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그들 사이의 미지수 4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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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순무는 나누가 고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다. 정말로 관심이 없는 태도였지만 열심히 의견을 말해 주어서 속으로는 잔뜩 신이 났다.

그런데 잘 떠들던 나누의 안색이 갑자기 나빠진 것을 보자 걱정이 되었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오기라도 한 건지 굳은 표정으로 호수만 보길래 가슴이 덜컥거렸다.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하는데 어딘가 불편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가, 자신을 쳐다봤다가, 마주친 눈을 피했다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진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누가 아픈 거라 생각한 순무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저어쪽에 벤치가 보여서 다짜고짜 팔을 잡고 그쪽으로 이끈다. 나누는 괜찮다고 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운지 이내 얌전히 끌려왔다.

그렇게 딱딱하게 웃는 얼굴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억지로 괜찮다고 웃어 보이는 성의를 지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벤치에 앉힌 뒤 물을 사 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조급해져서 거의 뜀박질에 가까운 종종걸음으로 매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매점에서 생수병을 집어 들고, 사는 김에 두통약도 함께 계산한 뒤 급히 나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얌전히 벤치에 앉아버린 나누는 순무의 모습에 두근거렸다. 팔을 잡아끌고 가선 심각한 표정으로 물을 사 오겠다고 하는 모습에 박력이 있었던 것이다. 순무가 사라지고, 그에게 심하게 빠져버린 것을 인지한 나누는 어깨에 힘을 빼고 추욱 처진 자세가 된다. 고개를 위로 올리면 하늘은 속도 모르고 푸르게 맑기만 하다.

드디어 결코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의 미지수를 알아냈다.

'이걸 뭐라고 하지? 단사함수?'

그런 게 아니었고, 이건 사랑이었다.

'왜 좋아진 걸까…….'

이 학교에 와서 순무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천천히 떠올려본다. 개학 전에 봤을 땐 딱히 관심이 없었으나 알고 보니 나이도 같고 말도 잘 통하고 재밌는 사람이긴 했다. 초임이라 업무에 머리를 싸매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도와준 것도 순무. 매일 교문에서 장난처럼 아침을 시작하고 회식 때 빨리 탈출할 수 있도록 해 준 적도 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은 미소, 단단하고 따뜻한 손, 서글서글한 이목구비, 악의 없는 친절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배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인 만큼 호감을 가지기 쉬운 편이다.

'모르겠어.'

하지만 모르겠다. 지난 회식 날 그가 했던-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말과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고 있으면 다시 교무실로 찾아오던 날들이 자신에게만 있었던 일일까? 다른 사람에게도 베푸는 선의를 나도 받는다고 해서 애정으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넘겨버리고 싶어도.

"물 사 왔어요! 머리 아프신 것 같아서 약도 같이 샀어요."

"감사합니다."

"호연에서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셨나 봐요. 초임에다 중간고사 준비도 처음이셨으니 계속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럴지도 몰라요. 그리고 또……."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렇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더우세요?"

이런 것에 면역이 없기에 얼굴이 빨개진 모양이다. 나누는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순무를 쳐다보다가, 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지 생각하며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순무가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고개를 든 나누는 대답 대신 순무가 사 준 생수병을 열고 물을 마셨다. 약은 나중에 먹을게요, 하고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순무는 나누의 옆에 털썩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누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버렸기에 고민에 빠져 있었고 순무는 나누가 휴식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한참 후 순무가 고개를 돌리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마음을 깨닫게 된 나누는 순무를 더욱 의식했다. 감정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무표정일 때에도 옅은 미소를 머금는 버릇, 자신이 괜찮은지 수시로 확인하는 눈동자는 여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성도는 호연이랑 달라서 좋네요."

"……지방끼리 같이 붙어 있으니 비슷하지 않아요?"

"호연에서 태어나 직장도 호연이면 어디든 새롭게 느껴질 수밖에요."

그렇게 말한 순무는 벤치에 앉은 채 다리를 쫙 폈다. 나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허리를 곧게 편다.

"이제 어디 갈까요?"

순무가 눈을 빛내며 물어도 인주시티는 교육 목적으로 방문하는 관광지였기에 놀 곳이 그리 많지는 않다. 때문에, 학생들도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까 본 학생이 지금도 지친 얼굴로 둘의 앞을 지나쳐 가고 있다.

"재미없는 곳이라 저걸 보면 다 본 거예요."

나누는 고갯짓을 하며 탑들을 가리켰다. 순무는 과장해서 아쉬운 소리를 낸다. 처음 오는 성도 지방에, 나누의 고향인 성도 지방에 잔뜩 기대했건만.

"아직 집합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순무가 중얼거린다. 나누는 잠깐 생각에 잠긴다.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바다가 나오는데, 여기보단 작은 규모의 도시지만 꽤 좋은 곳이 있었다. 바다가 어울리는 순무와 그곳에 가고 싶어진 나누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다.

"그럼…… 옆 도시로 가보실래요?"

"네?"

"여기서 쭉 걸어가면 바로 나오거든요. 산책로랑 이어져서 멀지 않아요."

"당장 갈래요!"

대답을 한 순무는 기운차게 일어섰다. 순무의 반응에 만족한 나누도 천천히 일어나 함께 서쪽으로 향한다. 호수를 뒤로하고, 계속 걸어서 탑을 지나 오월의 나무들이 울창한 길을 따라 걷는다.

순무는 '38번 도로'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쌩하니 지나가기도 한다. 정말로 나무와 풀밖에 없지만 잘 닦인 길에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오자 은은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길이 편해서 좋네요."

"그런가요?"

"저는 용암마을에서 자랐거든요. 아, 용암마을은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혹시 나누가 알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온천으로 유명하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러나 나누는 아직도 호연 지방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순무는 조금 아쉬웠으나 손짓까지 하면서 설명한다.

"굴뚝산 아래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정상까지 가서, 다시 마을까지 걸어서 내려와야 해요. 안 그럼 갈 수가 없어요."

"노인분들도 많이 찾으실 텐데?"

"굴뚝산이 활화산이라 쉽게 공사를 못 하거든요."

"힘들게 자라셨네요."

"그러니 여기 길이 편해 보일 수밖에요."

나누는 전에 천방지축이었다고 한 순무의 말을 떠올렸다. 유난히 더운 호연 지방의 산을 누비던 꼬마가 지금은 다 커서 모두가 좋아하는 의젓한 교사가 되어 있다니. 그것이 귀엽게 다가온다.

38번 도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아 곧바로 '39번 도로'라고 적힌 팻말이 나타난다. 여태 쭈욱 앞으로만 이어져 있던 길이 울창한 나무들로 막혀 있었고 대신 왼쪽으로 길이 나 있다. 둘은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 남쪽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순무가 매점에서 샀던 물을 나눠 마셨다.

남쪽으로 갈수록 희미하게 바다 특유의 냄새가 난다. 호연 출신인 순무가 예리하게 코를 킁킁대며 바다가 있네요, 라고 하자 나누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나타난 곳은 항구도시인 담청시티. 순무는 아이처럼 감탄사를 내뱉고는 작은 주택 사이로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았다. 신나서 점점 걸음이 빨라진 둘은 서둘러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주택가를 빠져나오자 점점 가까워지는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숨을 들이면 짠내 섞인 묵직한 물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저기에는 등대도 있고 쾌속선을 탈 수도 있었다. 항구 쪽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사고팔 수 있도록 작은 시장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다.

"여기가 더 관광지 같죠?"

나누가 장난스레 물었다.

"가까운 거리에 분위기가 이렇게나 다르다니…… 앗, 저기 가 볼래요."

순무는 신나게 관광객들을 위한 매대가 늘어선 곳으로 달려갔다. 장사꾼들이 기념품이나 장난감, 간식, 지역 상품 같은 것들을 팔고 있다. 순무는 제철인 갑오징어를 바로 구워 주는 트럭의 매대 앞에 서서 나누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구수하고 달큼한 냄새에 이끌린 나누도 순무를 따라 하나 주문한다.

둘은 막 구워내 뜨끈한 오징어를 먹으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야무지게 먹어대는 순무가 있었다. 나누는 작은 웃음이 슬금슬금 삐져나오는 것을 참았다. 뜨겁다고 난리 치는 순무를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안 그래도 슬슬 출출할 때였는데. 맛있었어요."

정말로 만족했는지 신명나게 말한 순무는 손에 묻은 양념까지 다 빨아먹은 후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나누는 피식 웃으며 인주시티에 있을 때보다 더 들떠 보인다고 놀렸다.

"호연에도 항구 도시가 있는데 뭐라 할까, 거긴 관광객들보다 현지인들이 더 시끄럽잖아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여기는 나누처럼 차분한 느낌이 있어서 좋다고 덧붙인다. 나처럼? 나누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돌려 바다를 보았다. 낮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점점 두근거림이 가라앉는다.

둘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본다. 순무를 좋아한다고 깨닫게 된 마음은 지금 이 바다만큼 넓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를 일 없이 가끔은 거센 파도가 넘실거리며 어지럽혀도 곧 잔잔한 운율로 돌아올 것이다.

'교무 부장님이 문젠데.'

나누의 앞에는 큰 벽들이 있지만 권수의 존재도 작지는 않다. 그를 이겨먹을 자신감이 없어 살짝 고개를 틀어 순무를 보면 올곧은 눈빛으로 바다를 보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구나. 언제나 바른 태도로 앞만 보며 나아가는 이 사람을. 안심이 된 나누는 다시 시선을 되돌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유영하는 갈매기들의 움직임을 쫓는다.

순무는 몰래 이탈한 것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규칙을 어기고 들뜬 것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이 있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않은데, 그런 것에서 신이 났다. 그리고 함께한 사람이 나누라는 점에서도.

바다는 언제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말없이 끝없는 지평선을 보자 낯선 도시에 왔다는 설렘이 점점 차분해진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건 따분했기에 나누를 부추겨서 등대 쪽으로도 구경을 하러 갔다. 낚시하는 작은 배들을 바라보기도 했고 호연의 바다와 이어져 있을까, 하는 어리숙한 생각도 해 보았다.

바다 구경을 잔뜩 한 둘은 집합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서둘러서 돌아온 길을 걸어 인주시티로 향했다. 먼 길을 온 데다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머리도 굴리고 걷기도 한 나누는 아직 팔팔한 순무와 달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역사를 전공한 담임 교사가 열심히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려 했지만 나누는 손사래를 치고 잠을 잤다.

노곤한 상태로 가장 마지막에 버스에서 내린 나누는 기지개를 켠 뒤 숙소로 가는 담임 교사의 뒤를 따라갔다. 숙소는 이름만 호텔인 그저 그런 낡은 건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겪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 모두가 모인 호텔 앞마당에서 주변을 살짝 둘러보며 순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지금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줄 맞춰 서느라 출발할 때와 같이 정신이 없었다.

1반부터 차례로 입구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린 뒤 부담임이 꼭 필요한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떠드는 아이들과 함께 호텔 입구로 들어서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학년 지도 교사 순무가 다들 안전하게 잘 들어가고 있는지 호텔 입구에 서서 확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를 발견한 나누는 갑자기 굽은 허리를 펴고 걸으며 순무 쪽으로 눈동자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바람대로 눈이 마주쳤고, 순무는 눈짓으로 웃으며 나누와 인사했다. 그를 지나친 나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교사들용 객실로 향해 갔다.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휴식 시간이었다. 나누는 짐가방을 내려두고서 일찍이 와서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있는 남교사에게 이 객실에는 어느 교사들이 있는지를 물었다. 담임과 부담임이 뒤섞인 교사들용 객실 중에서 아쉽게도 순무는 이 방에 속하지 않았다. 뭐든 처음으로 하는 1반과 함께 선두에 서서 학생들의 안전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1반의 교사들과 가까운 것이 옳았다.

왜 자신이 속한 반이 1반이 아닌 건지 아쉬운 마음을 담고서 흡연 구역에서 담배나 피울 요량으로 몰래 챙겨온 담배와 라이터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 모습을 권수가 봤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권수가 없기에 해방되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주머니에 슬쩍 넣는데 이미 주머니에 있던 것이 손가락에 닿는다. 뭐가 있었나? 하고 주머니를 뒤져서 꺼내 보면 그것은 순무가 사 주었던 두통약이었다.

나누는 그것을 손에 들고서 멍하니 쳐다보며 다른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제 담배를 피울 생각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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