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망각의 계곡에 잠긴 이야기

베인밀레

베인x여밀레(드림주)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히르키세(@Hirkise) 님 커미션작입니다.


사막 위를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아 대륙은 그다지 걸음 한 적이 없어서 론가 사막의 황량한 풍경은 그에게도 제법 이질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위대한 대자연을 감상하는 대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목표가 확연한 남자, 한때 발로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베임네크는 마치 초대라도 받은 손님처럼 특이한 표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오목한 사구의 사이에 도달 한 베임네크가 손을 뻗었다. 원하진 않았어도 그 또한 신족이기에 네반이 그러했듯 가진 권능이 있었다. 감도는 신성을 따라 모래 바다 아래에 잠겼던 유적의 문이 부유했다. 문득 베임네크는 밀레시안 종족 사이에서 돈다는 동화가 생각나 건조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고 하던가. 비록 지금 이곳은 사막이긴 하나 마치 그가 공주님을 깨우는 왕자님과 같은 위치가 아닌가. 꼴에 웃기기도 하지. 전대 마왕은 웃음기를 거두고 낡은 문에 갑옷으로 감싼 손바닥을 댔다. 거대한 문이 마른 마찰음을 내며 움직였다. 길 잃은, 정확히는 필리아에서 추방된 엘프들이 숨죽여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 열렸다. 베임네크에게는 한 걸음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대.” 

베임네크는 이를 아쉬워하는 대신 문이 뱉어내는 엘프를 품으로 받았다. 나온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단조롭고 권태로운 동시에 평온했다. 부름에 답하듯 소녀에 가까운 모습을 한 엘프가 눈을 떴다. 새벽의 색 이 베임네크의 세계를 다시 물들였다.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

불멸하는 탓일까, 혹은 원체 박애하는 탓일까. 

둘 다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밀레시안, 카야는 순순히 베임네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다소 기묘한 동행 중이었다. 도착지는 필리아, 엘프의 마을이었다. 

“베인 씨는 더 안 먹어도 되나요?” 

“딱히. 그대가 원하는 만큼 먹도록 해.” 

언뜻 무심한 어조였으나 카야는 크게 개의치 않은 듯 불린 육포와 밀봉하여 습기를 유지한 빵을 씹었다. 자고로 캠핑에는 스튜나 수프 같은 건더기가 듬뿍 들어간 국물 요리가 제격이라고 하나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는 그릇을 씻기가 힘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필리아까지 가는 길이 좀 편하네요!” 

“나 또한 용무가 있으니.” 

“그래도요. 믿기 힘들 텐데 제 말도 선뜻 믿어주다니, 동행인으로서는 아주 만점인걸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기까지 걸었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상당히 많은 대화가 오갔다. 엄밀히 말하면 베임네크는 말수가 적었기에 카야 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붙인 쪽에 가까웠다. 샛별이 될 여행자는 사막 한복판에서 저를 구해준 이를 신뢰하여 제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베임네크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불신하는 대신 담백하게 수긍하며 카야의 옆에서 모래를 헤쳐 나갔다. 

회귀라니. 다정한 성정을 가진 새벽별이 베임네크의 소멸을 목도하고 택할 법한 일이었다. 어쩌다 이런 불안정한 형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모든 시간을 망각한 그녀와 마주친 것이 몇 번째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카야를 만나기 위해 그를 축으로 회귀했을 때부터 시간의 왜곡을 세길 포기했으니까. 횟수 또한 그가 휘말린 이유만큼이나 하등 중요치 않았다. 휘말려서 기억을 가진 채로 돌아온 베임네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아직 풋내가 가시지 않은 다정한 카야가 영웅이 되길. 그리하여 그의 심장에 다시 종언을 내려주길. 

“글쎄, 내가 믿는다고 확신하기엔 이르지 않나.” 

“그럴 수도 있죠. 그러면 뭐 어떤가요.” 

해가 지고 시간이 지나자 물기가 없는 땅은 빠르게 식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는 육체를 가진 베인은 상관없었으나 갈아 치울 수 있대도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카야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식사 를 마친 카야는 무릎에 덮어 두었던 담요를 들어 펼치곤 등에 올려 전체적으로 몸을 감쌌다. 

“베인 씨는 제게 음식을 줬고, 잠잘 천막을 빌려주었으며, 필리아까지 동행해서 외롭지 않게 해줬어요.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한 카야가 마지막에는 어깨를 으쓱이는 동시에 베임네크를 향해 갸우뚱했다. 베임네크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카야의 옆에서 이 짧은 여로를 잠시나마 걷기로 한 이유는 오로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이타적인 구석이라고는 하등 없는 이기적인 이유인데도. 마치 베임네크에게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구는 카야는 고작 이리니드라는 이름으로 네반이 휩쓴 땅을 여행하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아직 묵시록의 시대까지 오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남은. 

별빛은 방황하고, 방랑하며, 내키는 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아는 베임네크는 카야의 발이 헛된 자리를 밟지 않길 바랐다. 그러니 그는 답지 않게 길잡이를 자처하며 이리도 집착적으로 단절된 시간 속에서 헤매는 별을 찾아오는 것이리라. 

“그러니 고마워요. 수상할 텐데 이렇게 흔쾌히 식량과 온기를 줘서요. 필리아까지 잘 부탁할게요.” 

범인이라면 헛소리로 치부할 그녀의 비밀에 대해 가타부타 부언하지 않았던 탓인지, 그렇지 않아도 사근사근하고 붙임성 좋은 카야는 베임네크의 기억 속 초면보다 더욱 상냥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빛나는 자의 조건이면서도 동시에 답답해서 베임네크는 제법 신랄한 어투로 말하고야 말았다. 

“그대는 이런 중대한 사항을 고작 하루치 음식과 잘 곳을 제공했을 뿐인, 수상쩍기 짝이 없는 나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베임네크는 카야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구석이 있진 않은지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측을 배신하여 카야는 어깨까지 으쓱이며 산뜻하게 답했다. 

“어차피 베인 씨도 잊을 텐데요.” 

“그대는.” 

후련한 대답에 베임네크는 불쑥 치솟는 의문을 참지 않았다. 카야의 거대한 베일을 들춰본 이후로 그 무게에 압도되어 잊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샛별에게 얽힌 시간의 마법은 한 지성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진실이기에 그의 호기심은 한낱 편린에 불과하여 아주 간결했다. 초점은 오직 카야의 감상에 맞춰졌다. 

“그렇게 잊힌 기억이 아쉽지 않나?” 

수많은 종류의 사랑을 담은 진한 하늘색 눈동자가 순수하게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나온 목소리 또한 평이했다. 

“아쉬울 일이 있나요?"

베임네크는 느릿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의 반응에 주눅 들지 않고 카야는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새가 노래하는 듯한 높고 빠른 목소리가 모래 위에 흩어졌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오히려 크나큰 행운이죠? 베인 씨가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일견 천진난만하게까지 들리는 음색이었다. 카야의 긴 머리카락이 선율을 타고 흔들리며 밤에 섞여 들어갔다. 베임네크는 수다를 즐기진 않았지만 카야의 연설을 끊는 대신에 훌륭한 청자가 되었다. 

“저희 밀레시안들과 투아하 데 다난은 다른 시간을 살아가니까요. 제게는 밀레시안인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늘, 잊히는 데에 슬픔을 호소하곤 했거든요.” 

“그대는 다르다는 건가?” 

“네! 저는 다른 밀레시안들과 다르잖아요? 투아하 데 다난이 저를 잊어도, 저 또한 그들을 잊어요. 원인이 되는 기억이 양쪽 모두에게 없으니 슬플 이유가 없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동시에 지나치게 기이하여 그야말로 영혼의 강을 건너온 에린 바깥의 존재가 가질 법한 사고 회로였다. 

“늘 새로운 기억으로 채우고, 비우고, 그리고 다시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거예요. 즐겁지 않나요? 저는 제게 이 능력을 주신 여신께 진심으로 감사한답니다!” 

베임네크는 웃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제 등에 칼을 꽂을 다난의 수호자에게 감사하는 순박함이라니. 그래, 이토록 순진하니 영웅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베임네크의 뜻도 모르고 모래바람을 헤치느라 지친 별이 하품했다. 

“으, 이제 정말 자야겠어요. 동이 틀 즈음에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그래. 나는 불을 보고 있도록 하지.” 

“베인 씨도 자야 하니까 중간에 깨워요.” 

이미 죽은 몸뚱아리는 음식이나 물, 수면 따위의 생존 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베임네크는 답을 하지 않았다. 무응답은 타인의 오해를 이끌기 쉬웠고, 다정한 이는 그의 답을 곡해하여 받아들였다. 임시로 세운 천막이 모래바람을 막으러 꽉 다물렸다. 

그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지. 

불길을 눈앞에 두고 베임네크는 지나간 시간을 찬찬히 반추했다. 되감겨서 사라진 그의 소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다시 한번 재현되리라. 

그 순간이 조금 더 빨리 다가오길 바라며 별이 흩뿌리는 죽음에 매혹된 남자는 모래가 뒤덮은 길 위에 이정표처럼 우뚝 서서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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