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기생_하나는남고하나는배에올라탄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배에 올라탄다 2

모던기생

기생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영업 중이었음에도 살롱은 어둑했다. 먼지 냄새와 담배 냄새, 기름 냄새가 뒤섞여 향긋하다고는 못할 향이 났지만 살롱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원래 그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만큼 ‘살롱'은 기생에게 낯선 곳이고, 낯선 존재였다.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 이름은 모르나 얼굴을 아는 이들과의 거대한 고독을 즐기러 살롱에 출입하는 이들에게 기생은 낯선 사람, 낯선 존재였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질적인 존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봤다. 기생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생을 그렇게 살아온 탓에 속마음을 감추는 것이 도리어 편했다. ‘그런데 내가 역하다고 느끼는 게 보였다고….’ 보기로 했던 얼굴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기생에게 여급이 다가왔다.

- 일행이라도 있으신가요?

- 네. 모던 양과 보기로 해서요.

- 아….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편하도록 치마를 조금 말아쥔 기생은 바닥을 잠시 바라보았다. 짙은 자주색의 융단이 깔려 폭신한 바닥은 발걸음 소리를 삼키기에 제격이었다. 이 정도 융단을 깔기 위해 들었을 금액이 얼마였을지. 기생은 한숨을 삼키며 여급의 뒤를 따랐다.

모던의 사무실로 향하는 입구는 커튼으로 감춰져 있었고, 그 안에 복잡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개미굴 같은 길을 어려운 기색 없이 척척 찾아가는 여급에 기생이 속으로 혀를 내두를 즈음, 여급이 입을 열었다.

- 그나저나 사장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 아, 경성부 민생부장님께서 소개해주셔서요.

- 하하…. 아직 어떤 관계까진 아니신 거네요?

기생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투는 전혀 아니었고, 도리어 걱정이 담긴 말투였다. 마치 모던과 어떤 관계가 됐을 때 무언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라는 말처럼…. 기생은 여급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한 것처럼 웃으면서 벗 정도의 관계는 되겠지요, 대꾸했다. 잠시 멈춰선 여급이 기생을 돌아봤다. 복잡한 감정이 얽힌 표정이었다.

-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 네?

-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살롱에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사장님께서 난처하실 테니.

기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여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급은 원하는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기생을 마주 보았다. 기생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언제 이상한 대화를 나눴냐는 양 빙그레 미소를 지은 여급이 복도 끝 문 앞으로 다가섰다. 기생은 문 앞에 선 여급이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옷차림을 고치는 것에 심경이 복잡해져 손을 마주 잡았다. 이윽고 여급이 나무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답이 들린 뒤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기생은 주춤주춤 발을 옮겨 방 안으로 빨려들었다.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방은 서늘했다. 말이 ‘서늘했다’지 실상 냉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락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던 문밖과는 대비되는 공간에 기생은 잠시 몸을 움츠렸다. 길쭉한 녹색 세무 소파에 눕듯이 앉아있던 모던이 고개를 돌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 미안해요. 일어나서 반겨주고 싶은데, 오늘 하필 몸이 좀 안 좋아서.

허옇게 질린 얼굴을 보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모던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조차 못했으면서, 기생은 저도 모르게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소파로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짚자마자 묻어나는 식은땀과 찬 기운에 기생이 숨을 들이켰다. 모던이 머리를 기생의 손에 기댔다. 기생은 손에 와닿는 심장박동을 잠시 느꼈다. 심상찮게 느렸다. 기생은 그것이 암시하는 사실을 판단하는 일은 뒤로 미룬 채 누워있으라는 말과 함께 모던이 소파에 기대도록 도왔다.

모던이 끙끙거리는 동안, 기생은 방 안을 둘러보다 벽난로가 있는 것을 보고 장작을 찾아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쓰지 않는 것치고 깨끗이 관리되어있었는지 큰 문제 없이 방 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생이 소파 앞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은 채 앓던 모던이 슬며시 눈을 뜨더니, 아파하면서도 다리를 구부렸다. 앉을 자리를 만들어준 모던에 헛웃음을 참은 기생은 새로 생긴 자리에 앉는 대신 다리를 굽혀 모던과 눈높이를 맞췄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동그랗고 하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분을 바른 게 어색할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로 내게 어리다고…하하하….’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모던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기생은 작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기생이 저와 같은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는지, 모던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기생은 손을 뻗어 모던이 소파에 편하게 눕도록 다리를 펴줬다. ‘소파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관처럼 딱 들어맞았겠는걸.’ 기생은 과거의 기억으로 묻어둔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도록 두고 손수건으로 모던의 땀을 훔쳐주었다.

- 이렇게 아프시면 약속을 취소하셨어야지요. 의원에는 가보셨습니까?

- 멘스 때문에 아픈 거라 의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 그래도 심하면 가셔야죠. 미련하게 꾹꾹 참기보다….

- 그래도 기생 씨와 약조를 했는데 어떻게 당일에 못 보겠다 하겠어요. 귀한 시간 내서 와주겠다고 했는데…. 많이 아프지도 않아요. 조금만 참으면 되니 걱정 말아요.

기생은 파리한 얼굴로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데에 대한 변명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모던을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았던 손이 기생의 손 아래에서 따뜻하게 녹았다. 그와 함께 모던이 말하는 속도도 느려졌다. 기생은 모던이 지금껏 자신을 기다리며 억지로 깨어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얇은 이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가져와 모던에게 덮어준 기생은 체온을 잃지 않게끔 해줄 요량으로 모던의 몸 밑, 소파와 맞닿은 부분을 손으로 훑다 축축한 것이 손을 적시는 것에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기생은 잠시 어제 경성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머릿속으로 확인했다. 무섭도록 느린 심장박동과 떠오른 몇 가지 사건을 일일이 맞춰보았다.

구체적인 사연이며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기생은 손을 씻고 자리로 돌아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모던을 바라보았다. 마침 저도 졸리던 참이었다. 기생은 모던의 환부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모던의 몸에 상체를 기댔다. 그래도 되는 사람임을, 자신을 이미 그의 울타리 안에 들여놓은 사람임을 알았다.

- 철저하다고 소문이 자자하길래 피도 눈물도 없는 이겠구나 생각했는데…내가 경무국 끄나풀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경계가 없으시오?

모던은 답이 없었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응급 처치를 했으리라 짐작한 기생은 모던에게 기댄 채 모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그 탓에 의원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멘스는 무슨….’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하며 미련한 행동을 한 모던이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여급의 부탁도 이런 어린애 같은 면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며 기생도 눈을 감았다. 방 안이 따뜻해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곤하고 졸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