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새벽
그는 어두운 방 가운데에 서 있었다. 빛이 새어들어오는 유일한 창구는 작은 창문인데, 그나마도 커텐으로 가려진지 오래였다. 커텐을 걷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어린 그는 그저 멍하니 그 어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무력감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다. 창문도 잠겨있지 않다. 커텐을 걷어내는 것은 그의 자유였다. 그러나 유일한 그의 세계는 언제나 그를 옭아매어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서 있는 것 뿐이었다.
안녕?
그림자들이 건네오는 인사는 밝지만, 그에게 있어선 그저 웅성거림일 뿐이었다. 아무리 다정하고 아무리 친절해도 닿지 않는 그 빛이. 란이 멍하게, 그러나 조금은 간절하게 그림자 사이로 손을 뻗으면, 푹신한 감촉이 손끝에 닿아왔다. 작은 곰인형이 춤을 추듯이 끌려나온다. 그는 이것을 알았다. 그가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이었다. 13살의 아이에게 주기엔 좀 귀여운가?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던 누군가의 얼굴이 흐리게 스쳐 지나간다.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가만히 인형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손에 남는 것은 난도질당한 천과 솜 덩어리 뿐이었다.
ㅡ움찔,
긴장으로 몸이 확 굳었다가 천천히 풀리는 게 느껴졌다. 눈 앞이 온통 새까맣다. 눈을 깜빡이면, 천천히 방 안의 물건들이 형체를 띄기 시작한다. 란은 가만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천의 흔적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감촉이 느껴질리는 없지만... 문득 옆을 바라보면, 묵직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과 곤하게 감긴 눈, 살짝 벌린 입에서 옅게 흘러나오는 숨... 나의 이엔. 소중한 것은 고작 천쪼가리에서 살아있는 숨으로 변화해왔다. 그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준다. 잠들어있는 와중에도 이엔은 손길이 기꺼운듯 작은 소리를 내었다.
소중한 것을 망치기란 지나치게 쉬웠다. 언젠가 그가 제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봉제인형처럼.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가 사랑하는 이엔의 웃음을 쉽사리 무너트릴 수 있을 터였다.
그저 손만 뻗으면.
란은 손을 뻗어 이엔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잠결에도 이엔은 몸을 움직여 란의 품에 제 몸을 온전히 맡겨왔다. 몸에 와닿는 그의 체온이 달았다. 목덜미에 와닿는 그의 숨결이 좋았다. 호즈노미야 란은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소중하게 아끼고만 싶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제 손이 그를 망치지 않을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이 현실마저도.
"...형님?"
"미안... 깼어?"
이엔은 가만히 란의 품에 제 얼굴을 부비고는 조금 더 가깝게 몸을 붙여왔다. 란은 기꺼이 그를 안아준다. 그냥... 조금 꿈을 꾼 것 뿐이야. 작게 속삭이는 란의 목소리는 어둠을 머금은 듯 가라앉아있었다. 이엔은 그런 란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었지만, 그저 그를 위로하고 싶다는 본능에서였다. 그래서 란은 웃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날 사랑해주는게 너라서 다행이야... 내 곁에 있어주는 게 너라서 다행이야... 수많은 진심을 속삭이며 란은 찬찬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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