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17

나루토 - 나루토

아름다운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노을이 복도 내부를 비추고 있다. 짙은 그림자와 함께 주황빛으로 물든 복도를 보고 있자니 낮의 풍경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낮에 보았던 모습이 이토록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을 때 선명한 푸른빛의 복도와 현재의 주황빛 복도는 확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시간대가 다를 뿐인데, 있는 사람의 수가 차이가 날 뿐인데. 하나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노을 특유의 빛을 받으며 낮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복도만이 아니었다. 교정 내에 드문드문 심어진 벚나무도 속했다. 화려하게 핀 벚꽃은 4월 중반으로 접어들며 저물기 시작했다. 봄의 시작을 알렸던 꽃의 최후는 의외로 비참했다. 꽃으로 아름답게 대우를 받는 건 오직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누구나 웃는 얼굴로 봄이 왔다며 좋아했었는데. 막상 저무니 모두 거치적거리는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다. 하나는 손바닥 뒤집듯 돌변한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벚꽃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텐데.

만약 자신이 벚꽃이라면 어떻게 있었을까. 하나는 의미 없을 망상을 조심스럽게 해보았다. 손끝으로 유리창을 가벼이 쓸었다. 조심스럽게 깨지지 않도록 창문에 기대며 숨을 토해냈다. 벚꽃이 되면 영원히 저물지 않고 피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자신을 잊을 수 없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는 작게 웃었다. 슬슬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안 좋은 일은 잊어버려도 좋을 텐데. 매년 봄이 될 때마다 벚꽃을 보고 울적해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창문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희미하게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까마귀가 동료를 향해 울부짖는 소리는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걸음 소리.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처럼 하교하지 않은 학생이 있었나? 아니면, 선생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걸음은 점차 하나를 향해 다가왔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이내 순식간에 등 뒤에서 두 팔이 하나를 감쌌다. 따뜻한 체온과 묵직한 체중의 주인은 익숙한 목소리로 하나를 맞이했다. 이걸 맞이했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있었어?”

“……나루토.”

우즈마키 나루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제 쌍둥이 오빠.

오빠라고 주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루토 혼자였다. 하나는 이상하게 저를 향해 오빠 행세하는 나루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슷하게 생겼으나, 두 사람은 자세히 살펴보면 닮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란성 쌍둥이여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루토와 하나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었다. 하나는 나루토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입양됐다. 아니. 분명 가족이 된 첫날에 알려준 거 같은데. 이상하게 나루토는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하나를 제 친동생이라고 굳게 믿었다. 부모님은 나루토의 행동에 난처히 반응하면서도, 하나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나는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에 기죽지 않았다. 서로 사소한 일로 다툴 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했다. 이런저런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으며 가족이 되어갔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환히 웃을 일이 많아졌을 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 때 일이었다.

하나는 돌연 제가 나루토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흔히 그렇듯 자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루토가 곁에 있는 건 하나에게 있어서 당연하면서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나루토는 유달리 하나와 자주 놀았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면서. 같이 어울리고 놀다가도 하나가 보이면 쪼르르 달려왔다. 그랬기에 하나는 자연스럽게 나루토가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게 비정상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누구였더라. 고작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여자애들의 수군거림에서 비롯되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들은 곧잘 하나를 볼 때마다 작게 속삭였다. 오직 저들끼리만 아는 단어로, 말로 하나를 비방했다. 물론 가만히 당하고 있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는 하나대로 그 여자애들을 향해 복수했다. 여자애들은 그 뒤로 하나를 건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하나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는 나루토를 가족이 아니라 제 또래의 친구로 여기게 됐다. 가족이지만, 타인인. 그런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존재로 인식했다.

조금씩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떨어질 때마다 하나는 위화감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루토는 언제나 그렇듯 하나에게 웃으며 말을 건다. 하나는 겉으로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는 가슴을 움켜쥔다. 그렇게 위화감을 몇 번 느꼈을까. 어느새 하나는 나루토를 가족이라고, 오빠라고 여기지 않았다. 완벽하게 이성으로서 좋아하게 됐다는 소리다.

정말이지 우스웠다.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친밀하게 지내면 좋아하게 되는 일은 드물지 않은가. 하나는 언제부터 나루토를 좋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 차리니 나루토를 좋아했고, 이성으로 여겼다. 다행히 나루토를 이성으로 여길 때부터는 두 사람 다 사춘기에 들어설 나이였다. 하나가 조금씩 나루토를 피하고 있어도 아무 의심 사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나루토에게도.

한때는 제 마음을 들키게 되면 어찌 될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나루토여도 이런 자신을 꺼리게 되지 않을까. 심한 말은 하지 않겠지만, 어릴 때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태도가 싹 사라지지 않을까. 하나는 그게 가장 무서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좋아하는 상대에게 미움받거나, 혹은 싫다는 말을 듣거나. 짝사랑이 반드시 이어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 짝사랑이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채 시드는 건.

그래서 필사적으로 제 마음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가족이라는 틀을 부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이 제대로 먹힌 걸까. 나루토와 부모님은 여전히 하나를 가족처럼 여겼다. 하나는 오직 저에게 보이는 줄다리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슬한 줄다리기는 의외로 아무 탈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작년에 있었던 나루토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았더라면.

*

언제였더라.

아마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 때 일이었다. 당시 나루토는 입학 희망했던 학교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붙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나루토 성적 올리기 부대는 모두 축하의 의미로 놀기로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놀자고 제안한 건 나루토였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놀 수 있으랴. 모두 한껏 고생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나루토의 의견에 찬성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핀잔도 덧붙이며.

모아놓은 용돈으로 노래방이나 게임센터. 아니면… 조금 먼 동네에 있는 곳에도 다녀온 적도 있었다. 확실한 건 점차 놀거리가 줄어들었다. 내일은 뭐 할까. 그런 사사로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화창했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다. 겨울이었기에 해가 지는 속도는 다른 때보다 빠른 편이었다. 해가 지는 걸 보며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내일을 기약했다. 아이들은 두 방향으로 나누어졌다. 사스케와 사쿠라, 그리고 나루토와 하나. 나루토는 저 멀리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조금 손을 오래 흔든다고 생각했을까. 하나는 슬쩍 나루토를 보았다.

저녁노을 탓인가. 아니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쓸쓸했던 탓인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하나가 보았던 나루토의 얼굴은 확실히 낯설었다. 멀어지는 친구를 향해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도, 솔직히 말하자면 확실하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해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평생, 이렇게 지내면 좋겠는데 말야.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던가. 하나는 말속에 숨겨진 뜻을 알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사스케와 사쿠라를 만나고, 그제야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나루토는 또래와 비교했을 때 예뻤던 사쿠라를 좋아했고, 무엇이든 뛰어났던 사스케를 질투했다. 사스케 또한 나루토를 어느 정도 의식했다. 사쿠라는 그런 나루토를 바보라면서도 점차 그 둘의 작은 티격태격에 익숙해졌다. 하나 또한 마찬가지로. 네 명은 하나의 무리를 형성했고, 어느새 일상에 녹아 들었다.

나루토도 하나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친구가 많이 없었다. 한때 친했던 아이들은 몇 존재했지만, 사스케와 사쿠라처럼 몇 년이나 친하게 지낸 친구는 드물었다. 그랬기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친구 관계에 집착했다. 집착했었다. 나루토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하나는 조금씩 친구에서 멀어졌다. 친구에서 좋아하는 상대로. 분명 같은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왜 이리 다른 관점이 되었으려나. 하나는 나루토의 사소한 행동에, 조그마한 중얼거림도 놓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루토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상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기도 했고.

사실 애써 하나가 그 말에 숨겨진 뜻을 부정하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무심결에 나루토에게 직접 물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서. 나루토는 하나를 보았다가 제 코 아래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이렇게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날, 이라고 했던가. 나루토는 다소 어설픈 설명까지 곁들였다. 필사적으로 자신이 느낀 생각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하나는 그 설명을 모두 듣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겉으로나마 태연히 있을 수 있던 건 아마 나루토의 환히 웃는 얼굴 때문이었지. 그토록 환히 웃는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하나는 필사적으로 웃었다. 나루토를 향해 사쿠라가 그랬듯이 바보 같다며 핀잔하고 몸을 틀었다.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나는 자신이 나루토를 볼 때마다, 그를 좋아한다고 자각할 때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아니어도 좋아. 차라리 타인이었다면, 자신도 편히 좋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쿠라가 사스케에게 연심을 드러내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하나는 부러웠다. 진심으로. 자신은 할 수 없는데, 고작 타인이라는 이유로 간단히 할 수 있다는 게. 따지고 보면 자신도 나루토와는 남이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끼리 친했고, 그래서 하나의 친부모가 세상에서 떠나버렸을 때 거둬졌다는 걸 제외하면. 남이나 다름없었는데.

애꿎은 원망을 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하나는 체념을 배웠다. 구체적으로 나루토가 말했던 그 한마디에 영향받은 것도 있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원망해도 자신과 나루토는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틀에 묶인 채로 살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편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뤄지지 않는 꿈은 잠시 접어두는 게 좋다. 하나는 체념하며 보다 현실을 볼 수 있었다. 나루토를 좋아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덜 아팠다. 다행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마 이 연심도 옅어지겠지. 하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하루를 충실히 보냈다.

나루토가 다른 여자애에게 고백받는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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