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
나는 나신이고 치부를 가릴 수 없어.
나는 얼어있다. 얼어서 가로로 긴 냉동고에 누워있다. 내 위는 투명한 창이다. 아니, 덜 닦아서 얼룩덜룩한 창이다. 누군가가 창 위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벌거벗었고, 심지어 내 성기는 발기해 얼어붙어있다. 부끄러웠다. 지독히도 부끄러웠다. 드르륵, 창이 열렸다. 아주 작은 틈새였다. 그 틈새로 손이 내려왔다. 얼어붙은 나의 뺨을 만졌다. 손가락이 내 뺨에 붙는 것이 느껴진다. 내 뺨이 살풋 녹는 것도. 곧 손가락은 찐득한 얼음과 함께 떨어졌다. 손가락이 떨어지는 자리가 녹았다 도로 얼었다. 하얗게 얼은 내 몸에서 지문이 창백한 내 살빛으로 녹아 서리가 내렸다. 문이 드르륵, 닫혔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지 마. 하지만 그들이 나를 짊어지고 가줄 리 없었다. 나는 커다랗고 얼어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짊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블레이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깼다. 소파 위었다. 귓가로 치글거리는 맛있는 소리가 들렸다. 잘 익은 소고기 냄새가 났다. 양파와, 이름 모를 채소가 곁들이로 같이 지글거리고 있었다. 블레이드는 악몽에서 빠져나와 음식의 황홀경으로 들어가려 애썼다. 쉘터는 요리하는 디어의 뒷모습을 비춰 블레이드에게 전송했다.
스승님…….
블레이드가 소파를 더듬어 자세를 바로했다.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습니까?
디어는 한참만에 그 소리를 눈치챘다. 그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없다, 하고 답했다. 블레이드가 일어나기 쉽도록 쉘터가 시야를 비춰주었다.
그나저나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혹시 그 일이느냐.
블레이드는 잠시 자신의 꿈을 생각해보았다. 무진장 춥다는 기억만 남아있었다. 달은……. 추웠다. 그래, 추웠지만, 꿈 속 만큼 춥지는 않았다. 군체 마법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도망쳐야해, 쉘터가 비명처럼 말했다. 아니, 쉘터의 비명이었다. 블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블레이드?
디어가 고기를 굽던 팬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스승님.
블레이드가 머리를 짚었다.
아니에요……. 악몽이었어요. 그냥 평범한 악몽이요. 잠시 진정하면 될거에요.
그러냐.
디어는 다시 굽던 고기에 신경을 썼다. 고기를 확대해줘, 블레이드의 요구에 쉘터는 소고기를 확대해주었다. 2cm 남짓의 두툼한 고기였다. 오븐에 넣고 구우면 좋을 것을 디어는 후라이팬을 이용해 굽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건 별 것 아닐 수 있었다.
먹으렴. 나는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마는,
디어가 소리 높여 블레이드를 불렀다.
, 너는 아니잖냐.
블레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쉘터의 도움으로 얌전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정말 별 악몽 아니었지?
디어는 조심스럽게 블레이드에게 물었다. 블레이드는 고기를 한입 가득 베어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안쪽은 아직 차가웠지만, 전체적으로 맛있게 익은 고기였다. 안 익은 속 때문에 불 위에 더 두었다면 까맣게 탔을 것이다.
그냥, 무진장 추운 곳에 갇혀있는 꿈이었습니다.
공허 수정 같은……?
아뇨. 그런 무서운 것 말고, 그냥 냉장고 같은 곳이었어요.
네가 그 일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까봐 두렵다.
디어는 솔직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블레이드는 감사함에 잠시 북받혀올랐다. 디어는 블레이드가 군체 소굴로 끌려들어가기 직전, 그를 구해주었다. 블레이드는 부활하자마자 군체 마녀에게 습격당했다. 타는 듯 한 고통이 그를 삼켰다. 불구덩이에 던져진 와중에도 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건, 희극이었을까 비극이었을까…….
스승님께서 계신데 제가 왜 헤어나오지 못하겠습니까?
블레이드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디어는 끌려가던 블레이드를 구출해냈다. 블레이드를 고문하던 마녀를 단칼에 죽이고, 블레이드를 끌고가던 기사의 머리를 주먹으로 터뜨려버렸다. 블레이드의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감싸고 부축해주던 손길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해 극복할 것이라고, 그 사람을 위해 복수할 것이라고, 블레이드는 바들거리며 정신을 부지했다. 디어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니 마음이 놓인다.
디어는 블레이드가 본 가장 튼튼한 방벽이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블레이드는 불안한 마음을 잇새로 씹어삼키며 후라이팬 위에 놓인 덜 익은 불안증에 포크를 가져다 댔다.
3분 조리 : 블레이드.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분말형 레트로스 식품이었다. 블레이드는 안심했다. 일단, 자신의 발기한 성기가 보이지 않는단 점에서……. 블레이드는 자신의 욕망이 아랫도리에 그대로 표출된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누군가 그를 들어올렸다. 그는 당당한 척을 했다. 분말이긴 했지만. 입자입자가 자랑스럽게 펼쳐졌다.
아, 여기 털 들어가있잖아.
그를 집어들었던 사람은 역겹다는 듯 블레이드를 내팽겨쳤다. 그는 매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매대 밑 공간으로 미끄러져들어갔다.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내가 역겨워?
블레이드가 매대 밑 공간에서 소리쳤다.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블레이드는 순간 눈을 떴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들꽃의 향기가 살랑이며 코 끝을 간질였다. 그의 주변에서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시락거리다, 폭폭 땅 파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오드득 하고 작게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쉘터가 신경을 연결해주기를 기다렸다. 그의 머릿 속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이미지는 오그려앉은 새벽제비의 모습이었다. 블레이드는 울렁거림이 가시길 기다렸다.
깼니.
새벽제비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뭐 하십니까?
블레이드가 물었다. 새벽제비는 뿌리 채 뽑힌 풀을 들어 흔들었다. 그 때 마다 흙이 호독 호도독 떨어졌다. 블레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봐도 잡초같았다.
우리 저녁이란다.
잡초가요?
새벽제비가 키득거렸다. 블레이드는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건 냉이야. 냉이. 인사해봐. 냉, 이.
다행이 새벽제비는 블레이드를 놀리는데 집중했다.
이 봄철에 먹을 수 있는 풀 중 하나란다. 양념을 해서 샐러드처럼 먹지. 뿌리는 질기지만 향긋한 맛이 일품이란다.
그럼 우리의 저녁은 샐러드인 것이군요.
블레이드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냉이 샐러드.
물론 끓여서 국으로 먹을 수도 있단다. 손질이 지난하지만, 백합 조개와 같이 넣고 끓인 냉이백합국은 일품이지.
냉이백합국도 해주실 겁니까?
새벽제비가 폭소를 터뜨렸다. 블레이드는 약간 움츠러들었다. 끙차, 새벽제비가 얕게 앓으며 일어났다. 그가 손을 뻗었다. 블레이드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여기선 백합 조개가 나지 않는단다, 얘야.
다른 곳에서 구해오면 될 것이 아닙니까? 제 도약선을 타고서요.
새벽제비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조개처럼. 한참만에 새벽제비는 입을 열었다.
이젠 안 가, 그 동네.
블레이드는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냈다. 새벽제비는 수많은 아이들을 키웠다. 서른 명 정도. 그리고 새벽제비는 서른 명 혹은 그 이상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블레이드는 그의 앞에 방벽을 펼쳤다. 새벽제비는 헐떡거리며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휘둥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디어 스승님께서 저를 보냈습니다!
블레이드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가 몰락자 몇 놈을 쏘아 없애자, 새벽제비는 힘을 모아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높이 도약했다. 그의 지팡이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곧 벼락이 내렸다. 천벌이었다. 잔당은 도망가거나, 블레이드의 총에 맞아 스러졌다.
당신이 새벽제비……. 맞으시죠?
그제서야 블레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는 그를 두려워해 호다닥 새벽제비의 망토 뒤로 숨었다. 마치 새끼새를 품은 도요새처럼 새벽제비는 볼록해진 채 다리만 네 개가 되었다.
그렇다. 디어가 너를 보냈다고. 어째서지? 도와준 것은 고맙다만.
스승님께서 이 즈음이면 당신이 곤경에 빠졌을 거라며, 가서 도와주라 하셨습니다.
납득이 간다는 듯 새벽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토 뒤로 숨은 아이를 재촉해 블레이드에게 감사의 말을 하도록 시켰다. 블레이드가 말했다.
새벽제비. 아이는 도시의 품으로 돌려보내시죠. 당신은 우리와 같은 수호자……. 아이를 데리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싸우지 않을 것이야. 이 아이는 나의 아이다.
새벽제비가 아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도시에는 충분히 좋은 보육원이 있습니다. 한번 방문해보세요.
도시의 방벽은 마무리를 짓고 있는 참이었다. 도시의 안에는 사람들이 번듯한 둥지를 지어 짝을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충격받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완성될 길다란 벽 앞에서 사람들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최신식 건물이 보였다. 홀로 된 아이들을 기르는 보육원이었다. 새벽제비는 자신의 방법이 이젠 무용한 것을 인정했다.
얘야. 나를 잊더라도 그건 기억하렴.
새벽제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형제 누이, 또 그 나머지들과 같이 넌 3월 1일이 생일이란다.
블레이드는 두 사람이 다소 차갑게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새벽제비는 그 날 자신의 머리카락을 끊었다. 블레이드의 머릿 속으로 쉘터가 보낸 새벽제비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새벽제비. 그럼 냉이백합국은 언제 먹을 수 있습니까?
새벽제비는 보란듯이 냉이를 들어올렸다.
3월 1일.
그건…….
내 아이들은 모두 생일이 3월 1일이었어.
블레이드는 묻고 싶었다. 서른 명의 아이들……. 그 아이들은 새벽제비의 죄책감에서 가지를 치고 나온 것인지. 아이들을 길러내면 보속이 될 것이라 믿은 것인지. 3월 1일은 대사면의 날인지.
쿼터를 배정받았단 소식에 디어와 새벽제비가 몰려들었다. 블레이드의 쿼터는 상당히 넓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공간은 오히려 짐이다. 아무튼 디어와 새벽제비는 블레이드를 위해 무슨 요리를 해야할지 말다툼을 했다.
그러니까, 간단한 볶음밥을 하는건 어떠냔 말이네. 그 위에 고기를 얹으면 얼마나 맛나다고.
자네, 거기 들어가는 야채는 뭐가 있는지는 아나?
새벽제비의 도발에 디어는 손목에 찬 데이터패드를 켰다.
당연하지. 친애하는 사랍의 레시피가 나에겐 있단 말이네.
디어는 당당하게 말했으나, 곧 지독한 슬픔에 얼굴을 더럽혔다. 새벽제비는 사랍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부터 침통한 침묵을 지켰다. 사랍은 누구란 말인가. 블레이드는 그들의 슬픔에서 소외당했다. 그 자가 누군진 몰라도, 미웠다.
그래. 사랍의 레시피라면 간단하고 든든하겠지. 수지가 은근히 안 맞을 것이고.
새벽제비가 입을 열었다. 디어는 씁슬하게 웃었다. 세 사람은 장을 보러 나갔다. 침통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활기가 가득 찼다. 블레이드는 냉동고를 보았다. 디어와 새벽제비가 얘기한 야채들이 다 여기 있었다. 블레이드가 두 사람을 불렀고, 새벽제비가 블레이드를 타박했다.
이런 냉동 야채는 물이 나와서 맛이 없어. 신선한걸 사야지. 자네 이제 혼자 살건데, 이런거 먹으면 안돼.
새벽제비는 브로콜리를 가볍게 눌러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냉동고를 닫았다. 매대에 있는 간편식품이 보였다. 레트로스를 쭉 지켜보던 블레이드에게 디어가 왔다.
이런……. 몇 개 쟁여놓으면 좋겠지만 이걸 보게. 털이 들어가있지 않나. 머리털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그는 부주의하게 간편식품 상자를 내려놓았고 상자는 매대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블레이드는 몸을 굽혀 상자를 꺼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상자를 그냥 둔 채 블레이드는 디어와 새벽제비의 행렬에 합류했다. 새벽제비는 신선한 야채를 찾았고, 디어는 두툼한 인공고기를, 블레이드는 커다란 쌀푸대를 들고 왔다.
블레이드, 자네, 상처에 무리가 가면 어쩌려고 그걸 짊어지고 와……. 양이 작은 것은 없었나.
있었는데, 쌀은 두고두고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제가 해먹고 살아야하니까, 사람 많을 때 큰 놈으로 들고왔습니다.
그러면야. 일단 그거 나에게 넘기게.
디어는 상처가 짓무르지 않게 조심하라고 가볍게 타박하며 쌀푸대를 짊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계산을 하고 두런두런 얘기하며 블레이드의 집까지 갔다. 디어와 새벽제비는 더 이상 사랍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으나, 블레이드는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가벼운 짐을 들고 그는 디어와 새벽제비의 등 뒤를 따랐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괜히 긴장됐다.
블레이드. 가서 식탁을 정리하게.
집에 들어오고서야 블레이드는 디어와 새벽제비 사이에 낄 수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블레이드는 디어의 말대로 식탁을 훔치고, 식기를 꺼내왔다. 모두 새것이었다.
스승님, 새벽제비, 볶음밥이면 수저 정도만 있으면 될까요?
디어는 잠시 사랍의 국수볶음밥을 생각했다. 밥 위에 커다란 고기 몇 점이 올라간다.
포크나 젓가락을 준비해다오. 고기도 먹어야하니까.
그것도 그냥 잘게 썰어서 한데 볶아.
새벽제비가 끼어들었다.
레시피는 나한테 있네, 새벽제비. 그리고 고기랑 따로 먹는 것이 핵심이야.
먹어 본 적이 있어야 뭐라고 말을 할텐데, 에휴.
새벽제비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고 더 이상 디어의 말에 토 달지 않았다. 식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블레이드는 디어에게 묻고 쌀푸대를 풀었다. 그것은 밀가루와 달랐다. 고백하자면 블레이드는 쌀을 처음 보았다. 길쭉한 것이 마치 벌레 같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블레이드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스트는 블레이드와 같이 시선을 돌렸다.
애송이, 잠시 비켜봐.
새벽제비가 괴상한 곡조에 붙여 말을 했다. 그는 그릇으로 쌀을 푹푹 펐다. 그리고 물을 틀어놓은 채 쌀을 박박 씻었다. 흰색이라 그런지, 생김새만 뺀다면 깨끗해보였는데 방산충 체액같은 희부연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블레이드는 괜히 자신의 옆구리를 만졌다. 새벽제비는 괴식가라고 디어가 나쁘지 않게 빈정거렸다. 새벽제비는 또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장난으로 화를 냈다. 벌레도 먹어본 적 있을까. 하지만 식사가 코앞인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블레이드는 얌전히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디어가 뭔가를 지시하면 새벽제비가 짧게 대꾸했다. 그는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부엌을 작은 통창에서 들어온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불안했다. 무언가 블레이드를 불안하게 했다.
가끔 고기를 먹으며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사랍의 볶음밥을 하던 날 처럼 따듯한 햇살이 통창으로 들어오던 날이었다. 블레이드는 쿵쿵거리며 들어와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 고스트의 시야가 그의 움직임을 한 발 뒤늦게 따라갔다. 버퍼링 걸린 이미지를 받아들이며 블레이드는 고스트와 점차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약간은 느릿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다. 저번에 새벽제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만든 샐러드만 차갑게 식어있었다. 음. 샐러드가 아니라, 나물이라고 했던가. 미칠 것 같이 허기가 졌다. 그거라도 먹고 생각해야겠다. 블레이드는 냉장고 앞에 웅크려 앉아서 급하게 손으로 나물을 집어먹었다. 썼다. 새벽제비의 말을 따라 삶고, 주무르고, 씻고를 한동안 반복했는데도 이 푸샛것은 너무나도 썼다.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쓴 물이 입 안을 감돌았다.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안 될 것 같았다. 블레이드는 접시에 나물을 뱉었다. 너무 씹어서 반쯤 곤죽이 되어있었다.
역겨워.
블레이드가 자신에게 말했다. 그릇을 내던져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눈을 꾹 감고 바닥을 더듬어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가 안전해졌다. 눈물이 울컥 새어나왔다. 기능을 못하는 눈알이지만 눈물샘은 그럭저럭 움직이고 있나보다. 블레이드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눈물을 참아 감추었다. 익숙하게, 커튼을 열고 그 뒤로 밀어넣었다. 그를 위해 도살된 고기를 먹으면…….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눈물을 감추자 눈물은 코로 흘러내려 맑은 콧물이 되었다. 블레이드는 목울대를 끅 끅 움직이며 코를 훌쩍였다. 그는 나신이었다. 그는 나신으로 식료품대에 올라가있었다. 다리를 움츠리자 사람들이 신선도를 파악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다리를 펼치면 치부가 드러난다.
현실에서 내가 나체로 널부러져있으면 오실겁니까, 스승님?
하지만 꿈에서조차 그의 스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왔으면 목을 메고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그 꿈은 부끄러운 꿈이었으니까. 자신의 식욕이 성욕으로 분출되는 꿈이었으니까. 블레이드는 진정하려고 꿈에 상징을 부여했다. 그는 아버지 디어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축된 고기를 먹으며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블레이드의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토하듯 그는 오열을 했다. 소리를 질렀다. 발버둥을 치고 바닥에 내려놓은 접시를 내팽겨쳤다. 디어는 사라졌다. 테오라는 새 제자 때문에. 블레이드는 질투했다. 디어를. 그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사라지면, 나도, 찾으러 올건가요, 예?
블레이드는 웅크리고 누웠다. 감당하기 힘들었다. 새벽제비와 디어는 사랍의 볶음밥을 만들며 이례적으로 같이 요리했다. 보통은 둘 중 하나만이 요리를 했다. 사랍이 누군지에 대한 것은 좀 뒤에 알게 되었다. 새벽제비는 디어를 설득해 사랍의 무덤에 블레이드를 데려갔다.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는 사랍이란 사람을 애도했다. 그는 그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미웠다. 결코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렀고 한데 뒤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블레이드는 오열과 몸부림을 어금니로 잡아 꽉 깨물었다.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디어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난 당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진정을 한 듯 블레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등으로 냉장고의 작은 떨림이 들어왔다. 눈물은 천천히 떨어졌다.
아니었나봐.
그의 입은 쓴 채소를 거부했다. 삼키는 것을 거부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블레이드는 디어에 의탁하고 있던 부분부터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부분엔 그가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나신이 들어있었다. 얼어있지도, 분말 상태도 아닌 날것 그대로 살아서 펄떡이는 나신이. 숨겨야 했다. 아니면 보지 않던가. 블레이드는 훌쩍이며 바닥을 치웠다. 식탁 밑에는 먹다 떨어뜨린 말린 대추야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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