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츄

[잇츄] 보름 1

이치사니

드림 by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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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츠사니 기반. 초기도이자 연인검인 무츠노카미가 파괴되었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 드림주의 지조나 모럴이 흐릿합니다.

- 불건전 주종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뭐든 괜찮은 분만…읽어주세요…….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이어진지 얼마나 되었을까.

몇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보고서를 읽던 남자의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 책상 근처를 밝히는 등불의 가냘픈 빛보다 눈부신 보름달이 세상을 비추는 가운데 제가 모시는 주군, 혼마루 토우린(藤霖)의 사니와인 유카리가 앉아 있었다. 종이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리고 입술을 앙다문 표정으로 글을 쓰는 모습은 책상 양쪽에 놓인 등잔의 불꽃이 일렁일 때 외엔 변화가 없었다.

슬슬 말릴 시간이다.

하나에 몰두하면 주변을 생각하지 않는 주군의 성미를 떠올린 이치고는 자료를 그러모았다. 당장 종이를 모아 책상을 두드린다면 종이에 박힌 은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겠지. 그러나 직후 시계를 돌아보고 당혹으로 물들 표정을 생각하면 그녀가 좀 더 일을 마무리하도록 시간을 주고 싶었다. 조용히 책상을 정리하던 남자는 문득 손을 멈추고 창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앞머리를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예감한 걸까? 창 너머 숲의 나뭇잎들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본 남사는 손에 닿는 서류 더미를 마저 쥐었다.

“주군.”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커튼을 밀치고 들어온 돌개바람에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들이 날아올랐다. 등불이 꺼지고, 천장 높이 날아간 서류들이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일련의 사고에서 비명이나 탄식 한 마디 지르지 않고, 여자는 멍하니 떨어지는 종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앞면에서 뒷면으로. 굽을 때마다 뒤집히는 어둠. 바람이 숲 군데군데 나무를 타고 자란 등꽃을 실어온 것인지 사이사이 꽃잎이 새하얗게 팔랑였다.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을 따라 시선을 넘기던 여자는 그 사이에서 제 근시를 발견했다. 겨우 지켜낸 반절의 서류를 들고 있는 사내와 시선이 맞자 작게 웃었다.

“오늘은 그만해야겠네.”

“하늘이 보다 못해 들어가서 쉬라고 바람을 일으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 후 서류를 줍는 유카리를 이치고도 도왔다. 난리에 비해 날아간 서류가 떨어진 위치는 단순했다. 근시가 서류를 줍고, 사니와가 서류의 순서를 맞추고. 굳이 입 밖으로 지시를 내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 호흡 덕분에 수습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몰랐네. 미안해. 늘 늦게까지 일하게 만들어서."

"개의치 않습니다. 주군께서 집중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괜히."

"그래도…. 퇴근 시간이라고 말이라도 꺼내주지. 피곤하지 않아? 열중도 좋지만 과로는 금물이라고?"

“하하,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대침구 후. 사니와 유카리의 혼마루, 토우린은 수복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에는 사니와 혼자 업무를 보고 근시는 일정 시간 사니와의 경호와 업무 보조를 하는 정도였다면, 혼마루의 일손이 크게 줄어든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재액신의 영력이 기반인 사니와의 특성 때문에 단도나 현현을 자주 시킬 수 없어 혼마루에 있는 검은 4부대도 간신히 편성할 인원이었다.

"단도에 소질이 있었다면 쉽게 안정되었을 텐데. 이치고도 쭉 근시 맡느라 힘들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주군을 보좌하는 것도 제 사명이니까요."

언제라도 맡겨달라며 가슴에 손을 얹는 이치고를 보며 사니와가 쓰게 웃었다. 요시미츠의 유일한 태도인 이치고 히토후리. 그가 휴일도 사양하고 자진해 업무 보좌 겸 전속 근시를 맡아준 덕분에 시름이 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의지해도 되는 걸까? 싫은 내색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가신을 보며 사니와는 걱정에 휩싸였다.

'이치고나 모두를 위해서라도 하루 일찍 혼마루가 원래 힘을 되찾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이치고는 먼저 보내고 자신은 더 일하는 게 어떨까? 1~2시간 정도 덜 자는 건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같이 퇴근하는 척하고 방에서 씻고 나온 후라면 의심 사지 않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사니와가 책상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이치고가 물었다.

"내일은 몇 시부터 시작일까요?"

"오늘이 토요일이지? 내일부터 실버위크네."

마침 연휴다.

휴일도 반납하고 늘 열심인 다른 검과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집무실에 갇힌 이치고에게 조금이라도 휴식 시간을 주고 싶었다. 이치고가 상냥한 검인 것은 알고 있지만 속마음을 쉽게 비치지 않는 탓에 사니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괜찮은 걸까? 매일 늦게까지 무리하는 건 아닐까? 제대로 된 대화 없이 서류만 들여다보는 요즘이 외롭지 않을까?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들키긴 싫어 사니와는 부러 산뜻하게 답했다.

"오후 1시부터 어때? 오늘 열심히 했으니까 하루 이틀은 숨 돌려도 괜찮지 않을까? 연휴 동안은 결재도 올릴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내일 오전은 푹 쉬자."

"감사합니다. 부디 다른 일도 빨리 마무리되면 좋겠지만요."

"그러려면 푹 쉰 만큼 내일 오후에 열심히 해야겠지?"

창문 문단속까지 마치자 사니와는 옷걸이로 향했다. 일과가 끝나면 그날의 근시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같이 나가는 것이 집무실의 일상이었다.

오동나무와 접시꽃을 본뜬 문양이 장식된 남색 케이프와 붉은 휘장은 이치고의 상징이다. 셔츠 차림으로 업무를 보는 이치고도 좋지만, 정복을 갖춰 입은 이치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근사하다. 손수 단추 하나하나 챙겨주고 제 손으로 목깃까지 반듯하게 차려입은 검을 보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지.

허나 이치고가 사니와를 멈춰 세웠다.

"주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몇 시에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요새 잠이 안 와서 한두 시간쯤 후에?”

속셈이 들킨 걸까, 당황한 속내와 다르게 사니와는 태연하게 답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올려다보니 사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개의치 않으시다면 휴일을 맞아 시중을 받들고 싶습니다."

"시중?"

“지나가다 들은 얘기입니다만. 주군께서 절 불편해하신다고 들어 ‘안주상이라도 마주한다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여.”

그 말에 사니와는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이치고가 현현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휴일, 고코타이와 대화였다. 이치고가 옆에 있으면 굳는 것 같아 보인다는 질문에 답했던 말이었던 것 같은데 당사자가 듣고 있었을 줄이야.

“한 지붕 아래 살다 보면 비밀을 숨기기 쉽지 않은 법이지요.”

손님 접대는 술로 해야한다는 철학에 맞춰 사니와는 집무실 협탁을 위스키 바처럼 쓰고 있었다. 이치고가 협탁 위의 위스키를 들며 허락을 구하자 사니와는 난처해하며 시선을 굴렸다.

"조금 갑작스럽지 않아?"

"싫으신 건가요?”

갑작스럽기를 넘어서 단둘이 술이라니 부담스러운 부탁이다만 유카리는 사뭇 거절하지 못했다. 늘 수고하는 근시의 바람을 단칼에 자르기 곤란했던 것일까? 한참 고민 후 그녀는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 무슨 얘길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러네요. 우선 날씨 이야기부터 할까요?”

등불을 켜지 않아도 방 안 가득 들어온 달빛에 안이 환했다.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마지못해 고개를 드니 책상 위에 잔을 놓고 술을 따르는 이치고가 보였다. 그와 단둘이 마주한 잔에 채워지는 술잔이 이질적이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치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최근 주군께서 여유가 없어 보이시기에. 그날 이후 하루도 쉬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

"길이 먼 만큼 한숨 돌리고 가는 것도 중요치 않을까요?"

그 순간 사니와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까? 단둘이 얘기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며 우물거리던 입술, 서류가 날아가던 모습을 쫓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짓던 눈웃음과는 다른 표정을 이치고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바람조차 들어오지 않은 집무실에 무겁게 깔린 공기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무엇을 고민하고 헤아리고 있을까. 잔 속의 보름달을 내려다보던 사니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하는 시선. 조금 전까지 곤란한 척 우는 소리를 내던 여자는 정작 침묵 속에서도 이치고의 샛노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콧잔등을 덮는 길이의 앞머리, 오른쪽 뺨의 점, 왼쪽 눈에 이어진 삼각형 모양의 점, 가느다랗지만 심지 있는 눈썹, 힘을 풀어도 꼭 다물린 입술. 끊어질듯 말듯 팽팽하게 늘린 거미줄 같은 시간 속. 이치고는 집무실에서 늘 보던 사니와의 무표정을 떠올렸다. 지금과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뚫어져라 살펴보는 것이 보고서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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