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기생_하나는남고하나는배에올라탄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배 위에 올라탄다 3

모던기생

모던이 눈을 떴을 때 기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피를 너무 흘렸던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모던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울 새도 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기생이 어디에라도 숨어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기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 그럴 리 없지….’ 모던이 휘청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피로 흠뻑 젖었던 소파가 빳빳하게 말라 살갗을 찔러서였다. 모던은 조만간 소파를 해체해 내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소파에 잘 덮어두었다.

모던이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혹시나 제가 찾던 어여쁜 이일까 싶어 고개를 들었던 모던은 이내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영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문을 열고 들어온 여급이 굳은 표정으로 책상 위에 식사와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 깨끗한 헝겊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모던은 정신을 잃듯 잠들기 전보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급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 웬일이래? 이렇게 식사까지 챙겨주는 일은 드문데….

- 제가 챙겨드리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 손님분께서 괜찮다고 했는데도 굳이 돈을 쥐여주시면서 고기라도, 그게 아니면 선지라도 챙겨 먹이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고기 주문해다가 구워 드린 거니 드시기나 하세요.

- 왜 이렇게 심통이 났을까 했는데…하하, 질투라도 하나? 아니면 고기 사고 남은 돈 용돈 삼은 걸 들킬까 봐?

- 징그러운 소리 마시고 드세요. 그나저나. 멘스라는 이야기, 잘 하신 것 같네요.

- 음?

- 손님분께서 철석같이 멘스라고 믿으시길래.

- 아아.

모던은 포크로 고기를 쿡 찌르고 입 안에 욱여넣었다. ‘참 이상하다.’ 모던은 본래 육식을 즐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야 육고기를 입에 넣었지만 그 외에는 육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애초에 육고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백호랑이로서의 삶이, 그 이전에는 일제가 부모의 목숨과 안락한 삶을 앗아간 일이 육식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가 적합한 설명일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 모던은 고기를 꾸역꾸역 씹어 삼키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정말로 단백질이니 혈액이니 하는 것을 보충하지 않았다간 죽을 것 같아서. 둘째, 기생이 마음을 써 준비해준 것이라서.

모던은 기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매끈한 달걀 같은 얼굴이 안타까움에 물들어 자신을 걱정했을 것이다. 모던양은 멘스를 할 때면 많이 아파하는구나, 하고 제가 한 거짓말을 꾹꾹 가슴속에 눌러쓰면서. 그게 못내 간지러워 스멀스멀 비져나오는 미소를 애써 참던 모던은 따뜻한 물에 헝겊을 적신 여급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에 헛기침을 했다.

- 그냥 웃으세요. 참으시는 게 더 흉해요.

- 미스 서는 까칠한 게 매력이지. 닦아내는 건 알아서 할 테니 가봐요.

- 사장님.

- 응?

- 주제 넘은 참견이겠지만 손님분…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 그건 왜 물어보지?

- 화류춘몽이 괜히 나왔겠어요. 그런 사람들이야 스스로를 가여이 여기는지 몰라도 저는 그 분 때문에 사장님 마음 다치시는 일 없었으면 해요.

모던은 잠시 여급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주제 넘은 참견 맞으니 가봐요.” 모던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변한 여급이 묵례를 하고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모던은 재빨리 사라진 여급을 씹는 대신 남은 고기를 씹어 삼키고 의자에 기대 앉았다. 옷이 피를 머금어 갈색으로 굳은 것을 내려다보다, 심호흡을 하고 윗옷을 걷어 올렸다.

붕대에 달라붙었던 천이 떨어져 나왔다. 모던은 심호흡을 두어번 더 한 뒤 붕대를 풀어냈다. 따가운 통증과 함께 붕대가 떨어져 나가고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드러났다. 다행히 주요 장기는 피해 갔는지, 피가 많이 흐르긴 했지만 아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모던은 고통에 밭은 숨을 몰아쉬다 한숨처럼 큰 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아직 따뜻한 헝겊을 집은 뒤 환부를 닦아내는 동안 모던은 기생을 생각했다. ‘화류춘몽. 화류춘몽이라….’ 사무실에 늘 비치해두는 약품으로 환부를 소독하고 새로 붕대를 감은 모던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기생의 춘몽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탓인지 거울 속에는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의 성인 여성이 곧게 서 있었다. 립스틱을 바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던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연습했다.


모던의 사무실에서 선잠이 들었던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생은 경대에 달린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분칠을 지워 드러난 맨얼굴은 말끔했지만, 기생 스스로는 그 얼굴에 칠해졌다 사라진 감정들을 볼 수 있었다. 동지들이 스러졌을 때의 절규와 슬픔, 동지라 믿었던 이들의 배신을 알아차렸을 때의 실망감, 아무것도 모르는 기생인 체를 하며 숨겨온 모멸감 따위가 아직 얼굴에 매달려 있었다. 분칠을 한대도 그런 감정은 늘 기생의 곁에 머물렀다.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기생을 지상에 매어두고 있었다. 이렇게 침잠하는 시간이 제게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기생은 때때로 이런 시간을 가졌다.

거울 속 미운 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기생은 그를 가여워 할 날이 오기는 할지, 잠시 의문을 가졌다. 그런 기생을 우울의 늪에서 끌어내기라도 하듯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앉은 그대로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한 기생은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다 네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누가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편이 안전했다. 문을 직접 열지 않을 생각임을 알아차렸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가 문 너머에서 입을 열었다.

- 기생씨, 저 모던이에요.

이전에 봤을 때처럼 통통 튀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던이었다. 기생은 제게 먹구름을 드리웠던 고질적 우울감이 단숨에 달아난 것도 모르고 황급히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모던에게 맨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분으로 가리자니 가뜩이나 피를 많이 흘렸을 모던이 걸렸다. 잠시 고민하던 기생은 한숨을 쉬고 문 앞에 섰다.

- 모던양….

- 언니라 불러도 괜찮은데.

- …모던양, 아프시면서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 춘몽을 함께 꾸고 싶어서….

- 네?

- …화선관에 갔는데 기생씨는 오늘 아예 쉬는 날이라고, 집을 찾아가라길래 왔죠. 전차를 조금 탔다가, 걷기도 좀 걷고.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산책을 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하니 금방이었어요.

- 저 지금 분칠 안 했어요.

- 괜찮아요. 난 입술만 발랐는데, 신경 쓰인다면 공평하게 지우면 되는….

문을 살며시 연 기생은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표정을 짓는 모던을 슬쩍 흘겼다. ‘토끼 같은 얼굴로 어떻게든 넘어가려고….’ 모던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기생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 모던이 들어올 수 있게 공간을 내주었다.

기생의 집에 들어온 뒤에도 모던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봤다. 기생은 손님용으로 빼둔 방석을 대충 내주려다, 방석을 든 채로 가장 안쪽 공간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모던은 척 봐도 절절 끓는 바닥에 슬쩍 기생의 눈치를 봤다. 손님용 방석을 내려놓은 기생이 약간의 공간을 띄워 앉았다. 모던은 작게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방석에 앉았다. 엉덩이가 익을 것 같았지만 기생 딴에는 멘스 중인 저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 안 가 매서운 눈초리에 축 내려갈 입꼬리기는 했다.

- 내 살다 살다 모던양처럼 미련한 사람은 처음 봐요. 얼굴 봤으면 됐지, 아픈 사람이 어째 몸뚱아리를 이고 지고 여기까지….

- 언니가 별로면 미스 주도 괜찮은데….

- 춘몽을 함께 꾸고 싶다는, 이상한 말이나 하고.

- …들었는데 못 들은 척 한 거예요?

- 못 들었다고 한 적 없어요. 네? 라고 되물어서 그렇지.

- 아….

- 아무튼…다음엔 그런 미련한 행동 말아요.

- 그렇지만 미안해서…기생씨한테.

- 그냥 이름만 불러요.

- 기생이라고?

- 네.

- 기생이한테 미안해서….

- 뭐가요?

모던이 잠시 우물쭈물 말을 미뤘다. 기생은 참을성 있게 모던의 말을 기다렸다. 모던은 그냥 넘어갈 기생이 아님을 알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갑자기 제가 꺼내려고 한 말이 무척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거니와, 그 말을 꺼냈을 때 기생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이 돼서였다. 괜한 가방만 만지작거리던 모던은 기어코 답변을 들어야겠다는 얼굴의 기생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 언니가 돼서는 약속일에 아파서…그래서 약속 중에 잠들어서 돌아간 줄 몰랐던 것 미안해요.

- 그리고요?

- 깨보니까 없길래 당황해서 다짜고짜 화선관 쳐들어갔다가 집까지 찾아온 것도 미안하고.

- 그리고?

- …그것밖에는 모르겠는데. 아! 고기…고기 사 먹이라고 괜한 돈 쓰게 한 것도.

- 먹었어요?

- 우웅…소고기.

모던은 시무룩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기생이 생각과 달리 화가 나보여, 화를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안 났다. ‘눈을 마주쳤는데 미워하는 눈이면 어떡하지….’ 허벅지 위에 놓인 모던의 양손 손가락이 바삐 서로를 괴롭히는 사이, 기생은 침묵을 지켰다. 언제 미움 받을 것을 두려워했나 싶게 호기심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던 모던은 기생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에 눈을 댕그랗게 떴다.

- 앞으로는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아요. 특히 내가 모던양 신경 써서 내어준 것에 대해서는.

- 알겠어요….

- 다른 것도 어지간해서는 미안해하지 말고.

- 알았어요….

- 나 돌아갔다고 아픈 몸으로 경성 활보한 건 미안해해요. 언니 스스로한테.

- 웅…응? 방금?

- 그나저나 춘몽 이야기는 뭔지 궁금하네. 나는 가방끈이 짧아 춘몽이라 하면 그 노래…화류춘몽밖에는 몰라요.

- 아니 아까 언니라고…?

기생이 미소를 지었다. 모던은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려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갑자기 바닥에 들러붙은 모던에 놀랐는지 기생이 기겁을 하며 모던의 팔을 붙들었다. 모던은 제 팔을 감싼 따뜻한 손에 제 손을 겹치려다, 그러면 그 손이 꿈처럼 흩어질까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을 택했다. 지금, 이 순간이 함께 꾸고 싶었던 춘몽이라는 말은 꾹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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