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씨앗 하나가 두 번째 꽃을 피우길 기다리며

톨비밀레

톨비쉬x여밀레(드림주)

스포일러 요소 :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C6 신의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전반

히르키세님 커미션작입니다.


주신의 첫 번째 검이라는 이명답게, 남자는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웠고 올곧으며 동시에 단단했다. 이것이 그가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어서 사람의 모습으로 빚어진 남자는 다소 무뚝뚝할망정 매정하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의 형체를 하였지만 검으로서 행동하는 자가 바로 톨비쉬였다.

한없이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가 크게 무너진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미래를 엿볼 기회가 재앙처럼 찾아왔다. 생활상은 변한 부분이 있다지만 미래에도 이계신을 섬기는 무리는 여전히 온 에린에서 활개치고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톨비쉬와 연결되어 교감한 이마저 에린 외부에서 도래한 존재였다. 그나마 성정이 순하고 에린을 전복하려는 야욕은 없어 보였다는 점—실제로 그녀는 미래의 알반 기사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망연자실하게 톨비쉬는 성지를 봉인하기 위해 이미 목숨을 끊은 이들이 묻힌 무덤가를 방황했다. 이들의 죽음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었다. 고뇌 끝에 단장은 기사단을 두고 가시밭길에 올랐다. 흔들리는 불안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니도록 자아내진 남자는 붕괴하고 피를 토할 듯 울부짖었다. 끝이 없는 사막에서 그의 오열을 듣는 존재라고는 사람의 말을 모르는 사갈과 메마른 모래 먼지뿐이었다. 추태를 해명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 고독이 남자를 부서지게 하는 데에 일조했음은 더욱 자명했다.

시간이 흐르고, 톨비쉬가 썩어 문드러진 속을 포장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을 즈음. 정체를 숨기고 다시 알반 기사단으로 돌아간 그가 단원들의 신망을 받아 알반 엘베드 조의 조장이 되고 나자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샤 씨.”

기름칠이 되지 않은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굴러가기 시작한 순간을, 끝없이 이어질 미래에도 결코 잊지 못하리라고, 톨비쉬는 생각했다.

차라리 당신이 못된 사람이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샤에게 접근하여 알반 기사단의 협력자로 만드는 동안 톨비쉬는 내내 개운하지 못한 심정으로 착잡하게 그녀의 걸음을 지켜보았다. 교감할 당시와 다르게 축 처져 기력이 없던 첫 대면도 예상과 달라 당혹스러웠지만 구멍이 숭숭 난 사고방식은 더욱 참담했다. 이샤가 순순히 그의 인도대로 정보를 캐는 법이나 화술을 배우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떨떠름해서 톨비쉬는 내내 별러왔던 계획을 잠시 유예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톨비쉬는 교감 이후에 홀로 본 미래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모습이 달랐으나 이지를 잃고 에린을 불태우는 자는 분명히 이샤였다. 우아하게 휘날리는 하얀 옷자락과 눈을 가린 검은 깃털 가면, 금빛으로 불길하게 일렁이던 이계신의 신성 전부가 이샤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행자는 용서할 여지가 없이 흐트러뜨리고 처단해 마땅할 존재일 텐데.

 “이샤 님?”

톨비쉬는 제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있어서는 안 될 기척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옅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이름을 불렀다. 조장이라는 직위 특성상 방문자와 길게 이야기할 일이 있어 배치해 둔 소파 한구석에 숨을 쉬느라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생명체가 움찔 떨렸다. 빼꼼 고개를 들어 돌아온 방 주인을 확인한 이샤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조금만 신세 지게 해줘요, 응?”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서글서글한 태도로 질문을 툭 던진 톨비쉬는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가 등받이를 짚었다. 남자의 거대한 몸집이 위에서 드리워서 반쯤 갇힌 꼴이 되었어도 이샤는 주눅 드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불멸자 특유의 느슨한 위기의식이 이번에도 나태하게 늘어진 듯했다. 

“아직 벨테인 아이들 보고서를 쓰는 법을 잘 모르겠거든.”

오늘도 열심히 훈련을 따랐다, 늘 그랬듯 별문제 없이 잘 지낸다고 쓸 수는 없잖아. 서류작업이 익숙하지 않다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서 톨비쉬는 굳은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외에는…기대, 존경, 그리고 설렘을 비롯한 온정과 같은 부드럽고 따스한 감정들이 한 데 섞여 넘실거렸다. 불과 스무여 일 전까지만 해도 옅은 불안과 낙담이 들어찼던 자리가 비고 새로 채워진 감정이었다. 크로우 크루아흐의 제물이 되어야 했던 남자가 이리아의 상공에서 지워진 이후로 낙담하여 모든 감정을 잃은 듯 행동하던 이샤는 알반 기사단과 만나고 나서 조금씩 회복했다. 그와 동시에 일종의 동물적인 감도 되찾은 듯했다. 톨비쉬의 넉살 좋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전히 그를 믿지 못했다.

약해진 상태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임을 뼈저리게 체감한 불멸하는 여행자는 기댈 곳을 골랐다. 그러나 모든 고락을 순순히 공유하지는 못했다. 올곧고 모범적이라 타의 호감을 사는 기사에게 심적으로 의탁은 했으나 오랜 세월 칼을 갈아온 남자의 계획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변두리에서만 서성거릴 뿐이었다. 아예 본인도 선을 그어버리고 냉정하게 굴면 훨씬 편할 텐데, 타고 난 성정이 여린 탓이었던 걸까.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어오지 않으면서도 다정을 있는 그대로 조금씩 흘려보내는 그녀에게 톨비쉬가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긴 세월 세웠던 계획은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온 에린을 돌아다니며 바로 옆에서 본 이샤는, 도무지 낙원이 될 땅을 불태울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걸어온 시간이 무색하게 허물어진 톨비쉬는 결국 깔끔하게 인정했다. 주신의 첫 번째 검은 밀레시안 이샤를 결코 처단하지 못하리라. 

‘마지막까지 제가…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를 넘어 영생을 같이할 동반자가 될 것이다.

말을 내뱉은 상황은 급박하기 짝이 없었고, 그 탓에 숨기지 못한 진심이 고스란히 섞였다. 톨비쉬 본인도 말하고 나서 놀랐을 정도니 들은 이샤는 어땠겠는가. 전장인 것도 깜빡한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홀린 듯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도 그 순간에 이샤 안에서도 경계의 벽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톨비쉬는 예상했다. 

“확실히 이렇게 쓰면 그래도 더 공적으로 보이네. 고마워.” 

“하하하, 별말씀을요. 이샤 님을 만나서 저도 일할 힘을 얻는걸요.”

이전 같았으면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을 말에 마음이 실렸다. 톨비쉬는 말을 내뱉고도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샤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이샤에게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질 것인가. 또 어떤 감정이 그에게 돌아올 것인가. 찬찬히 손이며 뺨, 입매를 빠르게 훑던 톨비쉬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눈 색을 바꾸셨군요.” 

“응, 금방 알아보네요. 톨비쉬가 처음이야. 어때요?”

영혼의 창이라고 하는 눈동자는 이전과 같이 맑고 아름다웠으나 그 색이 달라져 있었다. 밀레시안 종족은 얼마든지 육체를 갈아치울 수 있으니 순전히 미용을 목적으로 휙휙 외모를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샤는 상당히 오랫동안 비슷한 외모를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눈동자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검은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떠오르는 상이 있었다. 

“새벽하늘 같군요.” 

“그래?”

간결한 감상이었으나 어쩐지 이샤는 무척 기뻐 보였다. 톨비쉬는 조용히 한 번 끄덕여 이샤의 반문에 긍정했다. 

“하늘을 생각하고 바꾼 게 맞거든. 그래도….”

어쩐지 겸연쩍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이샤의 시선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렀다. 톨비쉬는 끈기를 가지고 그녀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나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샤가 겨우 톨비쉬를 응시했다. 푸른 시선이 맞물려 얽혔다. 톨비쉬는 이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당신의 색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샤의 볼이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녹은 색으로 물들었다. 톨비쉬는 제 숨이 거칠어진 것을 깨달았지만 통제할 수 없었다. 가슴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열망과 소원이 간신히 흔적으로 남아있던 마지막 비정을 불태웠다. 

“제 눈동자 색이 마음에 드십니까?” 

“…응.”

무척이나. 거진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톨비쉬는 눈을 깜빡여 열감에 흔들리는 시야를 진정시켰다. 새삼스럽게도 깨달았다.

“영광입니다.”

주신의 첫 번째 검은 결단코 이 눈부신 이방인을 해치고 추방하지 못할 것이다. 목줄이라도 잡힌 듯 남자는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지그시 감았다.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할 순간이었다.

연모하는 상대가 꺾이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는 수준으로 표현을 끝낼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샤를 눈물로 눅눅하게 만든 놈이 다른 누구도 아닌 파괴자라는 점이 톨비쉬로 하여금 속이 불타게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샛별이 고통스러운데 하필이면 꼴도 보기 싫은 놈이 원흉이었고, 이로 인해 이샤는 평생 그를 기억하게 되었다.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되돌려줘, 응?’

안간힘으로 재활을 도우려던 톨비쉬에게 청천벽력처럼 이샤가 매달렸다. 톨비쉬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시간에 간섭하는 것은 아무리 주신의 장자라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능력의 문제를 넘어서 허가가 될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에린이 되감기고, 톨비쉬는 알반 기사단의 견습 기사로서 다시 시작했다. 이샤, 이제는 스스로를 카야라고 칭하는 그녀가 귀걸이를 줍고 알반 기사단과 접선하기까지는 제법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톨비쉬가 초대 단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방랑을 끝낼 때까지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다. 견딜 수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과 여정을 더 원활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톨비쉬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작성자, 알반 엘베드 조 소속 톨비쉬.”

조원이 된 톨비쉬는 오늘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어느 정도는 그가 의도한 대로, 알반의 이목을 끌게 된 카야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현재 그녀는 확장하기 시작하는 그림자 세계를 활보하는 중이었다. 카야는 이곳에서 에일리흐 왕국에 이름을 알리고 이후에는 신족의 왕을 만나 에린에서 기원한 신성의 파편을 얻게 될 것이다. 전장에 선 카야는 이샤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본인의 의사나 적성과 별개로 이샤는 전장에서 제가 사랑하는 가치들을 늘 수호했기에. 흙먼지가 일고 검붉은 땅을 헤집으며 제 목숨마저도 무구로 취급하여 다루는 경이로운 모습은, 웬만한 감시역 기사들도 감탄하곤 했고 가끔은 비인간적인 면모에 두려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톨비쉬로 말하자면, 가슴이 뛰었다. 그 또한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존재였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가 그에게 익숙한 모습을 보이니 톨비쉬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것만 같은 은밀한 만족감 또한 찰랑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돌진하는 고르도슈 병사를 피해 카야가 땅을 굴렀다. 자세를 다시 바로잡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리는 충분했다. 고르도슈 병사가 방향을 틀었을 때는 이미 볼트가 발사된 후였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촉이 육신을 찔러 갈랐다. 절명은 한순간이었다. 톨비쉬는 어쩐지 서글퍼져서 굳게 다문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꾸욱 짓씹었다. 

같은 전장에, 같은 영혼이 서 있건만 다른 사람이었다. ‘이샤’였다면 직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석궁이 아니라 스태프를 쥐고 아이스 스피어를 비롯한 빙결 마법으로 적을 제압했을 것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그런가 하면 전투를 끝난 직후 흐름도 달랐다. ‘이샤’는 망설임 없이 아군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나섰으나 ‘카야’는 죽은 이들을 기리기라도 하는 건지 시신을 응시했다. 큰 맥락에서는 거의 동일한 행동 패턴을 보이나 세세한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입받을 때마다 톨비쉬는 아리는 가슴을 애써 달랬다. 다르지만 뿌리는 명실상부하게 이샤였다. 톨비쉬만큼은 이를 잊지 않았다.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그는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카야의 흔적을 따라가기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샤에서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 다시 시작한 반작용인지 카야의 시간은 선으로 흐르지 못하고 양손을 모아 옮기는 물이 새듯 점으로서 존재했다. 카야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지점이면 톨비쉬는 익숙하게 알반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고 뒤쫓았으며, 그만이 아는 이샤의 편린을 필사적으로 되새겼다. 

카야는 이샤였다. 비록 이샤와 쌓은 추억은 카야와 공유하지 못할 것이 되었다지만 톨비쉬에게는 제 삶의 방향을 뒤튼 변곡점이었기에 의미가 빛바래지 않았다. 인내는 그의 성정이었고 견디는 과정은 이골이 날 만큼 익숙했다. 그러니 괜찮았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만 괜찮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야만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야 씨. 알반 기사단의 톨비쉬라고 합니다.”

사실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톨비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혀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카야의 모습 위로 이샤가 겹쳤다. 걸어온 여정과 기억에 차이가 있어서인지 그녀는 조금 더 붕 뜬 분위기를 풍겼다. 전투 도중에 난입한 톨비쉬에게서 경계를 풀지 않았던 이샤 때와 달리 동그랗게 뜬 카야의 눈이 서슴지 않고 훑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시선이 이내 탄성으로 가득 찼다. 

“톨비쉬라고요? 당신 같은 눈은 처음 봐요! 지금까지 봐온 파란 눈동자와는 다르네요?” 

‘당신, 무척 인상 깊은 눈 색이에요.’

잿빛 이론으로만 되새기던 사실은 현실이 되어 톨비쉬의 앞에 새벽하늘의 색으로 펼쳐졌다. 톨비쉬는 떨리는 숨을 삼키고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다른가요?” 

“톨비쉬!”

옆에서 이미 반쯤 폭발한 아벨린이 노호를 질렀으나 톨비쉬는 손을 들어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의사를 표했다. 아벨린이 화를 내든 말든 실상 그다지 상관이 없었던 카야가 살풋 이맛살에 주름을 잡았다. 이는 배려하기 위해 조심한다기보다 자신의 심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표현을 찾기 위함인 듯싶었다. 

“꼭 하늘과 같은 색이에요. 비가 그친 뒤에 개인 맑은 하늘이요!” 

‘하늘을 생각하고 바꾼 게 맞거든.’

흐음. 톨비쉬는 일부러 엄지와 검지로 턱을 쓸어 모으며 뜸을 들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카야가 모르는 이샤의 시간을 진득하게 담아서 횡설수설할 것만 같았다. 

“제 눈동자 색이 마음에 드십니까?”

슬그머니 몸을 숙여 카야와 눈높이를 맞춘 톨비쉬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밤이 물러가기 직전, 여명을 담은 눈동자에 별빛이 반짝였다. 톨비쉬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아찔했다.

“네! 무척이나요!” 

“…하하, 이거 영광인데요?”

몸을 일으키고 톨비쉬는 환히 웃었다. 실로 간만에 가슴이 산뜻했다. 카야는 역시 이샤였다. 다시 시작하더라도 톨비쉬의 이정표가 되는 샛별은 여전히 찬란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이번 여정은 당신에게 덜 혹독하길. 알반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준비한 말을 기계적으로 읊으며 톨비쉬는 따스한 시선으로 카야를 보듬었다. 다시 시작하기에 새로이 쌓을 추억이 기대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새 추억뿐만이 아니었다. 덧쓰는 역사는 기존의 것과 똑같이 돌아가지 않았다. 톨비쉬 본인부터가 마음가짐이 달랐다. 이번에는 날을 세워 이샤를, 아니, 카야를 상처입히지 않으리라. 톨비쉬는 수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선 안에서 최대한으로 다정하게 카야를 대했다. 그럴 때마다 당황하는 아벨린이나 안절부절못하는 알터의 시선을 받았지만 정작 카야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알반 기사단 벨테인 특별조의 조장이 되고, 그녀가 아발론 게이트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다. 생활 반경이 겹쳤다. 마주칠 기회가 증가했다. 사랑하는 이의 원래 모습을 마주하는 횟수가 불어난 만큼이나 이샤가 아닌 카야의 고유한 향기 또한 짙어졌다.같은 영혼에서 기원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아도 다른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각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예컨대, 흩뿌려진 점과 같은 궤적으로 살아온 탓에 제 불완전성을 받아들인 카야는 이샤일 때에 비해서 더 솔직하고 발랄했다. 마치 후회를 남기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듯.그런 카야의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톨비쉬는 흔들렸다. 이샤의 시간에서 쌓았던 추억이 모두 허상인 것만 같았다. 지금의 에린에서 이샤의 흔적이라고는 톨비쉬의 기억이 전부였다. 그 어디에도 이샤라는 밀레시안이 시드 스넷타에서 귀걸이를 주워 여정을 시작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저 구경 중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톨비쉬 집무실에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났네요!”

카야가 환하게 웃었다. 톨비쉬는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잠시 겹쳤던 시선이 동시에 떨어져 전방으로 향했다. 굳게 봉인된 아발론 게이트가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문 앞에 섰다.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이 너머에 뭐가 있길래 선지자들이 그리 노렸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성지가 있다고 했죠. 에린의 성역이니 그들이 애타게 바랄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카야의 시간에서 그녀가 알반 기사단과 접선하고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으나, 고대부터 살아온 톨비쉬의 입장에서는 찰나에 불과했다. 이샤와 함께 아발론을 거닐었던 순간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연했다. 정갈한 신성력이 넘치는 땅에서 오가던 따스한 눈빛을 기억했다. 카야는 모를 추억이 따스한 세피아로 빛바랬다. 

“어떤 모습일까요? 성역이니 엄청 예쁘겠죠?”

봉인이 풀린 땅에는 꽃이 만개하고 새가 지저귀어 생명력이 넘칠 것이다. 그녀가 무슨 광경을 상상하는지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가서 톨비쉬는 맞장구를 치는 대신 슬며시 뒷짐을 지었다. 뱃속에 나비가 들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울렁거렸다.

톡, 톡, 톡. 가벼운 걸음으로 문에 접근한 카야가 문에 손가락 끝을 댔다. 혹여나 이변이라도 일어날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변화라고는 한 방울도 없었다. 쌓인 먼지를 살살 쓸어보고는 김이 빠졌는지 입술을 비죽였다. 문과 그 너머의 성역에서 흥미가 사라진 것이 명확했다. 

“그나저나 저를 찾으셨다고요. 혹여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응? 아니, 딱히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요.”

화들짝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카야가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혈색 좋은 뺨에 발그스름한 당혹이 비쳤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미약하게 벌어졌다가 다물리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톨비쉬는 저도 모르게 뒷짐 진 손을 지그시 주먹 쥐었다. 불편한 속이 다른 방식으로 휘저어지니 온도가 더해졌다. 

“그냥…톨비쉬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이샤도 그랬었다. 당시의 톨비쉬는 이샤에게 제법 선명하게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고백들은 바로는 비록 크게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으나 톨비쉬 자체가 올곧아서 믿을 수 있었다고 했던가. 톨비쉬의 태도와 별개로 그의 인격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제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네! 물론이에요!”

이샤였다면 할 반응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톨비쉬는 카야의 시원시원한 반응에서 이샤를 겹쳐 보았다. 그는 언제나 이샤에게, 그리고 카야에게 마음을 받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손가락 끝까지 짜릿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톨비쉬만큼 멋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담백하게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가 톨비쉬의 오감을 지배했다. 비록 그와 같은 형태가 아니라지만 어떠하랴. 카야의 호의였고, 존중이었으며, 애정이었다. 

“당신께 들으니 무척 기쁜데요. 감사합니다.”

톨비쉬는 진심을 담아 답하며 눈꼬리를 곱게 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부푸는 것만 같았다. 사랑에 목이 매인 남자를 마지막까지 손거스러미처럼 괴롭게 하던 고뇌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카야는 이샤였다. 주신의 첫 번째 검이 사랑해 마지않는 샛별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 함께 나아가기로 결심한 동반자였다. 그러니 문 앞에 서서 톨비쉬는 가만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에게 허락된 일직선이 적당한 시기를 맞이하도록. 그 순간까지 이 불안정한 샛별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길에 떨어진 가시넝쿨을 치워가며. 

“잠시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전할 게 있어서요.”

다시 한번 ‘최초로’ 성소에 발을 들이고 선지자와 키홀을 쫓아낸 직후에 톨비쉬는 제 격을 해방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한 알터가 카야의 앞을 가로막고 멀린이 외치는 사이에 카야가 일어섰다. 카야의 몸에서 서서히 광물이 돋아나고 이질적인 신성이 나풀거렸다. 아튼 시미니의 신성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였다. 톨비쉬는 바로 지금임을 깨달았다. 새로 찾아온 변곡점이었다.

그녀를 찌르지 않은 대검이 알터에게 공명하느라 모두의 주의를 끈 사이에 톨비쉬는 카야를 제외한 모든 이를 성소에서 쫓아냈다. 카야는 잔뜩 긴장하고도 톨비쉬가 다정히 어르자 물러서지 않았다. 이신의 모습이 된 카야의 가면에 톨비쉬의 가지런히 모은 유려한 손가락 끝이 살포시 닿았다. 영롱한 빛 방울이 검은 깃털 사이로 녹듯 퍼져나가 카야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가면 아래로도 찡그리는 표정이 보여 톨비쉬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돌려받은 기억에 혼란하지 않고 정리하는 데에는 정신력이 필요하리라. 침묵으로 가득 차는 성소는 호젓하고 평화로웠다. 

“…이 상처가 지금 생겼어야 하는 거였군요?”

정적을 깨고 나온 첫마디에 톨비쉬는 명치라도 제대로 맞은 것처럼 연거푸 기침했다. 이제 다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그만 그의 업보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뭐, 어찌하겠는가. 과거에 새겨졌으니 지울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잠시 걸으실까요?” 

“밖에서 다들 걱정할 텐데요.” 

“미리 전달해 두겠습니다.”

톨비쉬의 손짓 한 번에 응집된 신성력이 짙푸른 하늘색 연기가 되어 성소의 입구를 향해 냇물처럼 흘러 사라졌다. 알터는 검에게 선택받아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을 테고, 조장들은 반쯤 긴가민가 하면서도 돌봐야 할 상황이 많아 무리하게 진입하지 않으리라. 멀린 정도가 무모하게 행동할 법하나, 카야의 안정적인 신성도 더했으니 어느 정도는 참작해 줄 것이다. 

“질문이 많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톨비쉬의 전언이 담긴 신성력이 지나간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카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각기 다른 시간의 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눈빛이 단단하게 맞물려 얽혔다. 톨비쉬는 잠시 숨을 죽이고 카야의 기색을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여명이 번진 눈동자에는 원망과 증오 따위의, 톨비쉬가 고통으로 감내해야 할 감정은 비치지 않았다. 서서히 이신의 모습에서 밀레시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야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릿속을 정리하기 상당히 힘든 모양이었다. 

“그냥 되는 대로 말해도 돼요? 아무래도 조리 있게 말하기가 좀 힘들 것 같아서요.” 

“얼마든지요. 당신의 이야기라면 저는 언제든 기꺼이 듣습니다.”

톨비쉬는 에스코트를 요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땅에 가볍게 발을 디딘 카야가 스치듯 제 손가락을 올려 겹쳤다. 익숙한 온기가 맞닿은 살결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톨비쉬는 살며시 그 손가락을 잡았다. 

“이제는 정말 되돌리지 못하겠죠?”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괜찮지 않을 건 없는걸요.”

톨비쉬의 손을 놓고 몇 걸음 앞서 나간 카야가 춤을 추듯 스텝을 밟았다. 탁, 탁. 발자국이 상당한 폭을 공백으로 두고 점처럼 찍혔다. 노랫소리처럼 소녀의 음색에 가까운 목소리가 지저귀었다. 

“실드 오브 트러스트를 발현한 뒤로는 시간 여행을 하거나 망각한 적도 없고요.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는 생각했어요.” 

“망각 또한 축복이라고 하지요.” 

“그렇긴 한데…지금은 조금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요.”

카야는 분명히 망각을 기꺼워했다.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성소의 깨진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이리저리 즉흥곡을 연주하던 카야가 우뚝 멈추었다. 혼돈이 남은 시선이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지워져서 새로 써 내려가야 할 시간이 새벽에 스쳐 갔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었겠죠.”

아득한 시선이 톨비쉬에게 돌아왔다. 톨비쉬는 카야에게 다가갔다. 날개에서 깃털 하나가 팔랑거리며 날아가 카야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손가락으로 깃털의 단단한 심을 문지르며 뱅그르르 돌린 카야가 톨비쉬의 시선을 피했다. 

“베임네크가 계속 찾아오더군요.” 

“당신이 신속하게 궤도에 오르길 바랐으니까요, 그자는.”

남자는 저도 모르게 낯을 찌푸리고 말았다. 발로르 베임네크가 샛길로 빠지는 카야를 종용했다는 정도는 알반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감시하며 그 또한 이미 확인한 바였다. 

“그래도 베임네크의 의도가 잘못되진 않았잖아요?”

안다. 파괴자의 개인적인 바람과 별개로 흐름을 거스르는 행동도 아니었다. 그래도 톨비쉬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이샤를 무너뜨리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자가 하는 행동이 곱게 보이지 못했던 탓이었다. 물론, 일종의 자존심과도 같은 고집이기도 했다. 

“이샤.”

파괴자의 이름이 나오자 톨비쉬는 저도 모르게 조급해져서 샛별의 이름을 불렀다. 카야가 돌아보았다.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톨비쉬가 우뚝 멈추었다. 이름은 존재의 대표였다. 자신을 카야라고 지칭한 이 시간에서 원래의 이름을 불쾌하게 들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이 제가 예전에 썼던 이름이군요?” 

“…그렇습니다.”

카야가 미미하게 이맛살을 찡그렸다. 톨비쉬는 잠시 심호흡했다. 여태껏 그는 카야를 이샤와 동일한 존재로 여겨왔다. 이제 와서 카야가 반발하면 어찌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이 싫다는 이름으로 부를 생각도 없었다.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불편하십니까?” 

“아뇨…뭐, 굳이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겨우 얼굴을 편 카야가 도리질했다. 톨비쉬는 안도했다. 그녀가 지었던 표정은 불쾌의 발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이 아는 ‘저’와 지금의 ‘저’는 얼마나 다른가요?”

톨비쉬는 이 질문에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카야와 이샤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어디부터 다르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정도를 어떻게 측량할 것인가.카야는 톨비쉬를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을 요구했던 질문이 아니었던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기까지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톨비쉬는 카야의 앞에 섰다.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카야가 말을 먼저 걸길 기다렸다. 

“…있잖아요, 톨비쉬.” 

“말씀하세요, 이샤.”

한참을 홀로 골똘히 고민하던 카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던 표정을 찬찬히 뜯어 보던 톨비쉬는 즉각 답했다. 고개를 든 카야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에 덩달아 숙고했던 톨비쉬는 나올 말의 기원이 되는 마음을 눈치챘다. 

“뭔가 질문도 많고 감상도 엄청나게 쌓여있는데…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쏟아졌으니 그 양만큼 감정도 영혼을 잠식했으리라.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애걸했던 이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만큼 거대한 감정을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았으니 소화하기 힘들 것은 당연했다. 톨비쉬는 재빨리 손을 뻗어 카야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다 못해 삶의 기본자세가 된 남자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 다독임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카야가 살며시 기대왔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톨비쉬는 온기가 제 품에 들어온 지금만을 믿기로 했다. 이샤가 한 번 걸어갔던 길이 남은 만큼 초조할 수는 있으나 영원을 사는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당신의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안심하시고 원하시는 만큼 고민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카야의 옆에서 톨비쉬는 함께 할 것이다. 혼란에 빠져 의지할 곳이 필요한 그녀를 다독이며 남자는 다시 한번 굳게 결의를 다졌다. 카야 또한 이샤이니 불안해하지 않으리라. 사랑스러운 이 샛별의 곁에서라면 주신의 첫 번째 검은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걸어갈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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