 있는데, 그 때 연락하지 않는단 대답을 하면 분명 걱정을… 하실테니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아처의 변명아닌 변명에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막느라 안간힘을 써야했다. 귀엽다. 붉어진 얼굴도 당황한 표정도 갈피를 못잡는 손도. 이런 걸로 나보다 키도 큰 놈을 귀엽다고 칭하다니, 나도 갈 때 까지 간 모양이다.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거고 이건 이거다.


“그래도 난 너랑 더 연락하고 싶은 마음 없어. 하물며 친구 입장에서.”

“랜서…….”

“하지만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못 할 것도 없지.”

“부탁?”

“그래.”


성큼성큼 아처에게 다가가 두 손을 붙잡았다. 놀란듯이 떨리는 것이 피부결로 느껴진다.


“나랑 사겨.”

“…랜서, 그 얘긴 방금”

“알아, 나 차인거. 진짜로 사귀어 달란 소리도 아냐. 종업식까지 그러는 '척'만 해달란 소리지.”

“사귀는 척을, 해달라고?”

“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너랑 다시…친구로 지낼 수 있게끔, 널 좋아한단 마음을 없앨 시간과 수단이.”

“…….”

“너랑 할 수 있는거, 해보고 싶었던거 다 해보면서 정리할거야. 평범한 연애의 이별을 준비하는 것 처럼. 물론 내가 하고싶다고 너에게 강요하는 일도 없을거고.”

“그렇지만 그래선 네가…….”


아처의 눈동자는 괴롭지 않겠나? 라고 묻는 듯이 보였다. 연심을 정리하기 위해 너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무뢰한에게 보낼 눈빛은 아니다. 물론 나니까 그런거겠지만, 지금이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난 최대한 아처가 안심할 수 있도록 평소에 짓지 않던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괜찮다고 말했다.


“다 너와 함께있기 위한 일이야. 난 괴롭지 않아.”

“…….”

“응? 아처.”

“…그럼, 내 연락처 지우지 마라.”


아처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슬며시 붙잡힌 손을 비틀어 맞잡아왔다.

지금… 그게 중요해?

다른데 가서 고백받아도 이렇게 반응하느냐고 묻고싶어 죽을 지경이지만 다 된 밥을 망칠 순 없었다. 귀여워서 봐준다 진짜.


“종업식. 종업식까지 다 끝낼게.”

“…알겠다.”

“고마워, 아처…….”

“무리하지 마라.”


안심한듯이 웃어보이자 아처의 얼굴에도 그제야 미소가 번진다.

시험은 끝났고, 곧 있으면 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이 끝나면 종업식은 금방이지. 3개월이 채 될까 말까하는 시간 안에 정말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겠느냐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무리라고 대답할꺼다. 사람 마음이 프로그램인가? 삭제 누르면 지워지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녀석의 상냥함을.

치사한 일임은 알지만 정공법이 영 통하지 않는 녀석에겐 이러는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짝사랑 기간 동안 맛본 내 고통에 대한 복수라고 봐도 좋다.

뒤돌아 보지 않고는, 손을 맞잡지 않고는 못베길 만큼 있는 힘껏 절절하고 애틋하게 사랑을 속삭이리라. 예정된 이별이 다가왔을 때, 지독하게 뻔뻔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네 입에서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그 때가 오면 이 두손으로 널 품에 안고야 말겠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온전히.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해라. 내 품 안에 있어준다면 어떤 불평이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럼 그 때 까지 잘 부탁한다!”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않을거다.

벌써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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