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우리의 만남은 헤어짐을 낳으니

베인밀레

푸른빛 약속 by 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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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x여밀레(드림주)

*스포일러 요소 : 마비노기 C7 - 아포칼립스 전반

크레페 킹정 님 (@LEROY_YI_GONGZUU)  커미션 작입니다.


후회라는 말은 그답지 않다. 왜냐하면 어딘가 끈적하고도 거뭇거뭇한 느낌의 그 단어는, 폐부를 날카롭게 뚫는 창보다도 입을 오염시키는 독과 더욱 흡사해 오랜 시간 동안 '차마 해석하지 못할 찝찝함'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단어는, 그래서 베임네크가 좋아하는 쪽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베인,이라 저를 불렀던 여자는 꽤 현명했었다. 이샤라는 이름의 여자, 첫 번째 영웅, 구원자. 그때의 그녀는 다정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그 다정이 그 선택을 낳았겠지, 다른 이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을. 그리고 '도피'라는 결말을 골랐을 것이다, 이샤는. 망각의 강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잊는 자에게 찾아오는 편안한 잠을, 짧게라도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런 살벌한 사이가 아니라 좀 더,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 꿈결같은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겠지.“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때 이샤는 또렷한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며, 쥐였던 무기를 바로 쥐었을 뿐이었다. 침묵이 곧 그녀의 답이었지만, 말보다 행동이 그의 애정을 표현한다 하지 않던가. 결국 그녀는 저 하나를 위해 기억을 송두리째 지우는 길을 택했다, 오로지 저에게 향했던 칼날의 끝 때문에! 그리고 역행한다, 이를 누군가는 퇴행이라 부르겠지만 역행했다. 그러한 애정의 무게는 꿀을 한 입 먹기라도 하듯 달면서 썼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곁에 이끌려 유달리 긴 그림자라도 되는 양 머무르는 자로 남기로 했다. 더 이상의 후회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샤, 아니, '카야'라 불리는 여인은 포니테일로 틀어올린 머리를 다시 고쳐 묶곤 그 유순한 낯으로 제게 웃었다. 손에 쥐고 있는 바알간 사과 한 알을 제게 건네고서. 받았어요, 한 입 드시겠어요? 그녀는 사과 조각에도, 하다 못해 구석이 조금 썩어 있는 듯한 사과 한 알에도 이리 쉽게 미소하는 이였다. 엊그제만 해도 아이가 밀레시안 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다고 말하며 안겨 왔을 때 그녀는 하루 종일 콧노래를 불렀었다. 사과의 썩은 곳을 칼로 도려내고 그는 사과를 한 조각 잘라, 큰 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전에 그녀가 호의로 내민 음식을 먹지 않아 해가 질 때까지 시무룩한 표정을 봤었다. 아삭, 사과를 베어 물자 카야는 활짝 미소했다. 그래, 그 낯이지.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았기에 조금 얼굴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여차하고. 

"맛은 어때요, 베인 씨?" 

"나쁘진 않다고 할 수 있는데 .... 식사는?" 

"식사는 조금 늦게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참, 베인 씨! 제 꿈에 베인 씨가 나왔어요." 

"그래서 뭐라 하던가?" 

"음, 이상하리만큼 아무 말도 없고 ... 혼자, 공연히 쓸쓸해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 보는 저도 쓸쓸했던 것 같고 ..." 

그런가, 그렇군. 그녀가 따라 사과를 먹기 시작하며 잡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녀는 감상이 많았다, 정도 많았고. 꿈에 나온 사람이 혹여나 아프지 않을까 걱정된다 언젠가 말한 적도 있었고,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고 나서도 자신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나 되려 사과한 적도 있었다. 괜찮다, 그러니 그리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다, 달래었을 때도 그녀의 어깨가 떨려 왔었다. 그게 퍽 속상했다면 그 또한 저의 탓인가? 

그녀의 인생에 사랑은 없다, 애정은 있고 다정은 있으나 애모는 없다. 그리고 연모 또한 없다. 

그녀는 저를 아꼈던가?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한심한 반문이었다. 자신이 한 짓을 지울 정도로 아끼었다면 그것은 참 지독한 정이다.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가며 그녀는 말해왔다. 궁을 잘 쏘지 못하는데 혹여 궁술을 도와 줄 수 있겠는지, 혹여 자신에게 이곳에서 유행하는 곡조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궁술을 가르쳐 준 후 자신과 대결을 치뤄 줄 수 있는지, 상대가 되어줄 이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래, 그래, 그리 하지. 

상냥하셔라, 너무 좋아요, 그녀가 짝 소리 나게 손바닥을 맞부딫혔고 그는 답지 않게 고개를 멋쩍게 끄덕였다. 베인 씨, 베임네크, 베인 씨. 거짓된 이름으로 그 장단에 맞춰 주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는 존재했다, 무얼 하는 게지, 언젠가는 끝날 놀음이건만, 그럼에도 저리 웃지 않는가. 행복을 누리지 않는가, 해서 그는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정리해 주었다. 마치 무어라도 되는 듯, 언젠가는 그녀가 이 모든 추억을 원망하고 한하지 않을 것처럼. 가지고 놀지 않았다, 그저 함께 하고 싶었을 뿐, 빛나는 이의 곁에서 그 따스함을 누리고 싶었을 뿐. 

식사를 하기엔 시간이 꽤 이르니 책이나 몇 권 읽으면 어떠할까, 손가락을 뻗어 선반에 꽂힌 서적을 가리켜 보이자 그녀는 좋아요, 나쁘지 않아요, 말하며 키에 닿지도 않을 책을 향해 몸을 휘적였다. 얼마나 갈까, 이 평온은, 이 고요함은,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 마음이 부유하는 듯, 베인은 그녀를 대신해 책을 꺼내어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의자를 하나 빼어 앉고는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딱히 제 몫의 책을 찾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본 의자를 제 것으로 삼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표정을 분석하고 들었다. 

"왜 그러시나요?" 

"... 아무것도, 그저 읽는 내용이 궁금해서." 

"옆에 와서, 저랑 같이 보실래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서." 

그래, 그녀는 이전에도 그 책을 골랐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별스럽지 않은 당연할 정도의 행복한 이야기가 그려진 우화를. 용감한 자, 그리고 그의 친구였던 악인이 나왔던 이야기 속에서 용감한 자는 악인을 죽였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한 결말을 맞았던 것 같다. 용감한 자는 우두머리가 되어 잘 살았답니다, 그렇지만 그녀, 라는 용감한 자는 제 곁에 있다, 또한 그녀의 선택은 바뀌지 않으리라. 

카야, 이샤. ...이샤. 그대는 나아가야 한다. 그대가 빛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별이 있어야 한다. 그대가 알을 깨고 나와, 나 성장했노라 말하기 위해서는 이별이 있어야 한다, 그 어떠한 형태로든, 그 얼마나 고통스럽거든. 그렇지만 그 이별을 지금 굳이 생각해 일찌감치부터 괴로움을 느끼고 싶진 않으니, 베인은 턱을 괴고 앉아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에 달해 끝, 이라 경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식사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게 꼬르륵 소리가 났고 카야는 이런, 이런, 귀가 달아오른 채로 책을 탁자의 구석에 밀어 두었다. 

"식사는 무얼로 하겠는가?"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걸로요, 방금 간식도 먹었으니까요." 

어쩌면 이리 똑같이 말하나, 제 속을 빠안히 들여다 봐서 살살 긁어놓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베임네크, 아니, 베인은 그래, 그러지, 하는 긍정의 답 없이 몇 가지 식재료를 손에 쥐었다. 

그대와 만나고, 나는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한다, 매 순간.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헤어짐이 슬프지만은 않다, 더 이상의 만남이 없기만을 바랄 뿐. 헤어질 결심이야 매일 하다만, 이 다정이 날 흔들고, 붙잡는다. ...그래서 어쩌면 헤어지고 싶지 않을지도, 누구보다 빛나는 당신의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리면서도. 그러지, 오늘은 간단히 먹도록 하지, 그릇을 몇 개만 꺼내 주게, 어느덧 손발이 잘 맞기 시작해 할 필요 없는 말들을 입 밖으로 내면서 그는 작게 미소했다. 

그대여, 매일같이 웃기를. 그리고 너무 많이 울진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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