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15

Fate 시리즈 - 길가메쉬

완전하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될 줄이야.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토해내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왕의 재보는 꺼낼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제 것을 꺼내지 못하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제 몸은 불완전했다. 거동에 제약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기억 또한 신체처럼 불완전한 요소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어느 동양에서 일어난 성배 전쟁이다. 거기서 길가메쉬는 ‘아처’ 클래스로 현현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길가메쉬는 제 기억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길가메쉬의 기억을 지운 것마냥 성배전쟁의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처 클래스, 그 다음엔? 어떤 일이 있었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제게 간섭하는 무언가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이 세상 따위 없어진다. 성배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에아를 꺼내지 않았다. 평화로운 세상, 성배 전쟁에서 있었던 잔혹한 일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듯한 깨끗한 세상. 굳이 이런 세상을 없애버릴 정도로 길가메쉬는 자비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길가메쉬는 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생각해 보았다. 문득 제 시야 근처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 구불거리며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 보랏빛 눈동자와 왼쪽 눈 밑의 점. 어쩐지 익숙한 소녀였다. 소녀는 길가메쉬를 그대로 지나쳤다. 한순간이나마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곧장 시선을 돌렸다. 길가메쉬의 시선이 소녀로 향했다.

소녀를 보자마자 길가메쉬는 성배 전쟁에서 있었던 일이 한 가지 떠올랐다. 분명 영주를 든 채, 힘들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한 여성이 떠올랐다. 꼭 눈앞에 있는 소녀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였다. 아아, 그렇구나. 어렴풋이 막혔던 기억이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길가메쉬는 곧장 제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챘다.

“네 녀석의 이름은 뭐지?”

“……네?”

“이름. 이 내가 친히 네 녀석의 이름을 묻는 데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냐.”

소녀는 어쩐지 껄끄러운 시선으로 길가메쉬를 보았다. 길가메쉬는 소녀의 눈에 어렴풋이 드러난 감정을 읽어냈다. 두려움, 당혹.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소녀의 안에 있다. 길가메쉬는 소녀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재촉했다.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제 이름을 입에 담았다.

“류리, 예요.”

*

이상한 사람.

류리는 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조금 전부터 길 한복판에서 웃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는 필시 정상이 아닐 터. 이상한 사람에게 잡혔다는 생각에 류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대뜸 류리의 이름을 물었다.

남자의 말투는 다소 독특했다. 고풍스럽다고 해야 하나. 마치 한 나라의 지배자가 쓸 법한 말투처럼 느껴졌다. 류리는 제 이름을 말하면서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한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도 남자와 닮은 사내를 만난 적이 없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분명 기억할 텐데, 도저히 잊을 수 없을 텐데. 이상했다.

정신 차리니 류리는 어느새 남자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서툴게나마 마술을 배우던 나날에서 한 가지 일과가 추가됐다. 류리는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와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졌다. 남자는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슬쩍 물어보아도 아직 알아서 안 된다고 말했다. 어째서? 류리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이름을 모르는 탓에 남자를 부를 때마다 버벅거리는 게 힘들었다. 결국 남자는 ‘아처’라는 호칭 하나를 허락해주었다.

아처라니. 가명인 걸까?

하지만 그 이상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의 태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따금 부드럽게 대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오만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은 무시하기 일쑤였으며 그럴 때마다 류리는 저도 모르게 위축됐다. 남자는 류리가 머뭇거릴 때마다 생각에 잠겼다.

“있죠, 아처는… 왜 저에게 말을 걸었던 거예요?”

보통 접점도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머뭇거린 탓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무척 궁금했지만, 류리는 대답을 못 들을 거라고 단정했다.

“네 녀석이랑 내가 아는 사람이 닮았다.”

“닮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나요.”

“우매한 놈.”

호통 한 번에 류리가 뒤로 물러났다. 아직 성인 남성의 호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깃든 거 같았다. 류리는 제가 잘못 물어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구나. 남자는 이내 몸을 틀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오늘은 할 만큼 말했으니, 내일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오도록.”

그렇게 일방적 통보를 한 채 남자는 떠났다. 류리는 어쩐지 남자와 만났던 순간이 덧없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사람, 그렇지만 어딘가 익숙한. 류리는 제 기시감을 생각해 보았다가 그만두었다. 내일 이 시간에 보자고 했지만, 이상한 사람이랑 더 이상 엮이기 싫었다. 그래, 안 나오면 되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한 류리는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남자를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졌다.

‘아냐, 내가 무슨 생각을.’

오늘 처음 본 남자다.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오직 아처라는 호칭만 허락했다. 그런 사람이랑 엮여서 좋을 꼴을 못 본다는 건 알았지만. 류리는 계속해서 남자와 만나고 싶었다. 이따금 부드러운 표정이 저를 향할 때마다 조금씩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주 예전에, 오래전에 이런 적이 있었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류리를 자극했다.

결국 류리는 다음 날 남자를 만나러 갔다.

*

완전하지 않았던 기억이 점차 돌아오고 있다. 길가메쉬는 어째서 류리를 볼 때마다 기억이 되돌아오는지 알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배 전쟁에 참여한 다른 마스터나 서번트를 찾아보았다. 오류투성이 세상에 설마 저 하나만 떨어졌을 리 없다. 그렇지만 길가메쉬는 다른 마스터와 서번트를 찾아내지 못했다. 오직 이 세상에는 류리, 그리고 자신만이 존재했다. 그 외에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길가메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이 세상 통째로 베어내면 그만이다. 어쩌다 저가 이 세상에 존재했는가, 그것 또한 기억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감히 왕을, 이 자신을. 길가메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맑은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하늘에는 드문드문 검은 실선이 있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하늘에 금이 갔다. 불완전한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 길가메쉬는 그렇게 추측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가짜 류리를 만나는 날 또한 오늘이 끝이리라. 홀가분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길가메쉬는 류리가 자신을 많이 바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무엇을 해도 충족되지 않았던 마음이 류리에게……. 아니, 길가메쉬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낱 마스터일 뿐이다. 제 물건을 멋대로 탐내기 위해 자신을 소환했던 이. 길가메쉬는 스스로가 바뀌었다는 걸 받아들였다.

“아처, 무슨 생각 해요?”

생각에 잠긴 탓에 길가메쉬는 류리의 기척을 뒤늦게 깨달았다. 류리는 살금살금 다가오면서 길가메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제 표정이 험악했던 걸까. 눈치 보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이전에 그랬듯 류리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가볍게 튕겼을 뿐인데 류리는 무게중심을 잃어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생리적인 눈물 또한 흘렸다.

“이, 이번에는 무슨 일로 한 거예요.”

“별일 아니다.”

가벼운 변덕이었을 뿐이다. 한두 마디 말을 섞었을 뿐인데 기억 한 조각이 돌아왔다. 동시에 하늘에 금이 갔다. 이번 기억을 꽤 중요한 내용인 듯, 금이 제법 범위가 넓었다. 성배전쟁의 막바지,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게 됐는가. 기억을 되찾은 길가메쉬는 미간을 꾹꾹 눌렸다. 저가 여기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때가 됐다.

길가메쉬는 이 세상을 벗어날 준비를 했다. 문자 그대로 세상을 도려낼 수 있는 괴리검 에아를 꺼냈다. 강한 바람이 길가메쉬의 오른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에 류리는 뒤로 물러났다. 에아를, 그리고 길가메쉬를 보았다. 작별 정도는 해주는 게 좋겠지. 길가메쉬는 아직 에아를 가동하지 않은 채 류리에게 말했다.

“작별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곳으로 떠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지. 소중한 녀석,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겠지만.”

류리는 한낱 마스터일 뿐이다. 자신이 성배를 손에 넣기 쉽도록 움직이는 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길가메쉬는 이 오류투성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마술이 서툴고, 주변에 잘 휘둘리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나아가는 그 모습에 꽤 흥미로웠다.

그러나 여기에 존재하는 류리는 그러지 않았다. 움츠리고, 용기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 얼핏 보았을 때 진짜와 흡사했다. 외형적인 요소는 물론이며 성격이나 호불호 등이 비슷했다. 그렇지만 진짜는 아니다. 길가메쉬는 가짜 류리를 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는 진짜가 아니다, 제가 보고 느꼈던 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아마 영영 못 만날 수 있겠지.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조금 더 이 몸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거센 바람이 불었다. 류리는 대답 한 번 하지 못한 채 길가메쉬를 보았다. 조금씩 형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진흙이 됐다. 이게 가짜의 정체인가. 길가메쉬는 작게 웃으며 그대로 세상을 도려냈다.

*

현실의 시간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류리가 있다. 류리는 의아하다는 듯 길가메쉬를 보았다. 저가 없었던 그 짧은 시간에 특별한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길가메쉬는 류리를 보며 조금이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가짜보단 진짜가 낫군.”

“네?”

갑자기 진짜가 낫다니. 류리는 길가메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이리저리 생각했지만, 그럴듯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류리는 입을 열었다가 곧장 다물었다. 아마 무엇을 말해도 길가메쉬는 들어주지 않겠지. 류리의 표정에는 언뜻 그런 의미가 담긴 거 같았다. 휙휙 바뀌는 표정에 길가메쉬는 살짝이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잘 돌아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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