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 오 분

아카기 시게루 드림

赤愛 by 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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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로그는 커미션 작업물입니다.

평정심을 잃을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은 다음과 같다. 움지럭거리는 손, 허공을 배회하는 시선, 상기된 뺨과 귀, 떨리는 입술. 그러다 혼란이 정도를 넘어가면 반드시 새파랗게 질리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아카기 시게루는 그에 이르는 인간을 수도 없이 봐왔노라 공언할 수 있었다. 오늘이 무수한 지난날과 다른 점이란 그가 앉은 곳이 작탁 앞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아카기는 커피잔으로 옮기려던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재떨이에 기댄 채 무의미하게 타들어 가는 담배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당장이라도 다시 집어 들어야 했지만, 그리하여 이 공간의 무용함을 중단시켜야 했지만, 아카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검지를 까닥거리는 공연한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해보려 애썼다.

“그래.” 짧은 침묵 끝에 아카기가 가까스로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제 앞에 앉은 자, 오이누마 아유카라는 남자는 마작을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는 패를 볼 줄 몰랐고 역을 만들기엔 한참 모자랐다. 그러니 아카기와는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리 만무했다. 아카기는 상체를 뒤로 젖혀 눅눅한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유카는 여전히 붉은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연신 아카기의 눈치를 살폈다. 속을 숨기기는커녕 다음 생각으로 건너가기도 어려워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카기는 수를 셌다. 아유카의 얼빠진 얼굴은 오 년 전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고, 우연한 재회로 치기엔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단 인상이 너무 강했다.

담배는 이제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유카가 그것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돌아오신 건가요?” 그의 목소리는 담배 연기에 가려져 불분명하게 들렸다. 아카기는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곤 새것을 꺼내 물었다. “돌아오다니?” 아카기가 담배를 문 채 아유카를 바라보자, 아유카가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어딘가 늘어지는 말씨완 다르게 머뭇거림 없이 주머니를 뒤진 그가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앗, 여기에…….” 아유카가 말끝을 끌며 성냥개비를 아카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갑작스런 붉은 겨냥에 아카기가 눈을 씀벅거렸다.

“아니.” 그 말은 다소 비정하게 뱉어졌다. “아니야….”

돌아오다니. 이곳은 아카기의 시작점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전제부터가 성립되지 않는 멍청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아.” 아유카가 작게 중얼거리곤 성냥에 불을 붙였다. 어찌나 헤매는지 두 번은 참아주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오랜만이어서 조금 들… 들떴던 것 같기도.” 아유카가 웃었다.

폭 좁은 입술이 우물거리며 애매한 호선을 그렸다. 어쩐지 맥을 빠지게 하는 웃음이었다. 아카기는 담배 가까이로 다가온 불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불이 잘 붙도록. 곧 짙은 연기가 아유카의 낯짝을 향해 나아갔고, 그는 눈가를 찌푸리는가 싶더니 뒤로 풀썩 앉아 성냥을 흔들어 불을 날려버렸다. 아카기는 뜻하지 않게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까맣게 죽은 성냥개비 끝에서도 희고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카기는 다방의 누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오 분 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곱 시쯤 나가서 느긋하게 마장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아유카와 눈을 마주친 것도, 그에 이끌려 다방까지 들어와 앉은 것도 이제 와 생각하니 참으로 난처한 흐름이다. 시간이나 죽이고자 선택한 일에 진심으로 부딪쳐 오는 상대만큼 당황스러운 존재도 없으리라. 아카기는 “좋아서” 하고 발음할 때의 아유카를, 총알의 수를 세며 젖은 몸을 떨던 아유카를 차례로 떠올렸다. 어느 쪽이든 뺨이 붉었고 저를 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으로. 거는 마음이 같나. 아카기는 생각했다.

“그럼… 돌아온다가 아니라, 어떤 표현을 쓰면 좋을지, 앗, 잘 모르겠어요….” 생각의 허리를 낫으로 베어내듯, 아유카가 말했다. 방해를 온전히 받아낸 아카기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유카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는데, 등 뒤로 난 커다란 창으로 오후의 끈적거리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반대에 있는 얼굴엔 인위적인 어둠이 깔려 있었고, 다방의 전등이 그의 이마에 있는 아주 흐릿한 흠집을 어렴풋 반짝거리게 했다. 저런 게 있었던가? 아카기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오 년이었다. 사이사이 어쩌다 얼굴을 보기는 했어도. “집이라거나 뭔가가 있, 있으시다면 좋을 텐데.” 아카기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유카가 이어 재잘거렸다.

아카기는 대답 대신 재를 떨었다. 돌아올 테니까? 아유카의 의중은 너무 읽기 쉬웠다. 이를테면 열넷이 전부 투명한 패.

백 번 돌아 백 번을 전부 이길 수 있다.

그럼에도 걸리는 건 하나. 아유카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백지가 승리를 압도한다. 총신과 흠모하는 이의 앞에서 거는 마음이 같다. 승패가 유연한 세계로 돌입하여 규칙부터 새로 세우는 일.

“필요 없어, 그런 건.”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아카기는 어쩐지 순순한 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안전핀이나 브레이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십, 아니 사십칠이나 사십삼 퍼센트 정도로 살 수 있을지도… 라거나 주절거리는, 엉망인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아유카가 고개를 바로 들었다. 아카기는 그의 뺨에서 붉은 기운이 많이 가셨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어렴풋하고 희미한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숫, 숫자는 잘 몰라서요.” 아유카가 주머니 안에 손을 욱여넣자, 곧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냥일 것이었다. 아카기는 금세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숫자 얘기가 아냐….” 아카기가 버릇처럼 킬킬거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 근처에 뭉쳐있던 연기가 뿔뿔이 흩어지며 아유카의 상이 보다 또렷해졌다.

손도, 시선도, 뺨이나 귀도, 입술까지도 떨림이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그것들을 전부 빨아들이고 공중에서 흩어져버린 것 같았다. 단숨에 그려낸 정물화 같은 광경에 아카기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극단적인 이미지와 곧장 연결되었다. 아카기로선 피할 도리가 없었다. 칼끝이나 총구처럼. 죽거나 죽지 않거나, 오른쪽이거나 왼쪽이거나, 홀이거나 짝이거나…… ……. 아카기는 노는 손을 들어 커피잔 손잡이를 쥐었다. 차가웠다.

“앗, 마작을 배울까요.” 아유카가 불쑥 말했다. 식은 커피처럼 검은 눈동자가 아카기를 향했다.

“관둬….” 아카기는 시선만 들어 아유카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다 미지근한 커피를 들이켰다. 그가 다방을 나서기까지는 아직 오십오 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끼어드는 변덕이 없다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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