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14

그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언제 태어났더라?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건 부모로 추정되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몹시 늙었다. 도저히 갓 태어난 자식을 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자신은 여느 생명체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나고, 자라고, 끝내 사라지는 그런 삶을. 그러나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늙어가고 거동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졌을 때, 한 형제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늙지 않지?

그건 그가 제일 궁금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늙지 않았다. 성장이 멈추고 노화 또한 찾아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 유일하게 그를 피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어떤 사특한 주술을 쓰지 않았으며, 또한 늙기 싫다며 기도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 그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모두 그를 멀리하는 것으로 모자라 나쁜 소문까지 뿌렸다. 소문은 부모의 시체를 뜯어먹어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식이었다. 이따금 부모가 아니라 친인척이나, 혹은 약한 어린애를 먹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억울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죽은 이를 모욕하지 않았다. 그저 좋은 곳으로 가길 빌었을 뿐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까?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자극적인 걸 좋아했다. 모두 그를 악인으로 만들었다. 그 누구와도 엮여서는 안 된다는 듯이 악질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고립되었다. 왜 자신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신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당장 따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늦어도 좋다. 지금 당장 추하고 볼품없이 늙어 죽고 싶었다. 오직 죽음만이 그를 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죽을 수 없었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다. 목을 조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하다못해 넓은 바다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찾아온 건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과 흡사하지만 결이 다른 고통이 왔을 뿐이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자연스럽게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수십, 수백 번의 고통을 겪고 나서야 그는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정신 차리니 그를 손가락질하며 욕했던 사람이 모두 죽어있었다.

‘왜 나는…….’

자신만 죽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미칠 정도로 가슴이 저려왔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며칠이나 괴롭게 보냈다.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섞여 넉살 좋게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산속에 집을 지었다. 어쩌다 한 번 마을에 내려가서 장을 보았다. 굶어도 죽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건 싫었다. 거기다 위가 쓰린 감각도 유쾌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흙도 퍼먹으며 지낼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혀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마을로 내려갔다. 한 달에 한 번 내려갈 때도 있었다. 마을은 이상하게 활기가 넘쳤다. 내려갈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 모두가 부러웠다. 자신도 예전에는 저렇게 평범하게 울고 떠들면서 지냈었는데. 모두 아득히 먼 옛날이 되었다.

사실 죽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몇 번 도전해본 적이 있다. 과연 자신은 이대로 혼자 살아야 하는 걸까, 사람들 사이에서 섞일 수 없는 걸까. 작게 부푼 의문을 갖고 몇 달 내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한두 번 정도는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났다. 곧장 실행에 옮긴 건 좋았으나, 그는 비정상적인 불행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 없는 주제에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죽고도 남을 경험을 많이 겪었다.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짐 덩어리에 깔린다거나, 혹은 날카로운 날붙이에 찔리거나. 운 나쁘게 도적을 만나서 처참하게 도륙 당한 적도 있었다. 도적은 죽지 않는 그를 보며 괴물이라고 소리치며 도망갔다. 자연스럽게 좋지 못한 소문이 다시 떠돌기 시작했다. 죽지 않는 괴물. 예전처럼 모두가 그를 멀리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했다. 이웃들의 냉담한 반응에 그는 결국 체념하고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지쳐가기 시작했다. 죽지 않는 건 맞지만, 인간의 기준에서 괴물이라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를 제일 힘들게 한 건 가깝게 지낸 사람들의 배신이었다. 그들은 방긋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마음껏 드러내는 호의에 그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래서 무엇이 섞였는지 알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한 서커스장에 있었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계속해서 묘기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가 보여주는 묘기는 불사.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행동만 골라서 그를 괴롭혔다. 무엇을 해도 그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줄 때마다 구경꾼들은 환호했다. 끔찍한 걸 보았다면서 쑥덕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게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 없는 친절은 없는데. 만약 그렇다면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는데. 그는 그렇게 몇십 년을 서커스장에서 보냈다. 단장이 여러 차례 바뀌고 그를 이용한 묘기는 점점 자극적으로 변했다. 한 번 자극적인 것에 맛 들이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그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으며 서커스장을 탈출했다. 딱히 챙길 짐은 없었다. 아무도 그가 개인적인 소지품을 갖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서커스장에서조차 밑바닥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여러 번의 방황 끝에 그는 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 적적한 고독감을 참을 수 없을 때마다 마을로 내려갔다. 바글바글 사람이 모인 시장은 의외로 구경거리가 많았다. 서로 물건을 사고 대화할 뿐인데도 평화롭다는 게 느껴졌다. 이따금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으로 향하면 서로의 재산을 걸고 내기하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구나. 꼭 섞여서 살 필요는 없구나.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볼 때였다.

“아, 거기 조심해요!”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높이 세워둔 물건이 그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깔린다고 해서 죽지 않을 걸 알아서 그런가? 그는 굳이 피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깔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한 번 균형을 잃은 물건이 매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하라니까요!”

대뜸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내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대로 손이 이끌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간발의 차이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을 잡은, 그러니까 생명의 은인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그에게 타박했다.

“지금 죽고 싶어서 거기에 가만히 있었어요? 왜 피하질 않고!”

타박하고 있음에도 불쾌하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에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데 왜 자신을 구해준 걸까? 혹여 무슨 속셈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곧바로 의심했다. 서커스장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 이후로 그 또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모두 그에게 꿍꿍이가 있어서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털어놓기에는 눈앞에 있는 이가 너무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심결에 다음부터는 잘 피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납득했다. 아아, 그렇지. 어지간한 사람이면 이런 상황에서 다쳤지. 다치면 거동이 불편해지니까. 그는 그 나름대로 다쳐서 안 되는 이유를 꼽았다. 그러나 그 이유에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넣어두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모든 걸 뺏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합리화를 했다. 누구나 다 이렇다고. 이유 없는 친절이 없다고.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붙였다.

그래도 순수한 호의에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의외로 세상은 살 만한 것 같았다. 평생 단 것을 접하지 못했던 아이가 딱 한 번 입에 넣었을 때. 입안에 은은히 퍼지는 단 맛에 중독되어 계속해서 같은 걸 찾는 이야기랑 비슷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희망마저 뽑혀버리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는 터덜터덜 산을 오르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도 이름 모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상대방은 마을에 보일 때도 있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무래도 불규칙적으로 시장에 나타나는 듯했다. 그는 조금 더 이름 모를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알고 있는 건 생김새 뿐이었다. 정보를 모을 때 간혹 의심하는 눈빛을 받았다. 그는 태연하게 이전에 도움을 받았는데 답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고, 은인에게 은혜 갚기 위해 노력하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열정적으로 뒷조사를 해도 아무 의심을 받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위험한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도와준 상대의 이름은 주하였다. 성이 없는 걸 보아 부유한 집안의 자제는 아닌 듯했다. 뭐, 자신을 도와준 이의 부유함을 헤아릴 필요는 없다. 그는 일단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인 척 행세하려면 그럴 듯한 이름이 필요할 테니까. 마침 눈을 돌리니 연꽃 모양으로 조각된 장식품이 보였다.

‘연화라고 할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이름도 몇 년이 지나면 잊어버릴 게 뻔했다. 적당히 구색 맞추기 용이니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연화라고 지었다. 연화는 주하를 만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거듭 물었다. 모두 의아하다는 듯이 연화를 보았다. 간혹 의심의 눈초리를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청년에게 도움 받았다니… 참 신기할 일일세.”

“무슨 짓을 했나요?”

“아무래도 여기에 사는 사람은 아니구먼. 하긴, 이 내가 여기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잘 들으세. 그 청년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생명의 은인인 건 알겠지만, 그 청년은… 성격이 괴팍하여서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괴팍하다니. 확실히 도와줄 때 유독 연화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도와준다, 딱 이런 느낌.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괴팍하다고 칭할 수 없을 터다. 보다 확실한 근거가 있을 거다. 그러니까 모두 주하를 꺼려하려고 하지. 연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인 척 굴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인심 좋게 주하와 관련된 정보를 뱉었다.

주하는 홀아비 한 명을 두고 있었지만 집이 몹시 가난했다. 그래서 마을에서 제일 부유한 집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집 사람들이 몹시 성격이 좋지 못하고, 아버지 한 명은 아무리 온갖 약을 써봐도 도통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차 주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괴로움을 잊고자 사람들에게 나쁘게 대했다고 한다.

‘고작 그런 이유로 괴팍하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아무래도 이게 닫힌 사회의 폐해인 모양이다. 고작 날카롭게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멀리할 줄이야. 아마 주하가 괴팍한 성격을 가진 건 마을 사람들의 좋지 못한 편견이 있는 모양이다. 인심 좋다는 말 취소. 연화는 그래도 은혜를 갚고 싶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보다 못한 아줌마 한 명이 주하가 사는 집을 알려주었다. 연화는 곧장 고맙다고 인사하며 주하의 집으로 향했다.

왜 노예처럼 일하는 지 알았다. 주하의 집은 연화가 사는 것보다 못했다.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는 폐가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척 보아도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 한 명이 간신히 일어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다. 마지막으로 늙어 죽어 가는 형제가 떠올랐다. 연화는 참지 못한 채 그대로 노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여기에는 무슨….”

“주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갚고자 왔는데 아무래도 본인은 없는 거 같네요. 저, 실례지만 청소를 조금 도와주어도 될까요?”

어투는 허락을 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연화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창고에서 쓸쓸하게 방치된 청소 도구를 찾아냈다. 없는 것보다 나을 터. 연화는 곧장 거미줄을 털어내고 먼지를 밖으로 쓸었다. 이따금 하늘을 보며 시간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주하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못한 듯했다. 병자 특유의 지독한 냄새을 맡고 있으니 괜한 오지랖이 생겼다. 얼마 안 되는 쌀을 이용해 죽을 끓였다. 연화는 본래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남은 식량을 그대로 가져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당장 먹을 게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니라 주하 쪽이었다. 창고에 방치된 채 썩어가는 것보다 한 사람의 목숨을 연명하는 게 더 옳을 거다.

주하가 집으로 온 건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왔다. 주하는 시들어가는 야채 몇 가지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 ……뭐야, 넌?”

그리고 연화를 보자마자 적의를 드러냈다. 깔끔해진 집과 제 아비의 수발을 들고 있는데도 저러다니. 괜히 괴팍하다는 소문이 난 건 아닌 듯했다. 연화는 마지막 한 숟갈을 먹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그릇을 씻어야 다음에 사용하기 편하다.

“보시다시피 은혜 갚는 중이지.”

“뭐? 은혜라니? 내가 너를 언제 도와… 설마 며칠 전에 물건이 쓰러지는데 안 피한 얼간이? 네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는데.”

“…….”

“당장 대답 안 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연화를 재촉했다. 연화는 그 모습이 과거의 자신같다고 여겼다. 사소한 호의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 모두를 멀리할 때. 기묘했다. 연화가 이렇게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 건 주하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작 그 계기가 된 사람은 이렇게 타인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연화는 애써 웃으며 아무 흑심이 없다는 걸 드러냈다. 들고 있는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자신의 손을 펼쳐 보여주었다. 흉기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였다. 주하는 그래도 믿지 못했다.

“그렇게 의심하지 마. 너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나를 살려준 건 사실이니까.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선행을 하듯 나도 할 뿐이야. 왜, 사람은 도와주며 살아가는 거라고 했잖아.”

연화의 말은 정론이었다. 만약 도와주어도 보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너무 각박해진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주하도 그 사실을 아는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연화를 흘겨보며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안색이 평온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모습을 보며 효심이 갸륵하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연화는 돌아갔다. 가난한 집에서 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먹는 것만큼은 도와주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 연화가 찾아올 때마다 주하는 경계했다. 연화가 한가득 품에 안고 오는 식량을 볼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연화는 주하가 보는 앞에서 직접 요리했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이상한 걸 섞지 않았다는 걸 확인 받고 나서야 주하의 아버지에게 먹일 수 있었다. 복잡하네. 어째 과거의 자신 같았다. 연화는 식사와 청소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적적한 홀아비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건… 뭐, 주하도 봐주리라.

“주하가 이렇게 좋은 친구를 두었다는 게 믿기질 않네….”

“친구는 아닌데요. 그냥 도와주는 거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을 뿐이죠.”

“콜록, 그래도 모른 척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미 그것만으로 자네가 좋은 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닌가?”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곧 때가 온다는 걸 직감했다. 아, 이제 갈 때구나. 노인은 점차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홀로 남겨질 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팠다.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노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옅은 호흡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들 얼굴은 보고 가셔야지. 연화는 노인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길 빌었다. 주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네 아비는 이제 세상에 있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버럭 화를 내지 않을까. 온기를 잃어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주하는 마지막 피붙이를 어떻게 보내줄 건지 어림짐작해보았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았다.

연화의 추측대로 주하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벌컥 울기 시작했다. 슬픔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랐다. 연화에게 있어 노인은 생판 남일 뿐이다. 하지만 주하에게 있어선 유일무이한 피붙이였으니까, 아마 그 슬픔은 연화가 느끼는 것보다 깊겠지. 연화는 주하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주하는 훌쩍이며 연화를 보았다.

“고마워. …네가 없었더라면 아버지는 쓸쓸하게 가셨을 거야. 그리고 이젠 안 와도 돼.”

“딱히 네 아버지를 위해 온 건 아닌데도?”

“더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네 도움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주하의 내면에서 샛노란 불꽃이 엿보였다. 연화는 그가 몹시 울적하다는 걸 알았다. 확실히 이제 은혜 갚기라는 명목으로 찾아올 수 없겠네. 연화는 만약 주하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괴물이라고 욕할까? 다른 사람들처럼? 주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낡은 옷가지 몇 벌만 챙기는 모습에 연화가 물었다.

“뭐 하는데?”

“…이젠 아버지도 없으니까, 여기서 살 이유는 없잖아. 마지막으로 양지바른 곳에 묻으면 그대로 떠날려고. 더 이상 그 집에서 비굴하게 일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럼 나랑 사는 건 어때?”

“됐어. 나랑 같이 지내봤자 네 소문만 안 좋아져. 지금까지 도와준 건 고마웠지만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이러니까 홀아비를 두고도 정성껏 돌볼 수 있었던 거지. 연화는 안타깝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라…. 확실히 주하 입장에서 자신은 부담스러울 존재일 거다. 딱 한 번의 호의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기묘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연화는 우선 주하를 보내주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를 지켜볼 수단은 여러 가지 있다. 그의 눈에 띄지 않으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주하가 멀리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혼을 나타내는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로웠다. 연화는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안타깝게 여겼다. 저런 사람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주하를 보고 있으면 연화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죽지 않는다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일단 생김새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배척해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연화는 그 사실이 무척 좋았다. 마치 세상이 연화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도 있으니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그런 무언가. 연화는 신을 믿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늘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향해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고, 종종 연화의 부모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연화는 거짓부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신이 아니라면 자신이 죽지 않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그로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더 이상 마을은 활기차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역병에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갔다. 연화도 역병을 피할 수 없었다. 몸이 타오를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빨리 나을 방법을 찾았다. 병을 너무 오래 달고 있었다. 마을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가더니 이내 생존자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는 생존자들은 모두 마을을 버리고 먼 곳으로 향했다. 연화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어느 정도 병세가 나아졌을 때, 이제 다른 마을에 가도 무난하게 섞일 수 있을 때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병을 달고 있으면 섞이기 어려우니까.

살 만한 마을을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병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퍼진 모양이다. 연화는 끝내 다른 나라로 향했다. 끊임없이 걷고 걸었다. 국경을 넘고 점차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적어졌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복식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여기가 적당하려나.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건 몹시 고된 일이었다. 아무리 배웠다고 쓰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거기다 언어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연화는 여기에서 쓸 이름을 고민해보았다. 확실히 주하와 있을 때 평범한 이름이 있어서 편했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칭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름이 없으면 없는 대로 수상한 취급을 받았다.

연화는 일단 이름 말고도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비교적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다. 예전에 살았던 어느 마을처럼 활기가 넘쳤다. 저 멀리 뱃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 근처는 바다를 통해 외부인이 자주 드나드는 곳 같았다. 낯선 타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보아 치안도 좋은 듯했다. 새 출발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여관이라고 했나? 임시로 머물 거처를 찾았다. 금붙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 수중에 돈이 없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일자리를 구했다. 다행히 돈을 많이 주진 않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연화는 재빠르게 일하는 법을 터득했다. 외국인이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며 주인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연화는 미리 생각해둔 변명을 내뱉으며 어물쩡 넘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가게를 오갔다. 모두 처음에는 연화를 신기하게 보았다. 확실히 이 근처에서 볼 수 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으니까. 걸친 옷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품이 넉넉했다. 연화는 예전에 익혔던 미소를 지어가며 능숙하게 접대했다. 긴 세월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주하를 계기로 연화는 보다 연기를 잘하게 됐다. 나름대로의 지혜를 터득한 셈이다. 살갑고, 친절하게. 그러나 좋지 못한 낌새를 보이면 곧장 도주. 모두 이렇게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상하게 허무했다. 고작 거리감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괴롭게 살았다니. 과거의 자신이 바보 같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치 이전에 보았던, 눈에 익은 샛노란 불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화는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다소 개구쟁이로 보이는 소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소녀는 가판대에 쌓아둔 사과의 품질을 꼼꼼하게 살피고 가격을 물었다. 연화가 어리버리하게 있으니까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벙어리라고 들은 적이 없는데. 이 사과가 얼마야?”

“아… 그게….”

연화는 가판대 사이에 꽂아 놓은 나무 판자를 가리켰다.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사과를 세 알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왔다. 소녀는 사과 세 알을 스스로 고른 후에 떠났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조차 익숙했다. ……너무 오랫동안 넋 놓고 있었다. 뒤늦게 온 손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 차렸다.

설마 여기서 주하를 보게 될 줄이야. 예전에 기억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샛노랗게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유독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그의 태도 또한 옛날과 비슷했다. 다시 태어날 수 있구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잊은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처음 알았다. 연화는 자신이 영혼의 불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극히 최근에 알았다. 그러니까 이전 생의 주하를 보았을 때가 처음이었다. 유독 제 눈길을 끄는 선명한 노란색은 흡사 그를 닮았다. 보고 있어도 편안함을 느끼는 색. 연화는 노란색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저, 여기에 이만한 소녀가 있었는데 누군지 아세요?”

“아? 아마 제임스 씨네 딸일 거야. 왜? 아는 사람이야?”

“아뇨… 예전에 본 사람이랑 닮은 게 신기해서요.”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혹여 상품에 기스가 나지 않았는지 살폈다. 연화는 제 눈길을 끄는 레몬을 보았다. 선명한 노란색이 마치 주하의 영혼을 닮았다. 그래, 여기도 노랗구나. 연화는 생각에 잠겼다. 주하와 제대로 말을 섞은 건 아니었다. 가게 점원과 손님. 딱 그 정도의 관계에서 내뱉을 법한 대화만 했을 뿐이다.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연화는 주하가 이 마을에서 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묘한 감각을 받았다. 종종 운명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손님이 생각났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영원하다고 했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랑 놀음에 푹 빠진 젊은이를 홀리려고 한 줄 알았다. 오랫동안 살면서 한 번도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설마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연화는 그 손님을 비웃었던 과거를 후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물어봤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랬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화의 비밀이 들통날 수 있다. 아직 세상은 연화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아, 아니다. 그냥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려나?’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부터 자신이 불사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헛된 인간은 많이 봤다.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게 한탕 해먹으려는 사기극이라는 걸 알았을 땐 무척 절망했다. 모두 영생을 살지 못하니까, 그 끝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끝나지 않는 인간을 태평하게 동경할 수 있겠지.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으니까.

아무렴 뭐 어때. 연화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더 이상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이 외로운 세상에 붙잡을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을 만났다. 언젠간 자신을 기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계속 일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연화는 히죽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가 그대로 가게 주인에게 혼났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다음에는 언제쯤 오려나. 한껏 신난 표정을 여전히 감추지 못한 채 웃었다.

그러나 소녀의 모습을 취한 주하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다음 날, 주하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범인은 자신의 가난함에 한탄하며 쉽게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도 그리 평판이 좋지 못했던 청년이다. 착실하게 살았다면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졌을 텐데. 강도는 미련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홧김에 세 명이나 죽였다고 한다. 그 죽은 이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주하가 포함됐다. 하루 만에 처참하게 무너진 희망을 보며 연화는 무어라고 말하지 못했다. 경찰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주하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조사했다. 범인은 금방 잡혔고, 끔찍한 죗값을 치른다고 했다.

어째서.

연화는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는데. 이렇게 또 주하와 대화할 수 있는 순간을 놓쳤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넋을 잃은 채 하염없이 앞을 보았다. 마침 근처에 산만하게 배가 부푼 임산부가 찾아왔다. 연화가 도저히 가게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깨닫자, 가게 주인은 안으로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다. 연화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더 좋다고 말했지만…. 가게 주인은 한숨을 팍팍 내뱉으며 연화가 좋을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연화는 가게 안쪽에서 바깥을 잠자코 보았다. 주하 불꽃을 본 이후로 종종 다른 사람의 것도 볼 수 있게 됐다. 그래, 자신을 걱정해주는 가게 주인은 정열의 붉은 색. 새콤한 과일 위주로 사며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것에 한탄하는 임산부는 주황색. 그리고 그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가는 샛노란색. 연화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뱃속에 있는 아기의 영혼이 노랗다니. 처음에는 비슷한 성질의 영혼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미묘하게 차이 나는 노란색은 많으니까. 하지만 제 눈길을 끌 정도로 화려하고도 선명한 노란색은 오직 주하뿐이었다.

주하일까? 저 뱃속에 새로운 생명체로 자라고 있는 게? 만약 그렇다면 신은 아직 연화를 버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그는 재빠르게 기운 차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지난 세월 동안 축적한 교훈이었다. 연화는 조금 쉬었더니 괜찮다는 말과 함께 임산부에게 말을 걸었다. 약 두 달 뒤에 태어날 거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기뻤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연화에게 그리 길지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축하한다고 찾아가야지. 그리고 정말 주하의 불꽃인지 확인해야지. 만약 주하의 영원히 새로운 육체를 찾은 거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두 달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임산부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그 사이에 연화는 그의 가족들과 친해졌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를 보았을 때, 뱃속에 있을 때보다 불꽃이 훨씬 더 잘 보였다. 선명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아기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아기의 불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주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했다. 연화는 어떻게 해야 세상을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지 깨달았다.

아기는 빠른 속도로 자랐다. 누워서 우는 것밖에 못 하던 아이가 점점 뛰어다니고 유창하게 말했다. 연화가 여전히 동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신기하게 보는 주변인들만 아니라면, 나름 만족한 삶이었다. 주하와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게 안타까웠다. 네가 태어나는 걸 보았음에도 끝까지 있을 수 없구나. 연화는 슬슬 이 마을에서 떠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 잘못했다가 마녀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자신의 폐를 쑤시고, 전신이 타오르는 감각은 돌이켜봐도 싫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주하를 만날 수 있을까.’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사는 곳은 나쁘지 않았지만 슬슬 연화를 향한 손가락질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두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적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주섬주섬 모은 돈이나 선물 등을 짐 꾸러미에 넣었다.

예상외로 인간은 일찍 죽는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두 번째 만났을 때 예기치 못한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곧바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자신은 영영 미쳐버렸을 거다. 어느 쪽이 좋으려나. 어디에 가야 주하가 태어날 곳을 알 수 있을까. 그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기왕이면 주하가 오래 살아야 하니 평화로운 곳이 좋겠지만, 요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 전쟁터에는 가고 싶지 않은데… 지금 이럴 때에 평화로운 곳이 있으려나.’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오른쪽이 좋으려나, 왼쪽이 좋으려나. 따로 지도를 보고 가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지도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설령 있더라도 모두 군사 기밀에 속하는 정보였다. 기억에 의존하여 간다고 해도 그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을 거다. 하아…. 이래서 가게 주인이 툭하면 한숨 쉬고 그랬나. 나이를 먹을수록 제게 영향을 준 사람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많은 곳을 오갔다. 최대한 평화로운 곳을 찾아보았으나 세상은 너무 어지러웠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적었다면 훨씬 살기 좋았을 텐데. 미래에 주하가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알 수 있다면…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매번 모래밭에 바늘 찾듯이 돌아다니지 않았을 텐데. 갑작스럽게 영혼의 불꽃을 보듯, 자신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예지 능력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만약 생기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무한한 시간이 연화의 편을 들어줄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연화는 많은 지혜를 터득했다. 어떻게 해야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 깨달았다. 많은 문명과 함께 편리한 도구가 나왔다. 어떤 나라에서는 태어날 때 반드시 호적 신고를 해야 했다. 연화는 번거로운 걸 만들었다며 투덜거리면서 부모 없는 고아로 위장했다. 오랫동안 써 온 육체는 슬슬 연화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었다. 적당히 어린 아기로 위장한 후에 고아원에서 거둬지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보호자가 나타나면 그 밑에 자라면서 성장하는 척 했다. 하지만 주하처럼 연화의 정신을 강렬하게 옭아매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21세기 대한민국. 연화는 빼곡하게 차오른 아파트 단지를 보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서자마자 옆집 문이 열렸다.

“야, 김주하! 너 그러다가 지각한다면서 빨리 안 가?”

“하… 저 녀석 성질은 날이 갈수록 더러워지네. 에휴, 알았어, 김주희! 그렇게 소리치지 마!”

짧게 친 앞머리와 함께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김주하. 이번 생에서는 그 이름을 받았구나.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주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 하연화. 너 진짜 내가 나설 때마다 만나네.”

“지금 나오지 않으면 지각하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튼 가자.”

익숙하다는 듯 가방을 고쳐 매고 앞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10층을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 연화는 주하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애가 탔다. 비슷한 또래로 육체 나이를 설정했음에도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탄했다. 내년에는 같은 반이 될 수 있으려나. 무엇이 그리 망설이게 되는 걸까. 이러다가 이번 생에서도 허무한 계기로 주하와 이별하지 않을까. 그건 생각만 해도 싫었다.

“주하야.”

“어?”

“…우리 함께지?”

“넌 무슨 아침부터 그런 소리를 해? 당연히 함께지.”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주하의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 번의 생을 거듭해도 주하는 툭하면 인상을 찌푸리곤 그랬다. 아예 영혼에 새겨진 버릇인 걸까? 연화는 주하가 말하는 함께의 의미와 자신의 의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하긴, 뭐 그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었으니까. 연화는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베시시 웃더니, 이내 주하와 팔짱을 끼었다.

“고마워.”

지금까지 내 곁에 나타나줘서. 그리고 내 희망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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