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궁] 단계
별거 없이 둘이 꽁냥대는 이야기
* 페이트 5차 랜서/아처의 진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에미밥 같은 시공입니다.
* 제목 붙이기 너무 어렵다.
* 포타에서 이사 중!
내 애인이 이상하다.
“주시죠, 부인. 들어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우이. 참 상냥하시구려.”
“아닙니다.”
노부인의 짐을 들어주면서 따뜻하게 웃고있는 저 까만 피부의 미남말이다. 3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오늘 먹을 저녁 반찬 얘기를 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제 연인을 내버려두고 노부인과 함께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이러는게 한두번도 아니고 하루이틀도 아니다. 랜서는 한숨을 쉬었다.
사귄지 고작 일주일.
애인이 나랑 안놀아준다.
성배 전쟁이 끝났다. 성배의 오류로 인해 전쟁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사과인지 변덕인지, 전쟁에 참여한 서번트들은 모두 수육하여 제 2의 인생을 허락받았다. 일부는 마스터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일생생활을 영위해갔고, 일부는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랜서는 후자에 속했다.
거지같은 교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알바란 알바는 다 뛰고다닌 결과, 그는 훌륭히 독립에 성공했다. 어찌나 사방팔방 뛰어다녔는지 이 거리에 랜서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다. —물론 화려하기 짝이없는 외형 탓도 있었겠지만.
랜서가 상점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사방에서 그를 향한 인삿말이 들려왔다. 세이버네 꼬맹이일 때도 있었고 분홍색 라이더일 때도 있었으며 의외로, 붉은 궁병이 말을 건네올 때도 있었다. 당시의 랜서로선 그건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전쟁 당시 가장 많이 충돌했던 만큼 랜서에게 아처는 날서고 냉소적인 인간이었다. 그런 궁병이 느슨한 무채색의 옷을 입고 제게 “연어 있나.”라고 말을 걸자 랜서는 소리 높여 웃고야 말았다. 그는 예상대로 이상한 놈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 시선조차 웃겼던 랜서 덕분에 아처는 연어를 얻어가기까지 5분이 걸렸다.
그럼 둘이 이후로 사이가 나빠졌나? 싶으면 그렇진 않다. 하루 종일 상점가에서 머무는 랜서 덕분에 둘을 자주 마주쳤다. 초반엔 꼬박꼬박 서로 시비를 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건너편 가게의 술이 맛있더랬다-하는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자주 마주치고 이야기를 하는 만큼 둘은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랜서가 집을 얻은 날 축하파티에 그를 초대할 정도는 말이다.
일상에 적응한 서번트들은 다들 성격이 좀 바뀐 것 같단 인상이 있었지만 아처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을 해오던 입은 온종일 침묵하고 있을 때가 많았고, 칼날과 같이 빛나던 눈은 텅빈 유리구슬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루는 톱니가 멈춘 기계처럼 공원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걸 봤다. 랜서는 그 꼴이 버려진 무기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집에서 벌어진 술판에서 쓰러진 그를 굳이 챙기겠다고 나선 이유는. 결투를 사랑하고 뛰어난 전사를 존경하는 반신은 버려진 질 좋은 검 한자루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지금도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단련된 몸은 아름다웠고 흘러들어오는 마력은 달콤했다.
물론 다음 날에 날아드는 쌍검을 피하느라 오랜만에 애창을 손에 쥐어야만 했지만.
정말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오히려 다음을 기약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이 관계를 좀 더 유지하고 싶었을 뿐인데, 웬걸. 이 남자가 너무 필사적으로 피해다니기에 그만 오기가 생겨버렸다. 나만 좋았던 건가, 싶은 이상한 억울함이 들었던 탓도 있다.
도망치는 남자의 뒷덜미를 물어 몇번 더 몸을 겹치고나니 어떤 확신이 들었다. 녀석 역시 이 관계를 싫어하지 않았다.
‘너에게 마력을 얻는 것이 효율적이다.’
‘린이 놀다 오라 하기에…’
‘저번에 도와준 답례로,’
‘좋은 술을 얻었으니.’
‘네놈 방 꼴을 가만 둘 수 없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온갖 핑계를 붙여대긴 했지만 아처는 매번 랜서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다. 이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다고 보는게 맞았다. 그렇다면 왜? 도망가던 그를 붙잡은 건 물론 자신이지만 도망치던 본인이 자진해서 찾아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아니야.”
그래서 손을 놓아봤다. 랜서가 먼저 원했다는 계기를 없애버리면 과연 아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끈질기게 들러붙던 껌딱지가 떨어졌다 기뻐하거나 이제와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거냐며 도발해오거나, 둘 중 하나라고 예상했다. 어느 쪽이든 즐길만 하겠다며 입맞을 다시고 있었거늘 아처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처음 거부의 말을 꺼낸 다음 날, 남자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상점가에도, 자주 가던 술집에도, 낚시터에도 통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직접 그의 (전)마스터인 소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뺨을 맞았다.
“내 아처를 가지고 놀더니, 이제와서 뭐?! 배짱도 좋아!”
다신 찾아오지마!! 라는 말과 함께 탄환처럼 날아오는 저주의 마술을 피해 달아나던 랜서는 억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가지고 놀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아처를 찾아가면 한동안 아가씨에게 문전박대를 당해야했다. 하지만 정말 거의 다 잡은 먹이였단 말이다. 나도 억울하다며 이야기만이라도 듣게 해달라고 하소연하자 그녀는 눈을 얇게 뜨며 랜서를 노려봤다.
이번 뿐이라면서 친절하게 기척차단 마술까지 걸어준 그녀는 아처를 또 상처입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방에만 박혀있는 그가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긴장한 체로 2층 방문을 열어보면 기운 빠지게도 그는 자고있었다.
아처의 마력은 텅텅 비어있었다. 아무리 서번트라도 수육한 상태다. 몇날 며칠 굶고있자니 몸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폐를 끼치기 싫다며 함께사는 소녀가 건네는 마력도 받아먹지 않았을게 뻔했다. 이 지경이 되서까지 저에게 오지 않았다니…. 랜서는 울컥 솟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자고있는 녀석의 머리를 쓸어올리자 “응—”하는 귀여운 소리를 낸다. 이윽고 모습을 들어낸 재색의 눈이 당황에 물들어가는 건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아처는 바로 달아나려했지만 애석하게도, 힘빠진 사냥감을 놓아줄 정도로 랜서는 무르지 않았다. 양팔을 꽉 붙들고 왜 자신을 피해다녔냐 묻자 그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통 얘기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랜서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에 손 안의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게 느껴졌다. 답지않은 연약한 반응이었다.
“난 너 보고싶었는데. 넌 아니었냐?”
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보이며 묻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 얼굴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질린 장난감이라도 손에 안잡히는 건 아쉬웠던 모양이군.”
전쟁 때나 보던 도발스런 표정이었다. 물꼬가 텄는지 그는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조 관념이 희박한 고대 영웅님은 이래서 곤란하다던가. 질려서 버렸으면 빨리 다른 것을 찾으러 가라던가. 너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이라면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라며 되는대로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아처.”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버린 물건엔 빨리 미련을 버리는 것이 너에게도…”
“나한테 사랑 받고 싶었어?”
딸꾹,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바르작 거리는 움직임조차 멈춘 남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포. 공포라니. 어이가 없었다. 호의를 품는 것이 그렇게까지 겁먹을 일인가?
생각해보면 이 남자는 항상 그랬다. 무슨 일이든 기호를 표하는 법이 없었다. 물건을 살 때도, 같이 술을 마시러 갈때도 먼저 ‘이게 좋다’고 말해온 적이 없었다. 그게 나쁜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표헌하길 꺼려했다. 그래서 제 방에 찾아오는 그가 기꺼웠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 나는… 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거냐. 난….”
이것봐라. 이미 다 들통난 마당에 아처는 변명을 찾고 있었다. 그 자신을 위한 혹은 랜서를 위한 ‘너에게 호의를 품고있지 않다.’는 변명을. 랜서는 “아니긴.”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이 좋아하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처는 참 미련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부러 아닌 척 시치미를 땐다. 그러면서도 멀어져가는 것에 벌벌떠는 것이 미련하다 말할만 했다. 정말로 그 물렁한 속이 보이지 않을거라 믿고있는건가?
랜서는 웃었다. 눈앞의 남자가 이젠 티가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두려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맞붙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그 감정들이 안어울린달지, 꽤나 새로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몰라도 분명 자신과 그의 관계에 한톨 필요없는 고민인 것은 명확했다. 랜서는 아처에게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넌 날 좋아하는게 맞아.”
“…….”
“그리고 나도 널 좋아하는게 맞아.”
“…? 뭣,”
“알겠으면 오늘 밤에 술가지고 와라. 아, 그리고 아가씨한테도 제대로 해명해 두라고!”
토오사카 저를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것을 보고 어느 순간 ‘사랑스럽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살아있는 것의 본능인 것인지. 한탄스러웠지만 랜서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 속은 밤에 먹을 안주 생각으로 한 가득이었다.
아처와는 다시 애매하게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를 품고있다는 것도 알고, 몸을 섞는 관계였지만 랜서는 ‘어떤 말’을 꺼내는 것을 자제했다. 아처가 그 말을 직접 해주길 원했다.
아처는 미련하고 또 고집스러운 남자였다. 어물쩡 넘어갔다간 어떤 사단이 날지 몰랐다. 이런 건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다. 그래서 랜서는 기다렸다.
그와 여전히 상점가에서 마주치며 잡담을 떨고, 밤에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드물게, 먼저 주말에 약속을 제안해 오기도 했다. 조금 씩 단계를 거쳐 제게로 오는 그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인내의 시간은 힘든 법이다. 그에게 오해를 사 싸운 날이면 더 그랬다. “니가 내 애인도 아니잖아!”하고 횟김에 소리쳤을 땐 아, 망했다. 란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거기에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장단을 맞추는 녀석 때문에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5초전의 제게 죽빵을 날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싸우고 둘은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 틈에 낙엽은 모두 떨어져 눈이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아처는 한 밤중 랜서를 공원으로 불러냈다. 갑작스런 부름에 의아함 보단 반가움이 앞섰고, 침묵 속에 어색함 보단 편안함이 먼저 느껴졌다.
갈 때 까지 갔구나, 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아처가 “린에게 혼이 나서 말이지.”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자신은 예전에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았던 적이 없으며,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만 했다. 그러니 랜서가 기껏 얻게된 인생을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곤란하게 됐다며 아처는 웃었다.
“녜가 타인과 함께 행복했으면 한다고 말하면서도, 타인과 함께 있는 널 보고 있는게 힘들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어… 너, 그 말은…….”
“그래서 난생 처음 응석을 부려볼까 한다. 너 정도 되는 남자라면 내 불행엔 꿈쩍도 하지 않을테니 말이야.”
“…진짜로?”
통 믿지 못하는 얼굴의 랜서에게 아처는 “이제와서 발뺌해도 늦었다.”라며 비웃었다. 그 말을 랜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 둔해빠진 남자는 이전에도 몰랐을 거고 이후로도 모를 것이다.
자신의 품에 안긴 남자는 “…사랑한다, 랜서.”라며 아주아주 작게 속삭였다. 랜서가 바래 마지 않던 한 마디였다.
그래, 이렇게 힘들게 쟁취한 애인 놈이 말이다.
“너 요즘 나한테 차갑지 않냐?”
“갑자기 무슨 말인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날라오는 한 마디에 아처는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는 시비 때문만은 아니였다.
“…이게 다 뭔가.”
“응—? 보면 몰라? 술이잖아—!”
연인과의 따뜻한 보금자리엔 알코올 향기와 왠 주정뱅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하나, 둘, 셋… 대충 눈에 잡히는 술병들만 봐도 5개가 넘는다.
“아—쨔—”
“냄새난다, 주정뱅이. 이건 다 어디서 난건가?”
“타이거한, 누님이… 조은 술을 얻었다길래…….”
“후지 누나…….”
집에 있던 와인에 사케, 못 보던 위스키 병들 속에 파묻힌 랜서를 보며 아처는 한숨을 쉬었다. 랜서의 출신지를 배려해 아이리쉬 위스키를 가득 선물해주는 후지 누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입고있던 무거운 옷가지를 정리한 후 그에게 다가가자 곧바로 품을 파고든다. 가슴께에 머리를 부벼오는 것이 퍽이나 귀여웠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다.
“좋은 술이 있으면 내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했던게 아닌가?”
“우…….”
“혼자 다 먹어버리다니. 욕심이 많군.”
“으우—”
“어디 변명해 보시지, 주정뱅이.”
“—야! 내가 먼저 물어바짜나!”
“혀 풀렸다 랜서.”
술 취한 랜서는 귀했다. 자신은 맥주 몇캔으로 금세 술통이 가득 차 버리지만 제 연인은 달랐다. 술통이 태평양만 한지, 아무리 마셔도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후지누나와 좋은 술친구가 되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취한 경위는 궁금했지만, 아까 건넨 질문이 원인이라면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아처는 지금의 랜서를 즐겨두기로 했다.
“내가 널 서운하게 만들었나?”
“그래! 맨날… 상점가에 아가씨들한테 친절하게 굴고…….”
“여성에겐 원래 친절해야 하는 법이다.”
“데이트 하다가도 쌩하니 먼저 가버리구… 나보다 나무 위의 고양이가 더 좋냐?”
“그건 아니다만,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맞아 귀엽지……. 아니, 이게 아니라!”
랜서는 아처가 매번 자신과의 시간이 아니라 타인을 돕는 일에 더 열중하는 것 같다며 불만은 토로했다. 랜서의 주정을 즐기고 있던 아처도 이 말엔 반응하지 않으 수 없었다. —자신이 그랬던가?
아처는 랜서에게 사랑한다 말한 그 날 이후로, 이보다 더 충실할 수 없는 삶을 살고있었다. 연인과 함께하는 잠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그와 당연하다는 듯이 밥을 먹는다. 일을 하고 돌아와선 여가 시간을 보내고, 연인과의 시간을 즐긴다. 그리고 때때로, 눈에 띄는 곤경을 도와주며 선의를 퍼트리는 삶.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인, 아주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틀림없이 랜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처는 조금 우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랜서, 내가 널… 불행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아? 아니 그 정도 까진 아니고…”
랜서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넣었다. 우물거리며 고민하는 것이 말을 고르는 듯 했다. 술 기운에 피부가 달아오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어딘가… 부끄러워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아, 쫌생이 같아서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랜서, 머리카락이 상한다.”
제 머리를 마구 해집는 손을 제지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해지는 건 속상한 일이다.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정돈하고 있자니 그가 손을 잡아왔다.
“…이번 생은 나랑 있어준다고 했잖냐. 그렇게 말한지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 자꾸 니가… 딴 사람들만 신경쓰니까…….”
“…랜서?”
“그, 초조…했었다고…….”
뾰로퉁하니 말하는 그를 아처는 멍하니 바라봤다. 몇개월 전만해도 제게 창을 겨누며 살기를 내뿜던 그가 왜 자신을 더 신경써주지 않느냐며 투정을 부리다니. 생선가게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그는 정말 현세의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 그로부턴 하릴없이 평화로운 일상이 느껴진다.
그것을 ‘사랑스럽다.’고 정의한 아처는 웃었다. 벌게진 얼굴로 웃지 말라며 성을 내는 그가 참으로 귀여웠다.
린의 말대로다.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 이런 순간도 찾아온다.
“하하…. 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았다.”
“…….”
“삐지지 마라 랜서. 네가 안심이 될진 모르겠지만, 변명정돈 하게 해줘.”
“…그래.”
“사람이 얼마나 본능에 충실한 생물인지 아나?”
“하?”
예상대로 그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아처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는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을 이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태에서 인간은 딱 살아남기만을 바란다. 어느정도 본인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면 그제서야 다른 이들에게로 눈을 돌리지. 그들과 함께 살며,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진다는 본능을 드러내는거야.”
“하아…….”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젠 옳은 일을 하려 한다.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남들에게 주고싶다는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거다.”
“…….”
“난 지금 옳은 일을 하는 중이다 랜서.”
다 정리된 머리를 놓아주며 아처는 웃었다.
“몇개월 전만 해도 난 본능도 따르지 못하는 반푼이였다. …네가 날 사람으로 만든 셈이군.”
다시금 생각하지만 넌 역시 대단하다. 그리 말해주고 싶었건만, 랜서가 갑자기 달려드는 통에 아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바닥에 부딪힌 뒷통수가 얼얼했지만 그에게 꽉 잡혀 만져볼 수도 없었다.
‘혹이 안났으면 좋으련만.’
움직이지 못해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아처의 귀에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진짜 치사한 놈이라며 투정부리는 듯한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랜서의 등을 슬슬 쓸어주자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한 순간에 눈 앞의 풍경이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그럼 약속하나 해라.”
“그럼 화를 풀어줄건가?”
“물론. …앞으로 ‘옳은 일’할 때 나도 같이 해.”
“…너무 나만 득보는 제안 아닌가?”
“시끄럽고, 약속 할꺼야 말꺼야?”
아직 술이 덜 깬건지 랜서의 얼굴이 붉었다. 분명 자신의 얼굴도 비슷한 정도로 붉을 것이라 아처는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
“좋아.”
“그럼 나도 부탁하나 해도 되겠나?”
“어? 뭔데.”
“다녀왔단 인사를 아직 못받았다만.”
의아함에 차있던 랜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져내린다. 물론, 이라 대답한 랜서는 곧장 키스를 퍼부어줬다. 맞닿은 입술에서 술냄새가 퍼져 아처는 푸스스 웃었다. 랜서도 상대가 왜 웃는지 아는 듯이 미안하다며 따라 웃는다.
“어서와, 에미야.”
“다녀왔다 쿠 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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