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와타누키 류우의 담당 편집자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읊고 있었다. 지난 번 마감 이후로 간만에 갖는 미팅이었다. 사실 그는 작품에 고집이 있다는 사실을 빼면 그다지 대하기 어려운 작가는 아니었다. 마감 때 조금 예민하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뭐든 그러려니 하는 타입인데다가, 신간 미팅 때는 드물게도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생각이 딴데 가있는지 대답이 건성이었다. 편집자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란의 얼굴에 제 손을 흔들어보였다.
"작가님... 집중 좀 하세요."
"...아. 죄송해요. 어디까지 했지?"
"그러니까 문예지에 게재할 단편 하나가..."
그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한 마디 또 해줄까 생각하던 편집자는 문득 그가 자신의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스레 제 왼손에 시선을 두자, 평소랑 다를바 없는 손이 보였다. 아, 하나 다른 점은 그녀가 얼마 전 애인에게 선물받은 커플링을 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님 설마..."
"음?"
"저... 애인 있어요."
"아... 네... 저도 있어요."
"?"
"?"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는 갑자기 편집자가 왜 사생활 얘기를 꺼내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인가? 그런걸 할 시기는 꽤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와타누키 류우는 편집자가 몇 번 바뀐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 편집자는 그래도 꽤 오래 본 편이었다. 그런 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편집자는 괴상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쉰다.
"그럼 제 커플링은 왜 보고 계신거예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그게 사실은... 이런 서두를 꺼내는 그는 어쩐지 쑥스러워보였다. 그 말을 대충 정리해보면, 편집자의 커플링을 발견한 뒤로 생각이 쭉 이어져 자기 애인에게도 선물해주면 어떨까. 라는 데까지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쥬얼리 쪽은 잘 몰라서 잠시 생각이 삼천포로 빠졌다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자신도 애인이 있지만, 그렇게 고백하는 작가의 표정이 지나치게 꽃밭 같아 그녀는 다시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일이나 하죠. 빨리 미팅 끝내고 퇴근해야지. 하여간 작가의 사생활이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영역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요즘 형님이 좀 이상한데.
호즈노미야 이엔은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특별히 눈에 띄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달콤하고, 상냥한 애인이었다. 굳이 신경쓰이는 점이라면 지나치게 사소한 것들. 예를 들면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늦어지거나, 꽤 늦은 저녁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거나, 이엔이 뭘 하냐고 물어보면 명확히 대답해주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간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란이 가물가물하게 웃으면 이엔은 별다른 말 없이 그냥 넘어가버리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사소한 것들이니까. 그러나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는 굉장히, 매우, 엄청나게 신경쓰이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럼 다녀올게..."
란의 입술이 가볍게 이엔의 뺨에 와 닿았다. 그 입맞춤은 다정하고 애정이 넘쳤다. 이엔은 란의 옷자락을 가볍게 쥐며, 질문을 꺼낼까 말까 아주 잠시 고민한다.
"아, 그러고보니."
먼저 말을 꺼낸건 오히려 란 쪽이었다. 애매한 타이밍에 이엔은 입을 다물고 만다.
"네?"
"오늘 저녁엔 외식할까? 뭔가... 맛있는 거 먹고 데이트도 하자."
"저는... 좋아요."
"좋아, 그럼... 진짜 다녀올게."
탁, 하고 문이 닫힌다. 역시 그냥 착각 같은 거였나? 괜히 란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어루만져보며 이엔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란은 꽤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긴 그는 퇴근해 이엔을 만날 시간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데이트가 기대되는건지, 평소보다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무의식중에 작게 흥얼거리는 노래는 카페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요즈음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였다. 굳이 말을 꺼내면 란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기에 이엔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 당장은 노래를 계속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았고, 경박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꽤나 차분했다. 그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줄 때를 알기 때문에 이엔은 그것을 좋아했다.
차는 매끄럽게 달려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적당한 규모의 레스토랑이었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울 정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싸구려도 아니었다. (사실 두 사람은 가끔 길거리의 싸구려 라멘을 같이 먹는 것도 꽤 좋아했다.) 대신 조용했고, 깔끔했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흐르는 적당한 밝기의 실내와, 맛있는 음식은 분위기를 돋우는 데에 한 몫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지금 마주보고 있는 서로였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본래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고는 했다.
"그래서... 오늘은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뭐가?"
"지금 말이에요."
디저트로 나온 샤베트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며 이엔이 물었다. 조금쯤 웃음기가 섞인 물음에 란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외식이나 데이트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엔이 몇 번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에 메뉴는 대부분 적당한 정도로만 정해졌다. 이왕이면 이엔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하던 란도, 지금은 '이엔이 좋아하는 게 좋은거지'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라면 넘어갔을 그런 사소함이 괜히 궁금해져왔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음..."
란은 여전히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손은 뒷목을 만지작거리다가, 곧 의자에 걸어둔 가방으로 향했다. 조금 뒤적거리다가 꺼내든 건 손바닥만한 작은 상자였다. 이엔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거의 한 눈에 그 상자의 내용물을 깨달았다.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무언가 반응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상자를 열자, 세개의 얇은 링이 겹쳐진 모양의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부끄럽긴 한데... 편집자가.. 아, 너도 알지? 혼다씨 말야. 커플링을 끼고 있었는데 보니까 예뻤단 말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엔도 손가락이 예쁘잖아. 이런걸 끼워두면 더 예쁠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커플링 끼고 있으면 주변에서 이엔 애인 있는거 알거 아냐... 그럼 대쉬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 같고... 아, 그런데 나... 이런건 잘 몰라서 좀 오래 걸렸어... 세상엔 브랜드가 너무 많더라... 검색도 해보고 매장도 가봐도 어려워서 말이지..."
란은 어째 평소보다 주절주절 많았다. 쑥스럽거나 민망할 때 가끔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엔이 별 말이 없으니 조금 불안해진건지 란은 멈추지 않고 이엔이 반지를 끼면 좋을 이유 108개를 늘어놓을 기세였다. 이엔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활짝 웃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휘어진 눈이 예뻐 란은 잠깐 숨을 멈췄다.
"정말.. 정말로 기뻐요, 형님."
"어 음... 끼워줄까?"
이엔은 냉큼 제 왼손을 내밀었다. 희고 부드러운 손을 잠시 바라보던 란은 그의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다. 한치의 차이도 없이 꼭 맞았다. 사실 언제나 이엔의 손을 매만지곤 했기 때문에 그 사이즈를 기억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란은 그의 손끝을 살짝 잡은 채로, 오랫동안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저에게로 가져와 그 위에 입을 맞춘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손끝이 움츠러든다. 이엔을 바라보며 짓는 웃음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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