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16

1차

빈말로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다.

모든 게 뒤틀리고 어긋났다. 정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인간다운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그를 볼 때마다 레슬리는 작은 거부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를, 나자 로도미사를 밀어내고 있다. 거만하다 못해 모든 걸 제 밑으로 두는 말투도, 행동도. 그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슬리는 제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얼추 하고 있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언제든 끊어낼 수 있다. 얇은 실보다 못한 관계였다. 만약 레슬리가 작정하고 나자를 밀어낸다면, 그렇다면 그는 가만히 있겠지.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은 눈으로 레슬리를 훑어보았다가 그대로 가겠지. 레슬리는 되려 그쪽을 원했다. 나자와 얽히면서 좋은 꼴은 못 보았다. 제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최저한의 호감만 남아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나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레슬리는 잠깐이나마 고민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떠난다면 한결 편안해지지 않을까? 나자는 레슬리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흘겨볼 뿐이다. 그깟 정이 뭐라고. 레슬리는 과거 자신의 미련함에 한탄했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푸른 하늘이 두 눈에 한가득 새겨졌다. 아, 오늘도 맑구나. 딱 그 정도의 감상만이 남았다. 새삼 새롭지도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주변을 감싸는 적막에 외롭다고 투정 부릴 정도로 그는 어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에 있었군요.”

저벅거리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그를 보며 레슬리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인간이라면 으레 당연하게 나타나는 반응이다. 나자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레슬리를 보았다. 반쯤 내리깐 눈을 비롯해 표정, 행동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 나자와 지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적어도 몇 년. ……그래, 이제 십여 년 정도 되었다. 그렇게 오래 되었나? 매번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점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레슬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나자는 즐겁다는 듯이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입꼬리가 올라가지만, 결코 웃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레슬리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느낌에 가까웠다. 참 당당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비웃어도 되나. 레슬리는 제가 불쾌하다는 걸 몇 번이고 드러냈다. 그렇게 사람을 깔보지 말라고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자는 자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냐며 의문을 드러냈다.

이대로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갈 수 있다. 나자와 레슬리가 사는 섬은 꽤 넓었다. 아직 미처 가보지 못한 곳도 존재했다. 작정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일주일 이상은 갈 수 있다. 섬에 사람이 두 명밖에 없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나자가 순순히 저를 피하는 레슬리를 그대로 내버려둘지 의문이었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또, 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레슬리가 뒤로 물러났음에도 나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 정도 거리가 딱 좋다는 듯 레슬리를 보았다. 얼핏 제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왜 찾아온 걸까? 레슬리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나자는 레슬리의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았다. 더 가중시켰지.

레슬리가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지루한 정적이 두 사람을 헤집고 지나갔다. 나자는 레슬리가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는 듯 살짝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아. 눈이 마주쳤다. 그 어떤 색조차 섞이지 않은 오롯한 흰색이.

몇 번이고 거듭 생각했다. 나자도, 레슬리도 기본 바탕은 인간이다. 단지 조금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을 뿐이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나자의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채 그대로 가버렸다. 나자는 능숙하게 제 머리를 다듬었다.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물지 않아요? 평소라면 가볍게 훑고 지나갈 바람이 이렇게 제 머리를 헤집고 가는 게.”

계절감이 모호한 이곳에서 이상하게 강한 바람은 불지 않았다. 굳이 불더라도 잔잔한 쪽에 가까웠다. 예전 같았더라면 나자는 제 머리를 만져줄 사람을 찾아 시켰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만난 지 십여 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레슬리는 나자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자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할 말은 딱히 없어 보이는데, 그냥 가버리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매번 그런 생각 하며 말했다가 나자의 페이스에 휘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이번만큼은 휘둘리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다.

“오늘은 침묵으로 일관하실 작정이라면, 뭐, 말리지 않겠어요. 가끔은 그런 날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나자는 레슬리가 의도적으로 침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으나 싫으나 십여 년을 함께했다. 나자 또한 레슬리의 행동을 쉬이 추측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도를 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했는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점을 제외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없었다.

“……그만 가.”

“이제 말해주는 건가요? 언제까지 입을 다물지 궁금했었는데.”

“어차피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왔는데.”

“꼭 할 말이 있어야만 얼굴을 마주할 수 있나요? 예전에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으면서, 이제 내가 싫다며 온갖 이유를 들다니….”

나자는 일부로 뒷말을 끊었다. 점점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할 수 있겠지만, 레슬리는 아니었다. 십여 년간 나자와 함께 지내며 어렴풋이 그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다. 온전히 생각을 읽어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저를 갖고 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으니까. 레슬리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저를 갖고 노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자가 레슬리를 찾아오는 경우는 몇 없었다. 특히 좋은 일 쪽으로는.

“됐어. 어차피 나 놀리거나 그럴 거면 그냥 가.”

“그렇게 마냥 나쁜 제안을 하려고 온 건 아닌데요. 만약,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주었더라면 어떻게 할지 궁금했거든요.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이 섬 바깥을 떠돌 수 있잖아요. 그래서 뭐, 내가 싫다며 투덜거리면서 지냈을 테고.”

“마지막 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레슬리는 제 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회? 혹시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말하는 건가? 레슬리가 사는 섬은 어떻게 보면 무척 자유로웠다. 들어오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레슬리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레슬리의 의심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자가 이런 주제를 가져오다니. 그답지 않았다. 여태껏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었는데.

혼란스러웠다. 마지막 기회라니. 이제 더 이상 섬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는 건가? 나자도, 레슬리도 섬에서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이었다. 같이 사는 상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편의시설은 대부분 있었다. 대신 일해주는 로봇도 있으니 두 사람은 마음껏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됐다. 상당히 태평한 삶이었다. 레슬리는 섬 너머의 세상을 떠올렸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의학이나 약이라면 끌리겠지만, 그건 이 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책이나 자라지 못한 약초가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 섬을 떠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자는 이상했다. 나자는 굳이 이 섬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애초에 나자는 여기서 나간다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당연하다는 듯 여기에 남았다. 그게 기본 전제였다. 언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나가면 무엇을 할 거냐고. 그 말에 나자가 곤란하다는 듯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었다. 대답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나자가 섬에 남는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레슬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섬을 나갔을 거다. 그저 홀로 남겨질 나자가 걱정되었다. 새삼 알고 지낸 세월이 무섭게 느껴졌다. 매번 제 속만 벅벅 긁어놓는 놈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흔쾌히 풀어줄 법한 말을 기다렸다. 만약 마지막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때가 언제냐고. 정말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냐고. 그렇다면.

너는.

나자 로도미사,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자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입가를 가렸던 손이 서서히 내려온 것 외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무덤덤한 눈은 천천히 레슬리를 훑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 하느라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랍니다. 다들 만약의 이야기라고 이름 붙여 말하잖아요? 나도 그랬을 뿐이에요. 제게 늘상 주어졌던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불안은 인간들이 곧잘 생각하잖아요?”

“그런, 이야기였어?”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가차 없이 레슬리를 비웃었다. 어리석은 인간. 정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생각했나요?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레슬리는 알 수 없는 압박감과 함께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레슬리가 여기서 나가지 않는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 짐 몇 개만 대충 챙겨다가 그대로 휙 등을 돌리면 그만이리라. 항상 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레슬리의 머릿속에 작은 파문이 일렁거렸다. 레슬리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나자를 보았다. 나자는 여전히 여유롭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다.

“넌? 내가 나가면 너는 그 뒤로 어쩔건데.”

“이상하네요. 내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매번 투정 부린 건 레슬리, 당신이 아니었나요? 이제야 새삼스러운 질문하다니.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가슴이 철렁했나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질문에나 대답해.”

레슬리가 다소 강하게 나갔다. 나자는 그제야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흐음, 어쩌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별히 생각한 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레슬리는 깨달았다. 마지막 기회는 단순히 저를 놀리려고 가져왔다는 화제임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퍽 다가왔다.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겠죠.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나자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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