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캐스영궁] 착각은 자유

톼님 ( @ TWA_pioka ) 리퀘스트

* 현대AU, 할리킹st

* 주제도 컾링도 에누리(?)한 신개념 리퀘.. ㅇ<-<

* 늦어져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렇지만 받아주세요.. 재미 없어도 읽으세요.. 제 마음..! 

* 포타에서 이사왔습니다!




섀도우는 심각한 얼굴로 형형색색의 상자 더미 앞에 서있었다.

직원은 물론 오고가는 사람들은 모두 굳은 인상의 안대 낀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색으로 둘러싼 그가 아기자기한 가게 인테리어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의 섀도우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시점에서 자리를 떴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앞의 수많은 상자 중에서 어떤 색이 좋을지를 고민하느라 주변 상황이 신경쓸 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연인인 캐스터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섀도우의 가정환경은 상당히 척박했다. 원인 불명의 화재로 인해 한순간에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섀도우는 보육원과 위탁가정을 오가며 마음둘 곳 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독립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보육원을 나와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는 커녕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급급해 결국 중퇴 후 아르바이트에 매진해야 했다. 늦은 오후부터 펍에서 일하고 한밤 중에 퇴근하여 편의점으로 출근, 아침이 되어 퇴근하면 그제서야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캐스터와 만날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운이 없었던 탓이라고 하겠다.

섀도우가 일하던 펍엔 프라이빗 룸이라고 VIP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다. 이 프라이빗 룸은 원래 전용으로 관리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단체 예약이 잡힌 날 그 직원이 사고를 당해 일손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결국 주방보조였던 섀도우까지 투입되어 몰아치는 주문을 해결해야했다.

룸으로 정신없이 술병을 나르던 섀도우는 순간 시야에 밟히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늑대 문양이 새겨진 은색 반지를 낀 남자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푸른색의 머리카락, 피곤한 듯 내리깐 붉은 눈은 주변에 인사불성의 주정뱅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들만큼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던 섀도우는 남자가 술잔을 입에서 떼고 시선을 움직일 때가 돼서야 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쌓여있는 빈 병을 몇차례 정리하고나자 사장님이 찾아와 룸은 이제 괜찮고, 고생했으니 오늘 일당은 더 쳐주겠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겨우 시간이 생긴 섀도는 주방에 돌아가 셰프와 가볍게 담소를 나눈 후 평소 하던 것 처럼 바(bar)로 나와 홀을 둘러보았다. 밤이 깊은 탓인지 손님이 많이 줄어 여유로워 보였다. 섀도우 역시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컵을 닦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두어개 정도 식기를 정리했을 때, 섀도우의 시야에 본 적 있는 늑대 문양의 반지가 나타났다.

천천히 고개를 든 섀도우의 눈 앞엔 푸른색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카운터석에 앉으며 맥주를 부탁했다. 섀도우를 알아보진 못하는 듯했다. 룸에서 봤을 때 보다 한층 더 피곤해보이는 것이 주정뱅이 사이에서 제법 고전한 모양세였다.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섀도우는 남자에게 약간의 호의를 배풀기로 했다.


“난 맥주 부탁했는데.”

“피곤해보이는데, 술보단 물이 낫지 않겠나.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니 마셔둬라.”

“흐응. 그럼 이건?”

“…레몬 샤베트다.”


남자에게 건네진 것은 부탁한 맥주가 아니라 얼음물과 레몬 샤베트였다.

샤베트는 섀도우가 주방 보조일을 할 때 재료가 남아 심심풀이로 만들어본 간식이다. 먹어본 스태프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지금은 상비해 두고 있다. 물만 마시기엔 입이 심심할 듯 하여 꺼내온 것인데, 남자의 반응에 괜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어 조금 민망해졌다.


“개인적으로 음주 후에 단걸 먹고싶어질 때가 간혹 있어서… 흠, 필요없다면 먹지 않아도 괜찮다.”

“아냐. 기껏 준건데.”


남자는 태연하게 섀도우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샤베트를 떠먹었다. 한입 맛을 본 그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샤베트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멈추지 않고 그릇을 비우는 모습에 섀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맛있게 먹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음식이었던 걸까? 그 역시 너무 급하게 먹은 것이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한번 한 후에 잘먹었다고 작게 고했다. 그 모습이 조금 재밌었던 섀도우는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라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후 둘은 짧게 대화를 나눴다.

남자의 이름은 캐스터. 섀도우보다 두살 많고, 경영 공부를 하고 있으며, 오늘은 관련 연수가 있었던 날이라고 한다. 원래 뒷풀이 같은 자리엔 흥미가 없어 바로 귀가할 예정이었으나, 운이 없게도 붙잡히는 바람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다행히 제정신이 아닌 동행들은 스태프가 귀가 채비를 해준다고 하여 자신은 한숨 돌릴 겸 룸을 빠져나온 것이라고 한다.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섀도우는 캐스터에게 이만 돌아가라고 전했다. 자신 역시 곧 퇴근이라 이제 샤베트를 내어줄 사람도 없을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캐스터는 이왕 돌아가는거 태워줄테니 같이 나가자고 말했다. 맛있는 디저트의 답례라나 뭐라나.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섀도우는 교통비도 아낄 겸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올라탄 차는 좋은 향기가 나고, 승차감도 좋았으며, 캐스터는 대화를 유려하게 주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섀도우는 이 짧은 드라이브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술이 깰 때 까지만 더 어울려달라는 캐스터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또 다음 아르바이트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에 어쩌다보니 호텔에 들어가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아침에 캐스터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섀도우는 크게 화를 냈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얻어 맞은 듯이 아픈 허리, 온몸에 빨갛게 올라온 자국 때문만은 아니었다. 캐스터와 자느라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무통보 결근해버려 얄짤없이 잘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르바이트 하나를 빠지면 이번 달 집세 마련이 매우 곤란해진다. 불만을 가득 담아 캐스터에게 책임지라고 소리치자, 섀도우의 가슴에 얼굴을 문대며 졸음 속에서 허우적 거리던 캐스터는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 성의없는 대답에 섀도우는 캐스터를 걷어차고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힘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흉터와 안대 때문에 안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 위협적으로 변해 지나가던 아이를 울려버린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보단 자리를 벗어나길 택한 섀도우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섀도우는 덩치도 좋고, 체력도 좋고, 성실하기까지 하지만 겉모습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녹록치 않았다. 새하얀 머리는 너무 눈에 띄기에 업종과 맞지 않는다, 안대와 흉터 때문에 손님들이 무서워할 것 같다, 피부는 태닝인가? 불성실해 보인다 등 거절의 이유는 하나같이 불합리한 내용 뿐이었다. 그나마 펍은 대학교 때부터 신세를 진 지인의 추천해준데다 이 별난 외형이 나름 수요가 있어 일할 수 있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새벽에 일하기 때문에 손님이 많이 없어 괜찮았는데…이젠 다 물건너 갔다. 운이 좋아 당장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쳐도 월말까지 집세를 마련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심지어 집주인은 융통성이란 것이 없어 집세가 밀리는 순간 예외 없이 방을 빼라고 말하니, 진퇴양난이란게 이런 것일까 싶다. 이제 할 수 있는거라곤 집주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쫓겨나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 정도였다. 강도, 사기를 지나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사장님이 갑자기 파산했다는 변명거리까지 떠올리며 섀도우는 해가 떠있는 내내 머리를 쥐어잡았다.

하지만 이 치열한 고민은 다음 날이 되자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게, 뭐지?”

“집문선데.”

“그건 보면안다. 내 말은 왜 여기 주소가…그보다 네가 이걸 왜…아니, 그보다 네놈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냐!”

“네비에 집주소 찍었던거 잊었어?”


섀도우는 두통이 몰려옴을 느꼈다. 실수로 원나잇한 상대에게 횟김에 '책임지라'고 소리쳤더니 상대가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을 사오며 '이제 괜찮지?'라고 지껄이는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돈지랄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만 화풀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괜찮은 레스토랑 찾아놨어.”


뻔뻔하게 자신을 차로 이끄는 캐스터의 모습에 섀도우는 반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날 밤이 그렇게 끝내줬던가? 중간에 기절해서 자세히 기억도 안나는데. 더 하고 싶어서 이러나? 하지만 그렇다고 건물을 사? 지금 수작부리는 건가? 꼬셔서 장기라도 팔려는 속셈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가면서 캐스터를 향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 의심을 계속 품고 있기엔 눈 앞의 얼굴은 너무 빛났고, 입 속의 스테이크는 너무 맛있었다.


그렇게 캐스터에게 이끌려 생활하기를 한달, 세달, 일년…섀도우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캐스터는 지금 자신과 ‘연애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놀이가 아니라면 캐스터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캐스터는 잘생겼고 돈도 많고 몸도 훌륭한, 아주 능력있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가난하고 기술도 없으며 온몸이 흉터 투성이인 보잘것 없는 남자한테 목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처음엔 뒷탈없는 섹스상대가 필요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캐스터를 직접 집으로 초대해 적당히 상대해주고 이 관계를 끝내고자 했으나, 같은 이불에 누워 숙면을 취한 그는 아침밥까지 야무지게 얻어먹고 볼뽀뽀를 해주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미련없이 떠나버렸다. 한 두번도 아니고 꽤나 여러번 말이다.

그 외에도 난데없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들고 온 재킷에 유명 명품 브랜드 마크가 떡하니 박혀있질 않나, 밥을 너무 부실하게 먹는 것 같다면서 편하게 쓰라고 카드를 건네주질 않나, 방 한구석에 있는 금속 공예 도구를 보더니 무슨 보석이 필요하냐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질 않나… 비싼 선물은 부담스럽다고 질색했더니 심플한 모양의 시계를 선물해 줬는데, 일할 때 차고갔더니 손님들에게 손목을 붙들려 이 시계의 브랜드가 얼마나 명망있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어야했던 것 등등 온갖 일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만이 목적이라기엔 지나치게 정성스럽고, 섀도우를 동정한 거라기엔 캐스터는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충실했다.

어김없이 호텔의 침대 위에서 피폐한 몰골로 눈을 뜬 섀도우는 저를 껴안고 곤히 잠든 미남을 보며 한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아주 정성스럽게 관계를 유지하고 때때로 상대방을 향한 욕망을 질척하고 강렬하게 표출하는 것. 하지만 결코 그 대상이 섀도우일 수는 없는 것. ‘연인’.

캐스터는 기본적으로 바쁜 사람이라 여자를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게 됐고, 캐스터는 생각했을 것이다. 섀도우는 뭔가를 먼저 부탁하는 일이 없어 성가시지 않고, 붙임성있는 성격도 아니라 짧게 만나고 헤어져도 불만이 없다. 캐스터가 놀이 상대로 이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인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캐스터는 본격적으로 여자를 만날 시간을 만들기 전까지 자신을 상대로 ‘연애 놀이’를 시작한 것이라고 섀도우는 확신했다. 아주 완벽한 추론이다.

그날 이후로 섀도우는 캐스터가 건네주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끔은 캐스터가 하는 부탁도 들어주면서 말이다. 캐스터는 일종의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신은 그 기대에 부응할 의무가 있었다. 섀도우가 요근래 고민이 많았던 것 역시 그 의무를 위해서였다. 캐스터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요맘때엔 캐스터가 바쁜일이 있다기에 그냥 지나갔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생일 파티가 있었다고 덤덤히 말하는 것이다. 섀도우는 내심 당황했다. 생일이라는 중요 이벤트를 알려주지 않은 캐스터의 저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캐스터가 섀도우의 생일을 알았을 땐 어마어마하게 높은 호텔의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고-어째선지 레스토랑에 사람이 한명도 없어 의아해하자 캐스터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주말을 꽉 채워 축하해줬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생일이라는 이벤트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은 확실한데 왜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화사하게 웃으며 “생일선물로 네 하루를 나에게 줘.”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말이다. 오히려 정말로 그렇게 말할까봐 섀도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루 쉬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올해 역시 아무 말도 하지않는 캐스터에게 섀도우는 이유모를 언짢음을 느꼈다. 만약 캐스터가 자신의 사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관심 없는 척을 하는거라면 더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오기로라도 캐스터의 손에 선물을 쥐어주자고 결심했다. 처음엔 캐스터가 필요할만한 물건을 사줄까 했지만, 역시 금전적으로 엄두가 안났기에 결국 직접 만든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제법 예전에 공예 연습삼아 금속판에 캐스터의 이름을 새겨 열쇠고리로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군인 인식표 같은 투박한 모양세였지만 그걸 받은 캐스터는 날 듯이 기뻐했고, 지금도 그 열쇠고리를 차키에 달고 다닌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의미있고 연인 같은 물건을 만들 예정이다. 가령, 반지라던가.

물론 선물 준비 비용은 모두 자신의 돈이다. 캐스터의 카드를 썼다간 사용 내역을 보고 반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오만가지 선물을 보내올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아무생각 없이 편의점에서 캐스터의 카드로 계산 할 때면 득달같이 연락해 그런거 말고 근처 스시집에서 특선 메뉴라도 시켜먹으라며 걱정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을 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선물 정도는 스스로 준비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캐스터가 기뻐해주었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검은색에 푸른색의 리본태가 둘러진 반지 케이스를 집어 든 섀도우는 필요한 재료가 더 있는지 둘러보기 시작했다. 캐스터의 생일까지 앞으로 이틀. 이제 막 틀이 잡히기 시작한 반지에 세공을 하고, 다듬기 위해서는 시간이 빠듯했다. 오늘도 캐스터와의 약속은 미룰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약속을 거절하는 문자를 보내면서도 섀도우는 조금 걱정됐다. 만나지 못한 일주일 사이 캐스터가 질려버리기라도 했다면 선물을 준비한 보람도 없어지는데 말이다. 망설이던 섀도우는 캐스터에게 보낼 문자에 조심스레 한 줄을 추가했다.


혹시 네 생일파티에 가도 괜찮을까?


물론이지. 내가 마중 나갈게.

걱정과 달리 섀도우의 물음에 흔쾌히 긍정을 표한 캐스터는 시간을 알려준 뒤 마중을 갈테니 집에서 기다리란 말을 남겼다.

약속 당일, 얌전히 캐스터를 기다리던 섀도우를 맞이한 것은 그의 비서였다. 캐스터의 차를 탈 때면 항상 운전석에 앉아있어 섀도우에겐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조금 피곤한 듯 보였으나 언제나와 같이 미소를 머금으며 섀도우를 안내했다. 올라탄 차에 캐스터는 없었다. 그렇게 섀도우는 핸드폰과 선물용 반지 케이스만 달랑 들고 파티가 열릴 예정이라는 연회장에 들어섰다.

도착한 연회장은 캐스터의 취향에 맞춘 듯 화려한 장식 없이 모던한 분위기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식기, 하물며 조명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것이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섀도우를 연회장의 가장 안쪽 방으로 이끈 비서는 캐스터가 곧 도착할테니 편히 기다려달란 말을 남긴 체 유유히 자리를 떴다. 귀빈을 모시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듯한 방 안엔 다양한 주류와 정성스레 플레이팅 된 안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기적 거리며 방 안을 배회하던 섀도우는 결국 푹신해보이는 가죽 소파를 놔두고 음식이 구비된 테이블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불편함과 긴장에 손이 떨릴 지경이다.


섀도우는 캐스터가 유복한 사람이란 것 쯤은 알고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피부와 빛나는 푸른 머리카락은 관리받고 있는 태가 여실히 드러났고,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언제나 잘 손질되어 있으며, 섀도우가 본 바 같은 옷을 입고있던 적이 없었다. 선물이랍시고 보내오는 선물들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비싼 브랜드의 제품의 연속이었고 말이다. 캐스터는 마침 경영을 공부한다고도 했으니, 어떤 회사를 경영하고 있든 그의 집안은 어지간히도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이정도 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연회장을 지나오며 언뜻 본 사람만 해도 얼마 전에 국제적인 영화제의 후보로 올랐던 배우, 음반 판매량이 두달 째 1위라는 그룹의 가수, 외국의 유명 경제지 표지모델로 뽑혔다던 사업가 등,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명예와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뉴스라곤 편의점에서 잡지와 신문을 정리할 때 언뜻 보는게 다인 섀도우가 알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말 다했다. 그런 사람들이 캐스터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시간을 냈다는 것도, 캐스터는 그런 사람들을 의자도 없이 세워두고 있다는 것도 모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집에 놀러올 때 마다 이불 위에서 뒹굴며 어리광을 부리던 그 남자와 이 파티의 주인공이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다.

섀도우는 당연하게도 기가 죽어있었다. 여기는 자신이 들어와도 될만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버린 탓이다. 단정한 드레스와 정장을 갖춰입고 우아하게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들과 회색 후드티에 색바랜 진을 입은 체 구석에 어정쩡히 앉아있는 자신. 어떻게봐도 어우러지질 않는다.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그들의 입에서 자신이 어떻게 오르내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편하게 오라기에 평소처럼 입고왔는데, 전혀 편한 자리가 아니잖아.

"캐스터 이 거짓말쟁이……."

 캐스터의 비서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빌딩 입구에서 부터 출입을 거부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 마냥 서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불편하고 불안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섀도우는 캐스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캐스터가 비서를 시켜 섀도우를 구석진 방에 있도록 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후줄근하고 흠집 투성이인 남자가 캐스터와 연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캐스터는 안목을 의심받고 말것이다. 하물며 그 남자가 자신을 캐스터와 연인이라고 소개하는 날엔 더더욱. 오늘 섀도우가 파티에 참석하게 된 것도 캐스터의 의지가 아닌 섀도우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도 타의로 인해 이런 위험 부담을 지고싶지 않았던 것일테지.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그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섀도우는 자신이 겪는 불편함이 납득이 되면서 동시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이 많은 곳을 꺼리는 섀도우가 모르는 사람 투성이인 파티에 가겠다고 말한 것은 모두 캐스터가 하고있는 '연애 놀이'에 맞춰주기 위함이었다. 연인으로써 생일을 축하해주고 마음이 담긴 선물을 전해주며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는, 그런 이벤트를 캐스터가 원할 것 같았기 때문에 노력한 것이다.

캐스터에게는 놀이일 뿐일지라도… 아니, 놀이일 뿐이기에 의무 뒤에 숨어 섀도우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몇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기뻐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기뻐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섀도우는 날밤을 새가며 선물을 준비하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스스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그 정성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꼽을 준다고?

섀도우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마중나온다고 해놓고 비서만 달랑 보내질 않나, 방구석에 사람을 방치해놓질 않나, 이 시간이 될 때 까지 얼굴 한번 안내비치질 않나. 놀이여도 연인 행세를 하려면 좀 더 정성을 들여야 하는거 아닌가? 만나지 못한 일주일 간 아쉬워하는 티도 별로 안내더니, 이미 볼장 다 봤다 것 처럼 구는군. 시덥잖은 놀이에 장단을 맞춰주니 자신이 정말 쉬워보였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맞춰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열받게.

섀도우는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술병을 들어 그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화를 가라앉히는덴 술만한게 없다는 지인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진한 포도 향기와 찡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알코올에 접시에 있던 안주들도 하나 둘 집어먹기 시작했다. 과일 카나페가 아주 일품이었다. 과카몰리가 얹혀진 나초도 술과 궁합이 잘 맞았다. 맛있는 안주에 술은 쉴세 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한병을 비우고 두병 째를 마시던 섀도우는 어질거리는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왜 캐스터의 말을 들어야 하는거지?

생각해보니까 너무 불공평한 것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아무리 놀이라도 연애는 상대가 없으면 못한다. 캐스터도 섀도우를 아쉬워해야 할 상황이라는 거다. 하지만 막상 아쉽게 굴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란 사실이 너무나 억울했다.

저 놈은 평소에도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말이 많고, 부탁하지도 않은 걸 제멋대로 해오는데. 왜 자신은 생일선물 하나 챙겨주는데도 녀석의 눈치를 보고 사정을 생각해줘야 하느냔 말이다.

이게 정말 '연애'를 표방한 놀이라면 섀도우 역시 제멋대로 선물을 주고 캐스터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만약 그것 때문에 캐스터가 질려서 떠나버린다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충동을 억누를 이유가 되진 못했다. 무엇보다 섀도우는 지금 취기 때문에 미래의 일 따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 섀도우는 방 밖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캐스터가 연회장에 도착한 것이다.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섀도우는 비웃음을 머금은 체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흥, 운 나쁜 캐스터. 너를 환영해주는 인파들 앞에서 당당하게 애인 행세를 해주지. 쌀알 하나도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네가 옆에 두기로 선택한 것이 이런 흉지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것을 만천하에 까발려주겠다! 하하하… 다시 말하지만 섀도우는 많이 취해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파티장을 향해 당당히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캐스터는 예상대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뚫고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봐도 잔뜩 취한 섀도우를 보며 자리를 피해준 사람들 덕분에 섀도우는 쉽게 캐스터의 시야에 들어갈 수 잇었다.


“어, 섀도?”


이윽고 눈을 마주치자, 섀도우는 그에게 아주 찐한 키스를 갈겼다.

캐스터의 입술과 맞닿은 순간 웅성이던 연회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 공간에 자신과 캐스터만 남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갑작스래 달려든 섀도우 때문에 캐스터는 일순 휘청이는 듯 싶었다. 질척하게 숨을 나눈 후 캐스터의 품으로 고꾸라진 섀도우는 그의 팔이 제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음을 눈치채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사람들 앞이라고 참고 있는 꼴이 웃겼다. 안긴 상태 그대로 캐스터의 목덜미에 고개를 숙이자 옅은 담배향이 났다. 오랜만에 맡는 캐스터의 체취에 섀도우는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기대고 있는 어깨가 조금 들썩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섀도우, 술마셨어?”

“응…”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나 갈 때 까지 기다리지 그랬어.”

“흥. 얌전히 기다리는 충견 훈련을 시키고 싶었던 거라면…사람 잘못봤다. 난 고양이파거든.”

“…하, 확실히 너는 강아지보단 고양이지.”


캐스터는 품 안의 섀도우를 쓰다듬으며 주변에 있는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사람들을 물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갑작스래 캐스터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추길 강요하는 섀도우 탓에 그 오더는 실행될 수 없었다.


“그래! 난 말 잘듣는 개가 될 생각은 없다! 알겠나, 캐스터?”

“어…? 어, 그래.”


캐스터의 벙찐 얼굴에 어째선지 의기양양해진 섀도우는 방 안에서 했던 생각은 여과없이 떠벌거리기 시작했다.


“넌 날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난 그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책임도 없다! 너가 제멋대로 군다면 나한테도 제멋대로 굴 권리가 있다! 나도 네 사정과 주변 시선 따위 신경안쓰고 네게 뽀뽀할 권리가 있단말이다-!”

“…술 진짜 많이 마셨구나. 평소에 안하던 소리도 하고. 나야 좋지만.”

“읍, 에잇! 말하는 중이다! 뽀뽀하지 마라.”

“응응, 계속해. 그런데 집가면서 할래? 너무 취해서 걱정되네.”

“음. 그건 안된다. 아직 못한게 있어.”

“뭔데?”


캐스터의 물음에 섀도우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검은색 상자를 꺼냈다. 종이로 된 싸구려 반지 케이스였다. 섀도우의 손에 의해 조심스레 열린 상자 안엔 푸른색의 비즈가 박힌 은색 반지가 들어있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선물에 캐스터가 눈만 깜빡이는 사이 섀도우는 캐스터의 왼손을 더듬어 찾아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딱 맞게 들어가는 반지에 섀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넌 이제 내가 준 반지를 왼손 약지에 낀 사람이 되었다.”

“…이거 직접 만든거야?”

“그렇다. 흥, 본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나중에 딴소리할 때 각오를 해야할거다.”

“자기야…….”

“음, 할 일을 다했더니… 좀 졸리군…….”


섀도우는 목적이었던 반지를 캐스터에게 건네주고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취기와 함께 몰려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캐스터의 품에 쓰러졌다.


“생일 축하한다… 캐스, 터…….”



품안에 쓰러지 듯 잠든 섀도우를 보며 캐스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연회장 안의 사람들도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애초에 갑작스레 등장해 캐스터에게 엉겨붙은 저 흰 머리의 남성은 누구이며, 캐스터와는 무슨 사이기에 저 철저한 비지니스맨이 무려 자신의 파티에서 행해진 무례를 모두 묵인한단 말인가. 모두 눈치를 보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버린 것은 다행이도 캐스터의 평이한 목소리였다.


“오늘 절 축하하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 해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서 한분, 한분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제 ‘안사람’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봐야할 것 같네요. 모쪼록 파티는 편히 즐기시고,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 비서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평온한 밤 되시길.

품에 안긴 건장한 남성을 칭하는 단어에 경악한 사람들은 신경도 안쓴다는 듯이 제 할 말만하고 깔끔하게 등을 돌린 캐스터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졸지에 방문객 수만큼 미팅약속을 잡게 생긴 비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지만 돈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일테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섀도우는 캐스터보다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기에 캐스터 혼자서 안아들고 움직이기 어려운게 사실이지만, 지금의 캐스터는 자동차도 들고 나를 수 있을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양 팔에 담긴 섀도우의 체온과 무게가 깃털처럼 가볍고 양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제 연인.

일주일 동안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만나지 못하는 기간 동안 생일선물 준비를 하고 있단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설마 직접만든 반지로 프로포즈라니…….

섀도우는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각종 유명인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그런 퍼포먼스를 했다는 것 자체가 캐스터에겐 완벽하게 귀여운 프로포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섀도우가 본인 몫의 반지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걸맞는 반지를 준비해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떤 물건을 준비할지 시험하는 거야? 귀엽긴.”

섀도우의 손에 걸맞는 보석으로 뭐가 좋을지, 함께 살 신혼집은 무엇이 좋을지 따위의 행복한 고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고있는 섀도우가 알 길은 없었다.

“나한테 나중에 딴소리하면 각오하라고 했지만… 너도 마찬가지인거 알지?”

캐스터는 곤히 잠든 섀도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수동적이던 모습도 나름대로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아 귀여웠지만, 캐스터는 역시 있는 힘껏 욕심부려주는 쪽이 보기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진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좋은 변화다. 섀도우가 이 관계의 주도권을 캐스터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란 걸 알았거나, 적어도 그것에 불만은 품게 되었다는 소리니까. 

그렇게 정성껏 사랑을 속삭여도 자신의 착각을 고집스럽게 믿고있어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명분을 만들어주니 캐스터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깨어난 그의 눈앞에 서로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보여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캐스터는 무척 즐거웠다.

"잘자, 내 사랑. 네가 무슨 착각을 하든 나는 다 받아줄 수 있지만……."

내뱉은 말에 책임은 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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