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는 툭하면 죽는다

누군가의 소중한 것이 된다는 것은

2022.03.03 로나드라

백업용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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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처음은 비웃음이었다. 좋아해. 두 번째는 의아함. 좋아한다고. 세 번째는 알 수 없음. 좋아해, 드라 공. 네 번째는 지겨움. 좋아해. 그리고 몇 번째였지? 사랑해. 너무 많아. 나랑 함께해 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날 드라 공한테 줄 테니 드라 공도 드라 공을 나에게 줘. 어쨌든 마지막은 체념, 그리고 수긍.

견고한 성벽이 기어코 무너지고, 그 집념과 집착을 알게 된 날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냐고 함은. 딱히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로널드와 드라루크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기에는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로널드가 드라루크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달라지긴 했다. 전보다 더 쑥스럼을 탔고, 걸핏하면 얼굴이 붉어졌으며, 조금 더 다정해졌다. 툭하면 드라루크를 죽이는 것은 바뀌지 않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이런, 제대로 망했군. 드라루크는 흔들리는 포대 자루 속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멀미때문에 두 번은 더 죽은 시점이었다.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애초에 가볍게 나온 산책에서 납치당할 줄 그 누가 알았는가. 아무리 제 아버지라고 해도 눈치채지 못 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납치당할 리가 없지만. 포대 자루가 작아 절반만 형태를 되찾고 절반만 모래인 상태였다. 쯧, 매너없긴. 한숨을 내쉰 드라루크가 툭 하고 등을 기댄다. 흔들리는 포대 자루에도 익숙해졌다. 금방 죽어 모래가 되는 체질은 이래서 불편했다. 죽은 모래를 주워담기만 하면 납치란 쉬운 것이었으니. 어릴 적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물론 그 망할 수염이나 아버지한테 제지 당했겠지만.

뭐, 여하튼. 상황을 요약하자면 드라루크는 현재진행형으로 납치를 당하는 중이었다.

어이쿠. 딱딱한 바닥에 내던져져 한 번 더 죽었다. 정말, 흡혈귀를 다루는 법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인간들이군. 살짝 열린 포대 자루의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 동안 좁은 곳에 있어서인지 온몸과 모래로 변해있던 다리가 뻣뻣했다. 뻣뻣한 몸 때문에 두 번 정도는 더 죽었던 거 같다. 겨우 형태를 되찾은 다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창문은 있지만, 무언가에 덮여 있는 듯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태를 보면 컨테이너 같은데. 앞쪽에 있는 문에 노크를 몇 번 하자 쾅 하는 소리가 돌아온다. 야만적이긴. 혀를 한 번 차고선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어쩔까. 눈을 감고 생각해봤자 마땅히 떠오르는 해결책은 없었다. 애초에 툭하면 죽는 이 몸으로 무얼 한단 말인가. 음, 망했군. 자신의 처지에 단념한 드라루크가 눈을 감았다. 일단 잠으로 체력이라도 보충하자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컨테이너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오간다는 것 빼고. 먹으라며 던져준 혈액 팩은 손도 대지 않았다. 저기에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선뜻 먹는단 말인가. 드라루크도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진작에 접었다. 사방이 적인 곳에서 탈출 시도를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애초에 지금쯤이면 흡대과에 연락이 들어가 수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마 길드에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로널드 군과 존의 밥은 어쩌지. 분명 내가 없다고 쓰레기 음식만 먹어댈 게 뻔한데. 으! 돌아가게 되면 식단 관리부터 다시 해야겠군. 평소와 다름없는 생각하며 드라루크는 눈을 감았다. 슬슬 기력이 딸리는군. 아무리 저연비인 나라고 해도 오랜 시간은 못 버티는데 말이야.

쾅! 큰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 또한 선명히 들려온다. 시끄럽군. 평소보다 배는 더 시끄러워. 대체 무슨 일인지. 슬슬 재생 속도도 느려지는데 말이야. 느리게 수복하는 몸을 본 드라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들을 대충 그러모아 컨테이너의 중앙으로 이동한다. 여기라면 그나마 덜 시끄럽겠지. 시끄러웠던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러는지. 마침내 전부 수복된 다리를 본 드라루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다됐, 드라 공!!! 그리고 큰 소리에 의해 다시 죽었다. 겨우 다 수복했건만, 도대체 누가, ...로널드 군? 누누누누눈!! 존?? 갑작스런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한다. 달려드는 존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죽을 뻔했지만, 기합으로 버텨냈다. 제 품에 안겨 우는 존을 달래며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로널드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을 지은 로널드가 다급히 달려온다. 모래 앞에 천천히 무릎 꿇은 로널드가 기어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드라 공, 드라, 공, 드라루크... 나는, 네가 정말로, 죽을 줄 알고... 로널드가 머뭇거리다 겨우 드라루크의 손을 붙잡는다. 잘게 떨리는 손이 진정할 줄을 모른다. 세게 잡으면 다시 죽을까 무서워 힘도 제대로 못 주는 모습이 우스웠다. 몇 번이고 꿈을 꿨어. 네가 멀쩡히 돌아와서, 나에게 장난이었다고, 놀랐냐며 묻는데. 화나서 죽여버리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네가 돌아오질 않아서...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존도 주위에 없어서, 그렇게 혼자만 남은 채로, 꿈에서 깨고... 두서없이 늘여놓는 말들이 처절했다. 드라루크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로널드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드라루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로널드 군. ...왜 불러? 무서웠나? 뭐? 내가 죽을까 봐 무서웠나? 당연한 소리를, 그렇다면 왜지? ... 로널드가 고개를 번쩍 든다.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이 더러웠다. 이런, 그나마 볼 만한 얼굴이 엉망이군. 작게 혀를 차고 얼굴을 대충이나마 닦아준다. 로널드가 볼을 닦아주던 손을 낚아챈다. 여전히 힘이 없는 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흠. 왜냐고 물었네. 역시 5세아는, 아니. 왜 그런 걸 묻냐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지금 자네 화내고 있나? 드라 공. 내 말에 대답부터 해. 어딘가 강압적인 태도에 드라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자네는 날 항상 귀찮아하지 않았나. 툭 하면 내쫓으려 하고, 걸핏하면 죽이고. 오히려 없는 편이 자네에게 좀 더 나은 길이 아니었나. 존도 있고. 물론 애인이 되고 난 후에는 내쫓거나 하는 게 덜하긴 했지만. 아, 그래. 애인이라서인가? 그 정도면 이해가 가능하군. 5세 동정 고릴라가 겨우 사귄 애인을 잃고 싶진 않을 테니,

아니야.

맥이 빠진 얼굴로 로널드가 툭 내뱉었다. 그 말에 드라루크가 로널드를 똑바로 바라본다. 간절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한 얼굴로 로널드가 드라루크의 어깨에 툭 기댄다. 그 상태로 가만히 심호흡하다 짓씹듯이 말을 내뱉는다. 애인이라서가 아니야, 그냥, 너니까. 너니까... 너니까 그랬어. 애인이 아니더라도 그랬을거야. ...정말로.

아.

그리고 드라루크는, 멍청한 흡혈귀는 깨달았다.

자신은 로널드의 소중한 것이라고.

모든 것을 바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목숨을 한 번쯤은 바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사건이 얼추 마무리된 후에야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납치되었던 건 일주일, 납치되어 있던 장소는 신 요코하마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니시구의 바닷가라고 했다. 요코하마시를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찾지도 못했을 뻔했다고. 납치의 목적은 의뢰. 로널드 전기를 읽은 누군가가 나의 존재에 흥미를 느껴 납치를 의뢰했다고 한다. 나 말고 다른 흡혈귀들도 많이 납치되었다는 것 같다. 납치범들이 잡혔으니 그 의뢰자도 곧 잡힐 거라며 알려주는 한다 군이나 히나이치 군의 얼굴도 볼 만한 꼴은 아니었다. 이런, 다들 나 때문에 고생 많았나 보군. 여상한 얼굴로 내뱉는 그 말에 둘 다 입을 어물거리며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말았다. 됐어. 어차피 말해도 너는 모르겠지. 우리보다는 로널드가 더 심각하니까 걔나 살펴. 로널드 군이? 그래. 그 바보 자식, 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대로 쉬지도 않았다. 아무리 뜯어말려도 절대 쉬지 않더군. 뭐, 이젠 네가 돌아왔으니 조금은 쉬겠지만. 당장 지금만 해도... 한다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드라루크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로널드를 잠깐 보던 한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사건에 진전이 있으면 따로 연락하도록 하지. 푹 쉬어, 드라루크. 자네들도 푹 쉬게나. 짧은 인사와 함께 히나이치와 한다가 떠나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드라루크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존을 바라봤다. 존 또한 드라루크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존. 누? 돌아갈까. ...누누누 누누누? 그래,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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