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남고 하나는 배에 올라탄다 1
모던기생
화선관을 찾는 이들은 '제국'에 우호적인 이들이 대다수였다. 정보를 목적으로 연 곳이니만큼 기생에게는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역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피하기가 무섭게 아예 화선관에 죽치고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비치자마자, 저를 앉히고 신이 나 떠들어대는 경성부 민생부장 같은 치가 그랬다.
화신상에서 사왔다며 부탁한 적도 없는 연지며 립스틱, 향수를 늘어놓고 으스대는 것부터 속이 뒤집혔다. 그러다 슬그머니 무릎에 손을 짚어오는 민생부장을 내치고픈 마음을 어찌나 참았는지, 손바닥에 손톱 자국으로 흉이 남을 지경이었다. '육시를 할 놈 같으니. 제국의 개가 되느라 여기를 일본 유곽쯤으로 착각한 모양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등에 손을 겹쳐 올린 기생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미소를 짓는 여자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 그러고보니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김 부장님 선물에 놀라 여쭙는 게 늦었습니다.
- 주모던입니다. 민생부장님께서 좋은 곳이 있으니 잠깐이라도 와볼 수 있겠느냐고 하셔서 왔는데, 뭐...좋네요. 아름답고.
기생은 뻣뻣한 목소리로 칭찬을 늘어놓는 모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모던. 주모던이라. 얼마 전 당하리에 같은 이름의 서양식 싸롱이 열렸다던 기억이 났다. 기생은 당황한 채 저를 마주 보는 모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앳된 얼굴로 싸롱을 열 정도의 부잣집 모단걸이 이런 곳에 끌려와서 어쩐다. 하기사, 그런 부잣집 딸 모단걸이니 조선총독부 놈 호출에 좋다고 쫓아왔겠지. 속으로 혀를 차던 기생은 싸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민생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 이리 아리따우신 분을 화선관으로 데려오시다니, 다른 아이들이 알았더라면 민생부장님께 우는 소리를 했을 것이어요.
- 하하! 내가 화선관 오는 이유래봐야 기생이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 농을 치는군. 혹시 투기라도 한 건가?
기생은 얼굴을 굳히고 싶은 것을 참고 옷고름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김 부장님 눈은 못 속인다니까, 하고 거짓말을 하자마자 민생부장이 자지라지며 웃었다. 그 틈을 타 잡아뒀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왔다. '해방이 되기만 하면 토막내 바다에 던져 조선에도 일본에도 머물지 못하게 할 테다.' 조용히 분노를 태우던 기생은 툭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모던을 바라보았다.
- 혹시 이 근방에 고급 담배 파는 곳은 없나요? 하필 담배가 똑 떨어져서.
- 아이들이 피우는 담배 정도는 있을 것이어요. 가져오라고 할까요?
- 저는 제가 피우는 것만 피워서요. 사다달라 해도 양담배라 잘못 사다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기도 하고. 직접 사올 생각이에요.
- 양담배를 파는 곳이라면 화선관과는 떨어진 곳에 있기는 한데...어디보자...거기가 당하리 외곽에...약도를 그려드려야 하나....
기생은 잠시 민생부장의 표정을 살폈다. 모던이 이 공간을 나서자마자 눈치조차 안 보고 욕망을 풀어낼 생각으로 벌개진 얼굴이 흉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기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배시시 웃었다.
- 원참, 말씀드리는 걸 잊다니. 제가 하필 길눈이 어두운 편이라서요. 혹시 기생씨에게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 아, 안 되지.
- 민생부장님께 같이 가달라 부탁드릴 순 없잖아요. 제국에 충성하시느라 경성은 돌아보실 새도 없이 일하시는 거 누가 모른다구. 여기서 일하는 기생씨가 이 근방 지리는 잘 알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쉬면서 약주라도 들고 계세요. 이렇게 좋은 곳에 초대해주셨으니 제가 뭐라도 살게요. 넉넉히 안주도 시킬까요? 노릇하게 구운 전도 좋고, 새콤하게 무친 묵도 좋고...전 요즘 양념에 잰 고기 구워서 약주 곁들이는 것도 좋은데. 불란서 말로 그렇게 입에 짝짝 붙는 조합을 마리아주라고 하더라고요. 기생씨, 그거 미리 주문해두고 가면 우리 올 때쯤에 맛볼 수 있겠죠?
- 그럼요....
살갑게 말을 거는 모던에 놀라 얼결에 답한 기생은 재빨리 민생부장의 표정을 훑었다. 색色 못지 않게 주酒도 좋아하는 민생부장이라,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어렸다. 기생은 부러질 것 같이 꼿꼿한 얼굴로 앉아있던 모던이 넉살 좋게 민생부장을 구슬리는 것에 조용히 감탄했다. 어느새 기생의 허벅다리에 놓여있던 손도 거둬져 있었다. 민생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빨리 다녀와, 모던양, 기생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대? 기생은 민생부장을 만난 이래 처음 진심으로 웃으며 속삭였다. 저희 없는 동안 심심하실테니 아이들 불러다 부장님께만 재미난 거 보여드리라고 할게요. 민생부장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생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생은 민생부장이 있는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와 일머리가 좋은 아이 몇을 불렀다. 민생부장이 있는 방으로 약주와 음식을 넉넉히 가져다두고 예능에 능한 아이들을 서넛 보내라 일러두는 기생의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모던이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 음식은 적당히 가져다줘도 괜찮고 약주만 넉넉히 갖다두면 돼요. '예능에 능한 아이들 서넛'은 뭐...나도 찬성.
- 예?
- 약주 중에 도수 낮은 것들 모아다가 병을 비우고, 특히 도수 높은 것들로 다시 채워다 민생부장에게 가져다줘요. 값은 내가 다 치를테니 돈 걱정은 말고. 도수 낮은 약수는 뭐...버려도 되고 가져가도 상관 없으니 알아서 해요.
-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 약주 병 보고 도수며 값은 잘 알아맞춰도 약주 맛은 잘 모르는 사람이라, 쇼...그러니까 공연을 해주면 홀로 즐기는 풍류랍시고 마실 거예요. 그러다 취해서 나자빠지면 끌어내서 인력거에 싣고 보냅시다.
개중 나이가 찬 아이가 어떻게 하냐는 얼굴로 기생을 돌아보았다. 기생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라는 뜻이었다. 불려온 아이들이 분주하게 흩어지고, 그제야 미소를 지은 모던이 가죠, 말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모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생은 뒤늦게 정신이 들어 치마를 잡고 그 뒤를 쫓았다.
- 길눈이 어두우시다면서 그렇게 성큼성큼....
- 기생씨.
- 네?
- 순진한 면이 있네요. 어려서 그런가?
'어려서 그런가?'라니. 기생은 아까 민생부장과 있을 때 제가 모던을 보며 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참았다. 그동안의 침묵을 무슨 뜻이라 생각했는지, 앞서나가던 모던이 자리에 멈춰섰다. 그런줄도 모르고 바닥에 남은 모던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기생의 가슴팍이 등에 부딪히고서야, 모던이 뒤를 돌아섰다.
- 내가 경성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다 꿰고 있는데, 고작 당하리 내에서 양담배 파는 점포를 모르려고.
- ....
- 계속 웃고는 있었지만 보였어요. 역하다고 느끼는 거. 아, 민생부장이 알아차렸을 거라는 뜻은 아니고.
- ....
- 원래 그렇게 말이 없었나? 아까 민생부장 앞에서는 재잘재잘 꾀꼬리처럼 말하더니.
- 혹시...그러니까, 그러면.
- 맞으니까 갈까요? 아무튼 담배 똑 떨어진 건 진짜거든요. 어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양담배를 하도 자주 피워 버릇했더니 몇시간만 못 피워도 손이 떨린다니까.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린 모던이 과장스레 손을 떨었다. 누구보다도 어려보이는 얼굴에서 '어리니까'라는 말이 또 튀어나온 것에 쏙 나갔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기생은 옷고름으로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기생의 불안이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모던도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기생은 모던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을 짓는 것에 생각했다. 모단걸이라고 다 허영심에 찬 온실 속 화초는 아니구나. 기생은 미약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삼키며, 포식자마냥 성큼성큼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는 모던을 따라갔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