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위의 신
아카기 시게루 드림 / 드림 페어 도박 합작 𝗔𝗟𝗟-𝗜𝗡!
드림 페어 도박 합작 𝗔𝗟𝗟-𝗜𝗡! @Dreamcollabo_
반드시 들어간다. 아카기 시게루의 말은 언제나 적확했다. 도박에 수식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카기의 타법을 묘사하기에 그보다 가까운 표현이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좁은 실내에 모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다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카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가를 매만지며 아카기에게 건 자신이 얼마나 벌 수 있는지를 셈하기도 했다. 오로지 아유카만이, 아카기 시게루를 사랑해 발을 구르는, 개중에 가장 어린 그 사내만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50년대 초에나 나왔던 연발식 모델이야. 귀하게 공수했지.” 아사다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검은 천을 잡아 내렸다. 아카기의 눈이 좁아졌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발끝으로 땅을 티 나지 않게 두드린다. 아유카는 아랫배 앞으로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굴렸다. 화려한 기계의 외관이 드러나자 알게 모르게 장내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열기는 아유카의 심장을 감싸고 천천히 옥죄었다. 위쪽에 달린 치뜬 두 눈이 아유카를, 그리고 이 방 안에 있는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든 사람일랑 누군진 알 수 없어도 머리가 꽤 좋은 놈이었나 봐.” 아사다가 기계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정부 검열 이후에도 살아남아선, 지금까지 제대로 이 놈을 다룬 사람이 없다고 하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기계. 사람을 저 아래로 끌고 들어가는 기계. 파친코에 대한 아유카의 감상은 늘 그에서 그쳤다. 아유카는 기계 앞에 앉아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을 아주 많이 봐 왔다. 초점 없는 눈에 발작적인 손목의 움직임, 약간 구부정한 허리와 침이 흐르는 입가…… 번쩍이는 불빛과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요란한 소리는 섬뜩했다. 마작이나 포커와는 달랐다. 기계는 응답하지도 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 읽을 수 있는 게 없다. 몇 번인가 그 응답 없는 기계로부터 대승을 거둔 이들이 있었으나 하나같이 짧은 행운을 거머쥐었을 뿐이다. 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쇠구슬을 다시 그 기계에 쏟아붓곤 하던 인간들…… ……. 아유카가 고개를 돌렸다. 동공이 열려 검어진 눈으로 아카기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하나다. 아유카는 아카기 너머를 보고 있는 그 눈들이 싫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법. 입술을 조용히 모아 다문 채 아카기가 기계 앞으로 다가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아카기에게 처음 제안이 온 건 일주일도 더 된 일이었다. “그땐 일정이 있어….” 아카기의 거절은 부드러웠다. “한마에서 제안이 왔거든.” 짤막한 웃음과 함께 입술 앞에서 연기가 터져 나왔다. 한마라면 나름대로 강세인 기업이니, 아유카로서도 안심이었다. 판이 엎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카기가 그 기계 앞으로 가는 일일랑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의 청동 손가락은 다시금 아유카를, 늪 밑의 애인을 가리키고는 말았고, 거짓말처럼 한마의 상대였던 쵸비스 측의 대리 작사가 포기 의사를 내비치는 바람에 일정이 저 뒤로 밀려났다. 아유카의 낙담과는 별개로 아카기는 움직였다.
저 기계 앞까지.
노랗고 붉은빛이 번쩍거리는 기계는 정교했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느낌보다는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기계의 원한, 그 귀기가 철철 흐르는 듯하였다. 아카기는 그의 위로 매섭게 쏟아지는 기운일랑 전혀 모르겠다는 듯 태평한 낯짝이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기까지 했다. 저 냉혈한! 아유카는 두려웠다. 아카기의 강운이 저 기계를 얼마나 뒤흔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유카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마저 저 쇠구슬의 향방에 영향을 주게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아카기는 침착하게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곤 허리를 곧게 폈다.
아유카는 그의 옆얼굴에 차분히 흐르는 빛을 보았다.
노랗고 붉은,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불빛을…… …….
“어서 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카기는 물론 그렇게 했다. 그의 손가락이 스틱을 애무하듯 문질렀다가 단숨에 거머쥐었다. 아유카가 짧게 숨을 삼켰다. 다른 손으로는 차가울 것이 분명한 구슬 위를 훑었다.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기계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사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계가 번쩍거리며 오래된 노래를 뿜어냈다. 기계음과 묘한 잡음이 뒤섞여 기괴하게 들렸다. 아유카는 맞잡은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들었을 때 승부는 시작되고 있었다. 아카기가 구슬을 밀어 넣었다.
쇠구슬이 챙강거리며 좁은 벽에 부딪힌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제 아주 낮아져서 말발굽이 바닥을 구르는 듯했다. 아사다가 바람을 잡으려 두 팔을 허공에서 휘젓고, 아카기는 기수처럼 허리를 살짝 숙였다. 하나, 둘, 셋. 정확하게 예정된, 그러나 인간의 예상을 교묘히 벗어나는 방향으로 쇠구슬이 굴러갔다. 아카기의 입술 끝이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아유카가 눈을 크게 떴다. 집중하면 으레 나오곤 하는 아카기의 버릇이 아유카의 날뛰는 심장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양쪽 귀가 먹먹해지며 소음이 멀어진다.
아카기의 움직임은 기계적이었다. 스틱을 잡은 손은 부드럽게 위로 튕겨 올라갔고, 다른 손은 끊임없이 쇠구슬을 헤아려 쥐었다. 인간이 뿜어내는 습기와 열기로 아유카는 거의 질식할 듯했다. 어느새 뺨이 달아올라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작은 신음 뒤로 아유카가 가볍게 비틀거렸다. 아카기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이제 바짝 엎드린 모양이었다. 속력을 내는 것이다. 하나, 둘, 셋…. 아카기의 미간과 날카로운 콧대를 타고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번쩍이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고였다가 뱉어지기를 반복했다. “문제없어…!” 아카기가 으르렁거렸다. 인간으로 치자면야 비명이나 고함에 가까운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고, 각별했고, 심지어는 기계보다도 위에 있었다.
그는 능수능란했다. 쇠구슬의 궤적이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미세한 차이지만, 아유카는 알 수 있었다. 위험한 아우라를 양껏 뿜어내며 사람을 당기는 기계가 당혹감에 휩싸인다. 이건 이겼다. 아유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비틀거리는 발이 앞으로 몇 걸음을 나아갔다. 아카기의 잇새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자욱한 연기와 땀 냄새와 광기에 가까운 열렬한 집중력을 차치하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저 강력한 기계와 아카기의 싸움이었다. 아유카는…
아카기가 바닥으로 담배를 뱉었다. “다음…!” 그가 웃고 있었다.
아유카가 허겁지겁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나뒹구는 담배를 주워들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뜨거웠다.
“반드시 들어간다.”
아유카는,
오이누마 아유카는 늪 밑에서 자신의 신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이 줄줄 흘러내리는 턱에 긴장과 수축으로 인한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눈썹이 평소보다 더 올라가 맹렬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괜한 걱정이었어. 아유카는 속으로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열렬한 신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계가 사방으로 발산하는 끔찍한 불빛이 그들의 얼굴 위로도 얼룩덜룩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가라, 가!”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치는 남자들. 선두에 선 기수처럼 맹렬하게 내달리는 늪 위의 신…….
“시, 시게루 씨….” 아유카가 가느다랗게 헐떡거렸다.
물론 아카기는 듣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작아서, 너무 희미해서, 너무 불안정해서 들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쇠구슬이 미끄러졌다. 빠르게 좁은 통로를 타고 굴러가는 그것이 불만족스럽게 포효했다. 저게 마지막이리라. 그가 정복할 것이다. 기어코. 아유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손바닥 안으로 꽁초를 말아 쥐었다. 뜨겁고 아릿한 감각이 쇠구슬처럼 피부밑을 침투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追沼 愛結日의 沼가 누마-늪이라는 데에서 착안하였습니다. 설정 및 설계가 다르지만,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본편에서 나오는 파칭코 기계 <늪>에서 아이디어를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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