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탄
@진현
‘…아오, 답답한 새끼.’
현은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한 편이었다. 제 발언에 상대방이 발끈하더라도 끝까지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다. 간혹 타인에게 입에 발린 말을 건네는 것도 숱한 학습의 결과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상황’이 아니라면 직설적인 발언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재주가 좋은 그에게도 취약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애석하게도 위로에 재주가 없다는 것이었다. 종종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는 통에 울면서 막사를 뛰쳐나간 단원들의 목격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심지어 본인은 악의가 없었기에 주변에서 말리느라 곤혹을 치뤘다.)
현은 이런 입담에 대해 처음으로 골치아프다 여겼다. 제 어휘는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 과감했고, 연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진이 이런 말에 상처 받지도 않을 뿐더러, 이런 자신의 모습마저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탄에 빠진 상태에서도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미련한 곰처럼 고민은 품어두는 녀석에게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표정부터 금이 갈 것이다. 언젠가 비탄을 푸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 제 상관은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면 돼.”라고 조언했다. 현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처 틈으로 미세하게 비릿한 향이 베어나왔다. X발, 그게 쉬웠으면 진작 했겠지.
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보였다. 평소처럼 과묵하고 담담해보이는 낯빛. 슬픔에 빠진 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외딴 숲 속 한 가운데에 서있는 사람마냥 고요하고 차분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항상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니 비탄에 빠지더라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잃은 것이 많다면, 사람은 결국 체념을 배운다. 그것은 곧 기대를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중한 것이 사라지면 행복을 잊고, 전부 담을 수 없는 슬픔은 가슴이 너무 미어지는 나머지 눈물조차 메마르게 한다. 황무지를 적셔줄 소나기에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게 된다. 진이 살아온 삶 또한 그러했다. 모든 것을 상실하여 바스러진 잿더미 밖에 남지 않았기에 주변의 걱정까지 살 정도였으니 말이다. 연인 덕분에 잊고 살았던 감정을 겨우 일깨우고 있나 했더니, 오히려 그 징조가 기우였을 줄은 몰랐다.
결국 현은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낡은 커버의 종이뭉치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대뜸 멱살을 잡아끌어 제 얼굴 앞에 이끌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상대의 동공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은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현실을 빠르게 직시했고, 눈 앞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타인이 말을 빌리자면 ‘직설적인 것’이 무기였다. 그러니 가장 자신있는 방법으로 속내를 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잡았던 멱살을 틀어쥐며 협박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지금 네 옆에 누가 있는지, 똑바로 쳐다봐. 멍청한 놈아.”
댓글 0
추천 포스트
페어명 정리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