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사이의 미지수 3
따분한 자유시간을 같이 보낼 사람이 먼저 자신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순무는 성도의 유적인 두 개의 탑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누는 그를 데리고 내일 다 같이 가서 볼 두 개의 탑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미리 보면 재미없지 않겠느냐 물으니 내일은 자유 시간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하고 꽤나 맹랑한 대답을 한다.
"이 길이 다 단풍나무라서 가을에 오면 괜찮아요."
쭈욱 멀리까지 뻗은 길을 따라가며 그렇게 말하자 순무는 고개를 들고 나뭇잎들을 훑어본다. 나누는 순무가 걸어가면서 다른 이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곁눈질로 동태를 살폈다.
"가을이 아닌 게 아쉽네요."
고개를 나누 쪽으로 돌린 순무가 웃으며 말했다.
"봄에도 붉은빛이 돌긴 하지만 가을에 보는 것만 못하죠."
얼룩덜룩 물든 단풍나무들 아래 그늘이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을 걸으며 사소한 대화를 했다. 따스한 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머리칼을 휘젓고 사라진다.
"교사가 되어서도 성도에 올지 몰랐어요."
성도로 온 것이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나누의 말에 순무는 풉 웃었다.
"저도 호연으로 발령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걸요."
나누는 자신과 달리 순무가 그의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을 떠올리자 이런 사소한 것도 정반대인 점이 묘하게 우스웠다. 어울리지 않는데 남들을 뿌리치고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북서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낮고 시커멓게 굳어버린 탑에 가까워진다. 이미 많은 관광객이 난간에 들러붙어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떠들며 탑을 보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자 순무의 입에서 오, 하고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늘 봐온 것이기에 나누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탄탑과 방울탑은 좌우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둘은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 섰다. 순무는 정말 불에 탔다며 순수한 감상을 내뱉었다. 나누는 단순히 불에 탄 유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연다.
"저 탑이 불에 탄 이유는 성도 지방의 전설에 나와요. 성스러운 존재가 탑에 살며 성도를 수호했는데, 사람들의 욕심과 다툼으로 인해 탑이 불에 타버렸고 그러자 그 존재…… 수호신이 탑을 떠났다고 해요. 사람들이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 탑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저기, 방울탑이에요."
나누는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오고 배워온 전설에 대해 설명했다. 몸을 틀어 유난히 번쩍거리는 방울탑을 보면 순무도 그를 따라 같은 방향을 쳐다본다.
"그럼 원래는 불탄탑이 방울탑이었겠네요."
흥미로운 듯한 순무의 말투에 나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라진 수호신은 어떻게 됐을까요?"
나누는 여태 생각해본 적 없던 것에 대해 머리를 굴린다.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고서 자신의 상상을 정리해본다.
"사람들이 잘못한 걸 깨닫고 새 탑을 지어도 돌아왔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사람들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수호신이 사라지자 서로 더 싸웠을 수도 있고."
"아하. 수호신은 왜 그랬을까요?"
나누는 약간 곤란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뒤통수를 긁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더는 성도를 수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않았을까요. 자기들끼리 싸우는 꼴 보면 그렇겐 못 하죠. 사람들 때문에 살던 곳도 잃었는데."
어렵게 생각해낸 대답이었는데 순무는 풉, 하고 웃었다. 아까도 이렇게 웃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을 수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냉정하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순무가 과장하여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누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떤 말을 해도 순무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길어지면 피곤하고 귀찮기에 순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은 채, 나누는 어릴 때부터 봐 온 탑을 오랜만에 감상한다. 위는 깡그리 타버렸고 아래는 겨우 모양새만 갖춘 터가 남아있다.
"비가 오면 탑은 어떻게 될까요?"
"나무로 만들어졌다 보니 위에 가림막 같은 걸 친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러니 수백 년 동안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거겠죠."
한참 후, 이제 지루해졌는지 순무가 저기로 가 볼까요? 하고 먼저 나누를 이끌어 방울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울탑은 어떤 곳이냐고 묻자 외관은 번쩍거리지만 불탄탑 만큼 대단한 전설이 없다고 대답한다.
"우와, 되게 반짝반짝 거리네요."
"수호신이 돌아오길 바라며 새로 지은 것이니 당연히 멋지게 지었겠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글쎄요, 어디까지나 전설이라 이런 거 안 믿어요."
봄기운에 나른해지는데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자 저절로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고 대충 대답했다.
"오랫동안 지방을 수호했는데 정말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없잖아요."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즐겁게 말하는 순무에게 한 번 눈썹을 찡그린 나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수도 있죠.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니까요."
"선생님 생각도 궁금한데……."
그 말에 넌더리가 난 나누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순무의 입을 다물게 한다.
"죄송하지만 좀 피곤해서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아, 알았어요."
순무는 말을 길게 하지 않는 나누와 시덥잖은 의견을 주고받은 것에 기분이 좋았다. 피곤하다는 그를 놔둔 채, 말없이 작은 미소를 띠고 몇 걸음 더 나아가 화려하게 빛나는 방울탑을 살펴본다. 둘은 봄바람과 푸르른 하늘, 사람들의 말소리 속에 조용히 배경처럼 녹아들어 간다.
바람에 찰랑거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까만 머리칼의 한 걸음 뒤에 떨어진 나누는 순무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런 고리타분한 유적지가 정말 재밌기라도 한 건가? 순무가 성도 지방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순간적으로 놀란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딱히 애정이 없는 곳인데.'
인주시티는 물론 성도나 호연이나 그에겐 어느 곳이든 큰 의미가 없었다.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성격이기에 자라온 집마저 살다가 어른이 되면 떠날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순무가 성도 지방에 와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라 발자취를 남겼던 곳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까지 한 것이다. 실제로는 와서까지 지루한 질문을 쏟아냈다.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찰나, 순무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나누를 보며 다른 곳도 가보자고 하길래 나누는 잠깐 생각한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순무도 허둥지둥 그를 쫓는다.
"어디 가요?"
"저쪽으로 가면 호수가 있어요."
둘은 다시 가로수길을 걸어 나와 동쪽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도착해보면 어린아이들이 난간을 붙잡고 호수 안을 살피고 있다. 사람들 틈새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고개를 내밀면 잉어와 같은 어류들이 하늘을 담은 물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말 재미없다고 생각한 나누가 고개를 돌려보면 순무는 난간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고 있다. 물고기들이 동전을 삼키면 위험하므로 동전을 던지지 마세요, 물고기용 먹이도 주지 마세요, 호수에 들어가지 마세요. 호수에 대한 소개보다 하지 말라는 조항들이 더 많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그런 것들 하나하나를 진지한 표정으로 보는 순무가 웃겨서 넌지시 말을 걸어 보았다. 순무는 고개를 돌리고 평소대로 익살스러운 얼굴이 된다.
"재밌지 않아요? 누가 봐도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데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잖아요."
"그런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나 보죠."
별 게 다 재밌네, 하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둘은 호수만 보기 시작한다. 볼 것이 없는 평범한 호수였기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금방금방 자리를 떠나 다른 것을 구경하러 간다.
'확실히 입을 닫으니 따분하긴 하네.'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곳에서 나눈 시덥잖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순무와 그런 대화를 해서 재밌었다고 생각하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가 지어진다. 이상한 부분에 집중하는 점이나 재미없는 질문을 하며 나누의 의견을 구하는 점들이 학교 학생들 같아서 귀엽게 다가올 정도다. 슬쩍 보면 지금도 그는 눈을 굴리며 호수 속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감정도 풍부하고 장난도 잘 치고 남의 같잖은 의견도 존중해 주고…….'
이런 사람과 사귄다면 매일매일이 즐겁겠지.
나누는 한순간에 굳어버린다.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서 든 생각인데, 그럴 터인데 타인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 나누는 웃음을 거둔다.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게 이상하다. 왜 연애 대상에 중점을 두고 생각한 걸까?
정답을 알고 싶지 않은 문제에 얼어붙은 채 호수만 쳐다보자 순무가 표정이 안 좋은데 괜찮냐고 묻는다. 나누는 고개를 홱 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썩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다. 늘 마음속에 있던 순무에 관한 느낌들이 갑작스레 변한 것이다. 단순히 따뜻하고 좋은 사람에서 무엇이든 함께 하면 더 좋을 사람으로.
어떤 것이 계기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이서 함께 돌아다녔다고 이런 감정이 생긴 것이라면 이미 학기 초부터 결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혹감에 고개를 숙였다가 순무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순무는 아직도 나누를 살펴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려 버린다. 잠깐 마주 본 얼굴엔 호기심이 그득해서 귀염성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점점 가슴 속이 쿵쿵대기 시작한다.
'정말 맞는 걸까.'
시선을 피한 채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마치 훈련된 것처럼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는 얼굴과 따뜻한 기운에 가슴 속이 꽉 차는 듯한 기분이 되긴 했지만,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적당한 친구가 되리라 결심했지만, 단순한 호감이라 여겼던 것이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런 게 아니었고, 이건…….
"선생님, 괜찮으세요?"
오늘 정말 부자연스럽긴 했다. 다시 순무 쪽을 보면 이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디 아픈지 묻고 있었다. 나누는 미소를 지으며 진짜로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순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나누의 팔을 붙잡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누는 깜짝 놀라서 괜찮다는 말만 내뱉다가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 싫어서 입을 닫고 따라갔다.
앞을 보면 척척 걷는 등이 어쩐지 커 보인다. 시선을 깔아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손등의 중수골과 핏줄을 보자 눈을 뗄 수 없었다. 항상 장난스럽고 순진하며 다정한 모습만 봐 온 나누에게 부각되는 야성미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책상에 앉아 책만 보던 자신의 것과는 골격이나 피부결부터가 달랐다.
손을 잡혀 이끌려 가는 것도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으므로 낯설기까지 했다. 그러나 팔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은 전에도 경험했기에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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