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루크, 정말 괜찮겠니?
2022.02.22 드라루크와 드라우스
드라루크, 정말 괜찮겠니?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드라루크는 뒤돌아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버지. 200살이 넘은 흡혈귀에게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독립을 하겠다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안절부절 하지 못 한 드라우스는 기어코 드라루크를 붙잡았다. 드라루크,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아버지. 드라우스의 말을 뚝 끊어낸 드라루크가 웃었다. 그 웃음을 보던 드라우스가 걱정이 한가득 담긴 표정으로 마지못해 물러났다. 그러면 아빠는 이만 가보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연락하고. 네, 안녕히 가세요. 드라우스를 배웅한 드라루크는 박쥐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발걸음을 돌렸다. 커다란 성의 문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흡혈귀와 한 마리의 독립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드라루크는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CLEAR라는 글자가 번쩍이고 있었다. 시시하군. 문득 바라본 창밖은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나. 뻐근한 손목을 한 바퀴 돌린 드라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존을 안아 들었다. 슬슬 자러 갈까. 누! 활기찬 대답에 존을 쓰다듬는다. 작게 울며 손에 얼굴을 부비는 존이 사랑스러웠다. 이번 게임도 크게 재밌지는 않았군. 다음에는 무슨 게임을 해볼까. 남은 게임들도 다 해가니까... 새로운 게임을 살 필요가 있나. 내일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존에게 인사를 한다. 좋은 꿈 꿔, 존. 누누누누누, 눈! 그리고는 관 뚜껑을 닫는다. 익숙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는다. 잠에 들 시간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 약해. 잘 살아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야.
용의 일족 직계 주제에 그렇게 약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어차피 사생아라는 것 아니겠나.
일족의 수치야. 어찌하여 그 아이를 그렇게 싸고도는지 도통 모르겠어.
뭐, 애비부터 담피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화려한 조명이 어지럽다. 북적이는 소리들에 머리가 아파온다. 발끝 부터 무너져내리며 순식간에 모래가 된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드라루크! 아버지. 괜찮니? 피곤한 거면 가서 쉬어도 돼. 괜찮아요, 멀쩡해요. 피스피스.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서 걱정 어린 기색이 떠나가지 않는다. 드라루크, 너무 무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다. 무어라 말을 더 하려던 아버지는 주변에서 부르는 소리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저는 괜찮아요. 그 말에 머뭇거리던 드라우스가 떠나간다. 드라루크는 다시 혼자 남았다.
드라루크. 용의 일족의 직계. 백은의 늑대의 아들. 그리고... 툭하면 죽는 그 누구보다 허약한 흡혈귀. 드라루크는 자신의 체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일족들이 만만치 않은 걱정을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라도라쨩은 괜찮은데 말이야. 손에 들린 우유를 천천히 흔든다. 피를 마신 것만으로도 죽어버리자 쥐여준 우유였다. 우유를 건네줄 때의 표정이 어땠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기억하지 못해도 뻔하지. 한 모금 마신 우유를 내려놓는다. 천천히 호흡한다. 공기가 답답하여 무심코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기대어 홀을 바라본다. 모두가 웃고, 떠들고, 춤을 추고 있다.
흡혈귀는 향락주의자다. 그래서인지 흡혈귀들은 자주 파티를 열곤 했다. 드라루크 또한 향락주의자기에, 평소 같았으면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겼겠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드라루크, 돌아가자꾸나. 고개를 들면 드라우스가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조금은 고요해진 홀이 있었다. 아까보다 확연히 적어진 수에 파티가 끝났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곧 여명이니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고르고나랑은 먼저 돌아갔어. 자, 드라루크. 내밀어진 손을 잡는다. 부드러운 장갑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버지. 왜 부르니, 드라루크. ...아니에요. 익숙하고 따뜻한 품에 안기며 드라루크는 생각한다.
나는...
드라루크가 눈을 떴다. 관 뚜껑을 열고, 시간을 확인하면 이제 막 8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이 있다. 예상외의 늦잠이군. 눈을 몇 번 깜박이던 드라루크가 관에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간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옷을 다시 갈아입는다. 느즈막하게 일어난 존이 좋은 저녁이라며 인사를 건넨다. 졸음이 채 가지 않은 건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존을 안아 들고 부엌으로 향한다. 자신은 괜찮지만, 존은 무언가를 먹어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꿈을 꿨었지. 어릴 때 있었던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 한 세기도 전의 일. 처음으로 내 체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일이지. 본의 아니게 주워들은 이야기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금이야 뭐, 초큐트한 도라도라쨩이니까 신경 안 쓰지만. 기쁜 듯이 울며 햄버그를 먹는 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래서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애매하게 끝난 꿈은 찝찝함을 안겨주었다. 애초에 그다지 좋은 기억도 아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런 꿈을 꾸는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이다.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니까. 흡혈귀의 생명은 질기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딴 기억 속에서 묻혀지내기엔 지나가는 시간들이 아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간이면 훨씬 더 재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까.
깔끔하게 비워진 식기를 치우고 간식을 준비한다. 어제 막 구입한 사과로 만든 파이였다. 파이 하나를 통으로 먹기엔 많은 양이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세팅한다. 파이와 함께 먹을 핫 밀크도 두 잔 준비한다. 물론, 한 잔은 자신의 것이다. 존, 오늘의 간식은 사과 파이야. 누~! 핫밀크를 홀짝이며 사과 파이를 먹는 존을 바라본다. 조용하고 다정한 일상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밝은 달이 높게 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군.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건지, 존이 사과 파이를 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것도 아니야, 존. 마저 먹으라는 의미로 코끝을 툭 건드린다. 간지럽다는 듯이 웃은 존이 다시 사과 파이를 먹기 시작한다. 이 성에 살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디데이를 세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적어도 10년 정도는 넘었을 것이 분명했다. 혼자 사는 것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조용하고, 죽을 일도 잘 없고, 유희 거리는 게임으로 충분하고. 무엇보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역마인 존이 있었으니.
반박할 여지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드라루크, 놀러 왔단다. 잘 지내니? 성에 혼자 지내는데 심심하진 않고? 여상한 표정으로 묻는 말이지만, 걱정이 가득 담겼다는 것을 드라루크는 안다. 품에 있는 존을 고쳐 안은 드라루크가 조용히 웃는다. 괜찮아요. 존도 있고 할 게임도 잔뜩 있어요. 여긴 평화로워서 죽을 일도 없으니까요. 불안한 얼굴의 드라우스가 어물거리다 웃는다. 그건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안도감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었을까. 그것보다 이 아빠가―, 이어지는 말에 드라루크가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응접실로 드라우스를 이끌었다. 스쳐 지나갔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이 성에서 혼자 살기로 한 것은 제법 잘된 일이었다는 것. 적어도 아버지는 드라루크가 죽는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을 거라는 것.
뭐가 되었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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