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늘
1. 어머니의 품 안으로
구 시청각자료에서 본 적 있었다. 한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거기다 밑은 바위 해안, 잘못 떨어진다면 머리가 깨질 것이다. 어쩌면 죽겠지. 블레이드는 팔을 뻗어 귀에 바짝 붙였다. 그 상태로 허리를 접어 손 끝이 발 끝에 닿도록 했다. 무릎을 굽혔다. 땅을 박찼다. 블레이드는 날아올랐고, 온 몸으로 바다에 떨어졌다. 포말이 그를 감쌌다. 욱신거리는 몸에 물거품이 닿아 간지러웠다. 그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소리는 먹먹하게 들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조금 위에서. 물거품이 유성의 꼬리처럼 피어올라 궤적을 그렸다. 블레이드는 서글퍼졌다. 새벽제비의 손에 낚여, 블레이드는 물 위로 끌어올려졌다. 그는 아기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죽으려고 환장했니?
새벽제비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멍청하게 죽을 셈이냐고!
블레이드는 기침을 해대느라 답하지 못했다. 새벽제비도 답을 바라고 다그친 것이 아니었기에, 블레이드를 껴안은 채 해안으로 천천히 헤엄쳐갔다. 두 사람의 사이만큼 가깝게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이드가 바위 해안에 닿자, 그의 뇌에 투사되던 이미지가 점차 바뀌었다. 고스트 쉘터가 천천히 블레이드를 향해 오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블레이드를 앉히고, 해안가에 벗어놓았던 그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손 많이 가는 녀석.
새벽제비가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고스트 트로이메라이에게 블레이드를 감시하라고 했다. 블레이드는 자신의 뒷통수를 보았다. 바닷물이 수십년간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상처에 들어가 불에 타는 듯 쓰려왔다. 이제야 그 감각을 느끼다니 우스웠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몸을 움츠렸다. 블레이드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도 우스웠다. 주춤주춤 몸을 다시 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오만상을 찌푸리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는 곳으로 고스트는 자신의 시선을 돌렸다. 바위 해안 초입부가 보였다. 그 곳은 자갈 섞인 거친 모래가 있었다. 디어와 자신이 새벽제비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밟은 땅이었다. 디어는 그 곳에 없었다. 당연히 그 곳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2. 어리광
도시에서 같이 살아요, 하이옌. 제가 모신다니까요.
이 이야기는 세 번째 하는 것이었다.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의 방으로 쓸 곳을 다 치워놓고 간단한 가구까지 비치해놓은 참이었다. 새벽제비만 결심하면 됐다.
내가 널 모실지 네가 날 모실지 어떻게 알아?
당신까지 그러긴가요.
블레이드가 살짝 혓바닥을 내밀었다. 새벽제비는 그의 버릇에 경쾌하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를 모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속내가 나오는구만? 도시 생활이 많이 힘드니?
새벽제비는 가볍게 물었다. 블레이드는 순간 자신의 기분을 토로하고 싶었다. 두 눈이 안 보이는 수호자라니, 블레이드 자신 조차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믿겠는가.
미안하다, 얘야.
블레이드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활짝 웃어보였다. 눈 끝에 눈물이 맺혔다. 눈가가 간지러웠다.
아니에요. 당신에게 어리광이나 부리려고 연락한 것은 아니니까…….
일단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하마.
또요?
새벽제비는 웅얼거리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리고 곧 통신이 끊겼다.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들어온 이미지 때문에 가벼운 어지럼증이 뒤따랐다. 신경 접속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별 것 아니긴 했지만, 욕지기가 났다. 블레이드는 가볍게 잔기침을 했고 이미지에 익숙해지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블레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스트는 위치를 바꿨고, 변화하는 이미지가 그의 머릿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멍하게 머릿 속의 이미지를 보다 새벽제비에게 어리광 운운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가끔, 아니, 자주 부정은 긍정을 의미한다. 새벽제비는 그런 것을 읽어내는 것에 능하다.
3. 2일 전
아.
블레이드는 황급히 헤드기어를 썼다. 그러나 화력팀원들은 그의 눈이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지나치게 쪼그라들은 홍채는 흐릿한 빛깔의 눈동자 위에서 표적처럼 찍혀있었다. 바늘을 던져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얼굴 반 이상을 뒤덮은 흉터는 또 어떻고. 몸에 흉과 상처가 남는 수호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력팀원들의 눈이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고스트로 향했다.
수호자 맞아.
블레이드가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잘 싸웠잖나?
왜 내가 날 변호해야하지. 블레이드는 화력팀원들 사이에서 바쁘게 오가는 눈빛을 보았다. 블레이드는 이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여섯전선에서 싸운 타이탄이었고, 황혼의 틈에서 돌격한 수호자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묻혔다.
하지만 앞은 위험한 곳이잖아. 우린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무작정 돌격할 수 없어.
블레이드는 이 화력팀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렇겠지. 이들은 되살아난지 몇 년 안 된 어린 빛이었고 블레이드는 아니었다. 블레이드 한 명만 있어도 이런 임무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선봉대는 그에게 화력팀을 이룰 것을 강제했다.
준비하고 재정비 하고 다시 모이자. 좌표기 찍어.
화력팀원이 팀장의 명령에 불만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스트는 그들이 블레이드를 힐끔거리는 것을 모두 보여주었다. 블레이드는 다시 한번 항변했다.
내가, 준비 안 된 상태니?
응? 아니?
화력팀장이 경쾌하게 말했다. 그리고 좌표기를 설치한 화력팀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새벽제비와 디어는 그의 처우에 대해 항의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래도 발언권이 있었다. 그러나 디어는 떠났고, 새벽제비는 도시에 자주 오지 않았다. 블레이드에게는 알량한 훈장 정도만 남았다. 블레이드는 숨을 들이켰다. 언제까지나 디어에게 의존할 수는 없다.
4. 1일 전
얼굴이 왜 그래.
새벽제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블레이드는 부러 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의 마음이 오늘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서였고, 자신의 약한 부분을 새벽제비가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많이 힘들구나, 도시가…….
힘들죠. 저는 계속 싸우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계속 전령 일을 하는 것 처럼 저는,
블레이드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말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힘들어서, 그는 말을 황급히 마무리했다. 데이터패드에서 텍스트가 왔다고 알림음이 들렸다.
잠시만요.
별 것 아니겠거니 하고 음성 변환을 하였다. 어제의 화력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화력팀을 해체했다. 정확히 자신을 내쫓은 것이겠지. 그렇게 써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블레이드는 가만히 있다 자신이 새벽제비와의 채널을 음소거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블레이드의 어깨가 움찔 떨리고, 새벽제비가 말했다.
내일 동굴로 오도록 해라.
블레이드는 뭔가 변명하려고 했지만 새벽제비는 이미 통화 채널을 나갔다. 머릿 속이 하얗게 변했다.
망했어, 망했다고…….
하지만 뭐가 망했단 말인가? 소리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블레이드는 소리를 지를 성격이 아니었다. 울부짖고 싶었다. 그러나 블레이드는 울음을 터뜨릴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그래서 차분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 때였다. 쉘터가 그의 신경에 이미지를 투사했다. 블레이드는 숨을 들이켰다. 어지러우면서 위장을 쥐어짜는 듯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블레이드는 헛구역질을 했다.
쉘터, 왜 하필 지금,
그의 머리는 이미지의 어떠한 면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피아 색으로 번져있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혼란스러웠고, 개별 이미지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이 가라앉을 때 까지 그는 보여진 이미지를 곰씹으며 앉아있었다. 점차 “본다” 는 것이 익숙해졌다. 고스트는 그의 시선으로 방을 비추고 있었다. 책들은 모두 쏟아져있었고, 의자는 나뒹굴고 있었으며, 커튼은 떨어져있었다. 왜 내 방이 난장판이 된 것이지? 시야도 약간 이상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블레이드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난…….
블레이드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쉘터가 그 위에 내려앉았다.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5. 보시布施
블레이드는 한번도 자신을 준비되지 않은 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준비되지 않은 자로 만들었다. 블레이드는 저항했다. 디어는 그 저항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는 블레이드의 스승이었고, 아버지였으며, 블레이드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새벽제비를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뭘……. 뭐 하십니까, 새벽제비!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의 손에서 단검을 뺏었다. 쉘터가 새벽제비의 머리카락을 확대하여 보여주었다. 아무렇게나 끊어 들쑥날쑥하게 잘려있었다.
머리가 거치적거려서.
새벽제비는 평온하게 말했다.
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한 밤에 몰래 일어나 머리를 자르는 이유가 뭡니까? 머리를 자르는게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블레이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새벽제비는 조용히 일어나 모닥불을 떴다. 블레이드는 쉘터의 도움을 받아 새벽제비의 뒤를 느리지만 쫓아갔다. 늙은 수호자는 가파른 숲길에 섰다.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것이었다. 새벽제비에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블레이드는 그를 낚아챘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잖니.
제발, 수호자의 빛을 그런데 쓰지 말아주십시오.
날 비워내고 싶다.
블레이드는 새벽제비를 억지로 앉혔다. 새벽제비는 지루하고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블레이드는 준비된 자였다. 그는 한가득 차있었다. 그는 새벽제비가 비워낸 곳을 자신이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래서 단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살점을 뜯어냈다.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새벽제비의 표정이 바뀌었다. 놀라움과 미안함으로. 블레이드가 웃었다.
드셔요. 당신을 채울겁니다.
그것은 미봉책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새벽제비는 울면서 블레이드를 먹었다. 다음 날 디어가 새벽제비에게 말했다.
나잇값 좀 하시게.
새벽제비는 콧웃음을 쳤을 뿐이다. 크게 우웅- 하고 떨리는 소리가 났다. 블레이드는 놀라 어깨를 떨며 일어났다. 얼마나 달게 잤는지 입안이 다 말라있었다. 블레이드 대신 쉘터가 계기판을 작동했고 그의 도약선은 안전하게 착륙했다.
6. 그러나 그 곳에는 나의 그늘이 찍혀있었다
쉘터의 시야로, 블레이드가 찍혔다. 블레이드는 어설프게 몸을 접었다. 땅을 박찼다. 허무하게 물 위로 떨어졌다. 블레이드는 쉘터의 시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온 몸으로 물에 박히는 블레이드의 모습이 열 다섯장으로 나뉘어 전송되었다. 그것을 거꾸로 돌렸다. 물 속에서 뽑힌 블레이드는 활짝 펴졌던 몸을 다시 옹송그리고 절벽 위에 섰다. 그것을 올바르게 돌렸다. 몸을 접은 블레이드는 땅을 박차고 수면에 머리를 박았다. 누구의 그늘인가. 바닷물에 적셔진 상처가 쓰리다. 쓰리다 못해 그 부분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하이옌.
블레이드가 고통과 추위를 가리려 하지 않고 말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새벽제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레이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어주었다.
그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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