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소원이 염원이 될 때

베인밀레

푸른빛 약속 by 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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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x여밀레(드림주)

*스포일러 요소 : 마비노기 C7 - 아포칼립스 전반

크레페 킹정 님 (@LEROY_YI_GONGZUU)  커미션 작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지, 꿈은 심장이 피워내는 소원의 꽃이라고. 

베인은 그래서 생각했다, 자신의 꿈은 무엇일까, 하고. 

평화로운 삶? 인생의 끝? 도대체 범인들은 어떠한 꿈을 꾸는가? 그들은 무엇을 신에게 비는가, 자신은 어떤 것을 긍정하는가? 그리고 그 간절한 원에, 카야는 속하여 있는가?

세계는 돌고 돌며, 그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에 종지부가 찍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하루 빨리 결말을 맞이하고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좋겠노라고. 그렇지만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놓인 개미마냥 그는 움직이고 움직였지만 커튼콜, 을 맞이할 일이 좀 처럼 없었다. 그래, 정말이지 제게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쉬세요, 라 말하는 사람은 전무했다. 밀레시안의 손에 영원한 수면과 평화를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샤가 분명히 저를 안식에 빠지게 하였을 텐데도, 눈을 깜빡여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는 채였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이샤의 동행자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악몽이라 불러야 하는지 춘몽이라 불러야 하는지 명칭조차 분명히 않은 게 제 현실이었다. 그래서 베인은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떼우며' 카야와 함께 하루하루 발걸음을 내딛었다. 언젠가는, 카야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리 살다 진실이 공개되면 얼마나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될지 알면서도. 그것은 일종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선택이었다. 아니, 아주 큰 이기심이 제 귀에 속닥여 왔었다, 이리 소꿉놀이를 하면 인생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순간들이, 조금은 찬란하지 않겠느냐고, 그녀의 인생에 자신이 큰 흠을 남기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겠어? 라고. 

그래서 그는 오늘도 그녀를 기다렸다, 종이를 접으면서. 이곳은 쉬어가는 차원에서, 재충전을 하고자 들른 마을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녀는 진상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러니, 저들이 갈라서기 얼마 전, 함께 보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날들 중 하루가 오늘이었다. 

카야는 마을의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고 싶다고 나갔다. 이곳의 아이들은 밀레시안을 무척이나 따랐고, 그녀를 누나, 언니라 부르며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밀레시안 님처럼 되고 싶노라 그들이 말할 때 그는 그 길이 얼마나 고되고 험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 말하는 그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불쌍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짐을 짊어지고 싶어하지 않을 터인데, 가혹한 이 세계의 전면을 알고 난다면. 

금방 다녀올게요, 라 말하고 그녀는 자리를 비웠었다. 텅 빈 방의 식어가는 온기와 함께 그를 두고 말이다. 탁자 위에 놓인 책들은 거의 다 아동용이었다. 하루 만에 전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한 내용을 지닌 책들. 드래곤은 금화를 바라고 왕자는 공주를 원했으며 왕은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꿈꾸었고 마녀는 저를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드래곤은 기사에 의해 죽었고 왕은 성난 백성들에게 끌어내려졌으며 마녀는 만 년이 넘게 미움받았다. 

소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어찌되었든 생각에 불구하니까. 그러나 소원을 행동에 옮기려 하면,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불공평했지만 그게 세상의 이치라고 그는 카야에게 말했다. 카야는 세상살이는 꽤 차가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늘 불행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라 응수했다.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았기에 건네 온 말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고 그는 목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했다. 

불행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요? 소원도 소원 나름이라면 이루어질 수 있지 않나요, 이럴 때 보면 베인 씨는 꽤 비관적이기도 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세상을 미워하실 필요는 없는데. 미워하시는 건지, 세상에 미움을 받으셔서 마음을 접으신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둘 다, 너무 슬프잖아요. 

혹시 소원이 있는지, 둘이 겸상을 했을 때 그의 질문에 그녀는 흔쾌히 답했었다. 평화와 안정, 타인의 행복, 즐거운 모험, 동지들의 밝은 미래 같은, 자신을 위한 답변은 하나도 없는 대답들을 듣고 있던 그에게 그녀가 손뼉을 부딪히며 말했던 것 같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같이 놀러 가고 싶어요, 베인 씨. 모든 일이 끝나면 말이죠, 귀찮으시다면 괜찮지만. 그녀의 원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그리하지, 라는 답변은 거짓이었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괜스레 그녀에게 또 하나의 비수같은 기억을 남겨 버린 게 아닐까, 후회는 한 걸음 늦었다. 그녀가 방 한 켠에 앉아서 저를 회상하며, 거짓뿐인 이, 제게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남긴 잔인한 치, 라 회상해도 할 말은 없으리라.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백사장을 거닐고 싶었다. 조개 껍데기를 주우면서 이 소라에서 바다의 소리가 들린다고 얼토당토없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모래성을 쌓고, 파도가 오기 전에 무너뜨리고, 맨발로 모래를 밟으면서 눈이 따가울 정도로 쨍한 햇빛을 만끽하고 싶었다. 덥다는 그녀의 투정을 들으면서 부채질도 해 주고, 입안이 얼얼하도록 차가운 디저트를 나눠 먹고, 하늘을 수놓는 밤의 불꽃놀이를 구경하며 잠에 들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 베인과 카야로 시간을 떼우고 싶다면, 이 또한 이룰 수 없는 소원이겠지, 나한테도 그녀한테도. 

소원을 쭉 적어 볼래요, 여유로울 때. 저보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이샤가 고개를 돌려 씩 웃었고 그는 그리하지, 라 말했었다. 그때 이샤는 끝내 아무것도 적지 못했던 것 같다. 이샤는 과연 소원을 이뤘을까, 적을 수나 있었을까. 

카야가 그래서 제게 소원을 쭉 적어 볼래요, 어때요? 라 물어왔을 때 그는 고개를 저었었다. 어차피 적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으니까 상관 없어요, 그렇게 말했지만 괜찮았을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의 소원 중에 자신이 있다면, 그가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지 못할 때, 카야가 글자들을 읽어 내리며 배신감에 치를 떨고 스스로를 탓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줄여 말하자면 또 하나의 이기심이었다. 

그는 한 자 한 자, 충동적으로 적어 내려갔다. 요리를 해 보고 싶다, 복잡한 요리를. 명소라 불리는 곳을 눈에 담으며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 네모반듯한 집을 짓고 그 곳에 뿌리를 내려 살아 보고 싶다, 그 작은 집에서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하며 작은 동물을 키워 보고 싶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도 빌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옆에, 카야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보는 그런 삶을, 한 번쯤은 살아 보고프다면. 아이의 울음소리는 듣기에 썩 좋지 않다만 내 얼굴을 보면 울음소리를 딱 그치는 아이를 한번쯤 품에 안아 보고 싶다. 카야와 함께 ... 멎어 버린 펜 끝에, 어느새 번져 가는 잉크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실한 결론을 완성하지 못했다. 

카야와 함께, '살고 싶다'. 살아 남아서, 또 하나의 해가 뜨는 것도 보고 새하얀 달이 떠오르는 것도 보고 싶다, 이곳저곳 여행하며 수십 수백가지의 음식도 먹어 보고 싶다. 어느새 빼곡히 채워진 하얀 종이를, 그는 난로 속에 집어 넣어 부지깽이로 쑤셔, 활활 타오르는 불을 응시했다. 소원을 빌 수 있는 삶을,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자들은 참 운이 좋지. 춤추는 불씨 속에서 그가 적어 내려갔던 자잘한 원들은 타들어가, 어느덧 작은 알갱이들만 남았다. 부드럽게 경칩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카야는 볼이 빨갛게 물들어,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재밌었어요, 아이들도 귀엽고, 즐거웠네요, 그녀가 제 얼굴을 살피다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낯빛이 좋지 않아요. ...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별 일 없었다만..." 

"어디 편찮으신 줄 알았어요, 급체라도 하신 줄 알고..." 

"상념에 젖었을 뿐이니, 너무 심려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카야, 그대는 소원이라는 걸 이뤄 본 적이 있는지, 그의 물음이 꽤 갑작스러웠던 듯 그녀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아, 생각났다, 그녀가 중얼거리다 저를 바라보았다. 

있죠, 꽤 많이? 사람들을 구했으면 좋겠다는 소원도 이뤘고, 이 여정이 즐거웠으면 하는 소원도 이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면 한다는 소원도 이뤘고, 한 손으로 다 꼽지도 못할 만큼 많은 꿈을 꾸고 이뤘던 것 같아요. 바구니에 놓여 있던 빵을 한 입 베어물며 저를 보는 시선은 티없이 맑았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좋은 사람들, 에 자신이 빠져야 한다는 것조차 말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녀가 더 많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 정도는 신도 용납하겠지, 어떤 신이든간에. 베인 씨는 어떤 소원이 있으신가요, 이번에는 카야가 물어 왔다. 

"더 많은 소원을, ... 그대가 원하는 더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으면 한다는 소원이 있어." 

"그건 스스로를 위한 소원이 아니잖아요! 스스로를 위한 것은 없나요?" 

"그런 소원은, 괜스레 민망하니 보기 썩 좋지도 않고, 말하기도 남부끄럽거니와 나답지도 않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서. 그런 모습은 무언가 약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지 말고 한 번 빌어 봐요, 그녀가 요구했다. 지금 제 소원은 베인 씨가 저랑 함께 소원을 비는 거에요, 라고 말하니 어쩔 수 없었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중얼거려도 상관없지만, 민망하실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묻지 않을게요. 원래는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건데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눈을 감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그 모습을,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며.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눈을 감고 그는 사춘기 소년이라도 되듯, 수동적인 요구를 해 보였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그리해서 더 이상 저와 만나지 않기를, 앞으로 걸어나가며, 저를 잊고 잘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녀의 앞날에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묻지 않겠노라 손사래를 쳤었지만 결국 무슨 소원을 빌었나 캐묻는 그녀에게 그는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이런 소원은, 욕심이 아니라 해 주기를. 그러니, 꼭 이루어지도록 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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