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13

1차

“맞다, 벚꽃 라임 주스라는 거 알아요?”

“…그게 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규범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태현은 익숙하다는 듯이 제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화면 속에는 깔끔하게 단장한 카페가 있었다. 아직 오픈하기 전인지 내부는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사진은 아침 햇살이라도 받는지 유독 밝고 선명했다. 끄트머리에 교복을 입은 손이나 운동화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아침에 등교하면서 찍은 모양이다. 규범은 사진 속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나저나 벚꽃 라임 주스라니…. 특이한 이름이다. 라임이 들어간 주스라는 건 알겠지만 벚꽃은 어떻게 하는 걸까?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주스의 색을 벚꽃처럼 연분홍색으로 만드는 거다. 여러 카페에서 시즌 한정으로 이렇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진짜 벚꽃을 띄우는 방법도 있지만, 이쪽은 손이 많이 갔다. 꽃잎이 말라비틀어지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부터 시작해 위생까지 고려해야 했다. 아, 모형 벚꽃이라면 괜찮을지도.

어느 쪽이든 규범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규범은 사진 속에 적힌 상호명을 눈여겨보았다. 아무래도 체인점은 아닌 듯,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는 간판이 보였다. 이것 또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태현은 그런 규범을 힐끗 훔쳐보았다. 집중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 건드려보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가 규범이 화낼 수 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규범은 집중할 때 방해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예전에 장난삼아 한 번 방해해본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기세로 화냈다. 거기다 약 일주일이 넘도록 태현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눈앞에서 투명 인간 취급받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도 규범의 태도는 충분히 불쾌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뭐, 친구도 없는 거겠지만.’

자업자득이다. 태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 스마트폰을 든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몸뚱아리는 쓸모없다. 슬슬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부터 규범에게 톡을 보내줄 걸 그랬나. 태현은 보란 듯이 팔을 거두었다. 잘 보고 있었던 화면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규범이 태현을 노려보았다.

“왜요. 톡으로 보내드릴 테니까 선배 폰으로 마저 보세요.”

“하… 네가 먼저 보여줬잖아? 내가 보여달라고 한 게 아니니까.”

“고작 사진 한 장을 보는데 십 분이나 넘게 잡아먹을 이유는 없잖아요. 팔 아프고. 선배 눈치 봐야 하니까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이든 한 자세로 있으면 힘들잖아요. 가뜩이나 전 금방 앓아눕는데… 설마, 이런 상황에서 방해받았다고 또 저를 무시하는 건 아니겠죠?”

태현이 최대한 가엾게 보일 수 있도록 슬픈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보내기나 해. 근데 설마 그거밖에 없어?”

“애초에 아직 문 열리기 전인데 뭘 더 찍어올 수 있겠어요. 하교 중이라면 모를까. 아, 설마 멋대로 문을 따고 들어갔어야 한다고 말할 건 아니죠? 전 규범 선배만 믿어요. 설마 그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선배의 호기심을 충족해야 하는 건 싫어요.”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태현은 착실히 규범에게 사진을 보냈다. 여러 각도로 찍어두었기 때문에 조금 전에 보았던 사진보다 정보를 얻기 수월했다. 심지어 하교 후에도 간 건지 내부를 찍은 사진도 몇 장 있다. 사진을 무척 잘 찍는다며 규범이 작게 감탄했다. 카페에는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메뉴판 앞에 우뚝 서 있는 아저씨가 보였으나,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가게 주인으로 추정됐다. 규범은 메뉴판이 찍힌 사진을 꼼꼼하게 보았다. 조금 흐릿해도 무슨 메뉴가 있는지 얼추 알아낼 수 있다.

“아, 여깄네. 봄시즌 한정 벚꽃 라임 주스… 주스 사진은 없는 거야?”

“보시다시피 용돈이 부족해서 값싼 아이스티나 마셨거든요. 어때요? 신기하지 않아요?”

넉살 좋게 말하는 태현이 일부로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제야 규범은 어째서 태현이 독특한 이름의 주스를 말한 건지 알았다. 요컨대 사달라는 뜻이었다. 다른 카페에서 볼 수 없는 이름의 주스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규범은 한숨을 내쉬며 제 지갑에 얼마 있는지 헤아려보았다. 일단 이 정체불명의 주스를 살 돈은 충분했다. 거기다 태현의 몫까지 사주려면…. 이번 주는 매점에 많이 못 가겠네.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안내해.”

“고맙습니다.”

고작 주스 하나 사주는 건데 뭐가 그리 좋은 걸까. 활짝 웃는 태현을 보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규범은 모질게 대해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태현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자각이 있다. 이래서 따로 친한 친구들이 생기지 않는 거겠지만, 고작 그런 걸로 제 태도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생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규범은 모두에게 고립된 상태로 홀로 지냈다. 태현을 만난 것도 딱 그 무렵이었다.

규범이 이기적이어서 친구가 생기지 않은 거라면, 태현은 몸이 약해서 친구가 없는 쪽이었다. 매번 쓸모없는 몸뚱아리라고 투덜거렸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무척 좋지 않을 때는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버겁다고 말했다. 기껏 친구를 사귀어도 몸이 멀쩡하지 않으니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규범을 만났다. 그는 태현의 건강에 주목하지 않았다. 알아봤자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보이지 않으면 아픈 거라고만 생각하고 보통 사람처럼 대했다.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까? 태현은 규범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며 3학년 교실까지 찾아왔다. 고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태현을 보면 몇 살이나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잘 따르는 후배는 처음이었으니까.

‘…음료 말고도 뭐라도 더 사줄까.’

아주 가끔이지만, 기껏 자신과 잘 어울리는 이 후배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봤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사주는 게 전부였다. 규범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보냈다. 오랫동안 사용해 낡은 지갑 안에는 초록색 지폐 두 장이 있었다.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했다. 마카롱 한두 개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선배?”

“아무것도 아냐. 안내나 해.”

“예이, 알겠습니다.”

태현이 규범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소리와 함께 벚꽃이 흡사 비처럼 떨어졌다. 규범은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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