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릴리] 어떤 진심
톨비쉬는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각에 성소에 나타난다. 그리고 날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버린다. 그게 '우리들'의 약속이었다.
"......안 님, 밀레시안 님!"
"아, 미안해요.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아르카나 적합자에 관한 이야기요. 그거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소문이 진짜인지 알려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새로운 아르카나 적합자가 나왔다던데요? 불과 얼음을 동시에 사용하는 마법사라던데!"
"아......하하."
어느새 다시 과열된 분위기를 잠잠히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화두를 던진 사람은 연금술과 마법의 새 지평을 열 인재가 나타났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하지만.......
"그건 오해예요.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미묘한 각도로 본 탓이라더군요."
"네? 그럼 그 빛은 무엇이었는데요?"
잔뜩 실망한 영애들이 부채를 양손에 쥐고 기도하듯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나는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에레원은 나 때문에 무슨 소문이 생겨도 정치계를 도로 사로잡을만큼 성장했지만 그런 빌미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내가 그녀를 깊이 아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원기둥 모양의 빛이라면 제 스킬 중에 하나인데......."
"어머, 밀레시안 님은 어쩜!"
"멋있어요, 밀레시안 님!"
"밀레시안 님!"
모공까지 들여다 볼 정도로 가까이 올 기세인 영애들에게 맨손을 내보이며 진정하라는 신호를 주고 다 식어버린 밍밍한 밀크티를 마셨다. 한모금이 꿀꺽 넘어가면 영애들의 목울대도 덩달아 꿀꺽 움직이는 것이 다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잔을 내려두었다. 그리곤 실력행사를 하듯 맨손바닥을 천장을 향해 뒤집어 보이고 새파란 빛을 불러왔다.
"작은 빛의 구체를 터트리는......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능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건 아직 열화판이지만 잠깐 보시는데는 문제 없을 겁니다. 조금만 떨어져 주신다면요."
"우와아, 이런 게 가능하다니! 밀레시안 님, 정말 멋있어요!"
"이 새파란 빛을 보세요, 완전 푸르지도 완전 하얗지도 않아요."
"이런 아름다운 것이 살상용 무기가 된다니......."
마지막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영애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질문할 것이 많겠지만 나는 어떤 물음에도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손 위의 빛을 쥐어 꺼트리고 익숙하게 웃었다.
"......얼음이 다 녹았네요."
"아, 금방 새 것으로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여러분."
"아......."
능력에 대해 무서워하며 주저할 때는 언제고, 곧장 아쉬워하는 티를 내는 어린 영애들은 포르르 날아다니는 작은 산새와 같았다. 나는 그녀들에게 옅게 미소지으며 간단한 예를 표하고 정원을 벗어났다. 이쯤이면 펫을 소환해 날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은 곳까지 향하자 하늘에서 커다란 깃털이 떨어져내렸다. ......이건 톨비쉬의 부름이었다. 나는 어깨 위에 무겁게 얹어진 예식용 망토를 떼며 코기를 소환했다. 가장 빨리 날아줘. 할 수 있겠어? 작은 속삭임에도 왕! 하고 사랑스럽게 대답한 거대한 강아지는 나를 태우고 인근 문게이트까지 날았다. 문게이트에 도착한 이후론 금방이었다. 베그 절벽으로 향하고, 성소로 들어가고, 성소 깊은 곳의 그 남자를 만나는 일까지. 성소에 도착해서도 움직이지 않고 숨을 고르던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코기를 소환 해제하고 그가 기다릴 장소로 천천히 걸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었고, 이내 그에게 날아들듯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먼저 부르기까지 하고."
"릴리, 숨부터 고르세요."
"아직 아무런 징조도 없었어. 세상은 평화로웠다고. 그런데 왜 나를......."
"으음....... 이럴 줄 알았다면 다음 방문일까지 기다릴 것을 그랬습니다."
크고 단단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감싼 그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에게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보고 싶어서 불렀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당신을 너무도 그리느라 다음 방문일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그냥 보통의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서......."
"뭐......?"
"그렇게 답하면, 당신은 내게 실망하실까요?"
쓴웃음을 지은 톨비쉬는 온기를 금세 거두어갔다. 나는 여전히 거칠어진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되새긴 끝에, 겨우 이해한 나는 뒤늦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음을 자각한 뒤로도 한참이나 지지부진한 관계를 이어오던 우리였다. 그 선을 그가 먼저 넘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겨우 알반 기사단과 나, 그리고 톨비쉬의 약속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 이건 약속 위반이야......."
"그렇다면 우리 둘의 약속을 새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싫습니까?"
"......안 싫어."
새 약속이라니. 싫으냐니. 싫지 않다고 자그맣게 대꾸한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그에게 한발짝씩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얼굴이 불에 탈 듯 화끈거리고 있었다.
이 남자를 포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다가가면 밀려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고 끌어당겼다.
"무슨 약속......할 건데......."
"당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깃털을 보내기로 할까요?"
"그, 그러다 진짜 중요한 일에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오면 어떡해."
"그럼 중요한 일에는 깃털 두 개를 보내지요. 이런 구분법은 어떻습니까."
"......그건 조금, 분간이 될지도......."
하하하. 낮게 웃은 그가 내 머리를 감싸안으며 바닥에 발을 딛었다. 나는 그의 품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꿈 같은 한때였다. 그가 내 무슨 말에도 대답하고, 나도 그의 무슨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
"그런데 오늘 어디에 다녀오셨습니까? 달콤한 향이 나는데요."
"앗, 그게...... 갓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들의 티파티에 잠시 다녀왔어."
"아하, 그러셨군요. 복장을 보아하니 꽤 즐거운 시간이었나봅니다."
"조금...... 다들 기대하는 모습이 귀여웠어. 그런데 옷은 왜?"
"여기, 이렇게."
"......잠깐, 이리 줘!"
"자국까지 묻혀 오시고."
"아냐!"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에서 붉은 입술자국이 남은 셔츠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팔을 휘휘 저으며 노력했지만 그는 너무도 손쉽게 셔츠를 내어주었다. 낮게 웃은 톨비쉬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내 뺨을 감싸쥐며 웃음지었다.
"당신이 인기가 많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이건 정말 그런 게 아니라, 가까이 온 사람들이...."
"뭐, 묻을 수도 있죠."
"아니라니까!"
"오해하는 것 같습니까?"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모를 말간 눈으로 이쪽을 응시해오자 도리어 시선을 받아치기가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그게 아니라, ......부끄럽고 창피해. 너한테 오해할 일 만들기 싫어."
"질투작전 치고는 꽤 선방하셨는데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흠. 짧은 고민을 마친 그는 이내 셔츠를 다시 뺏어가 침대 너머로 던져버리고 내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희미한 미소를 띈 그는 내 얼굴 곳곳에 도장을 찍듯 입맞춤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제 마음이, 조금, 느껴지실까요."
"이렇게 안 해도 알아......."
"아뇨,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보다 버거운 일이거든요."
"......?"
또다시 낮게 웃은 그는 의문투성이인 내 얼굴에 다시 입맞춤을 남기기 시작했다. 나는 무력하게 그의 품에서 입맞춤이나 받고 있다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채로 침대에 엎어졌다. 긴 가운자락이 다리에 감겨들었다.
"......이제 갈 거야?"
"아뇨, 오늘부로 당신의 낭만 농장에 거주할 예정입니다만."
"뭐?!"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허리가 아파 도로 엎드렸다. 허리를 부여잡으며 아예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스튜를 끓이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에 거주한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물론, 당신이 허락한다면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너는 세계를 주시해야 하지 않아? 그런데 갑자기 우리 집에서 살고 싶다니, 이해가 안 돼. 수호자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양도할 거야?"
"그건 아닙니다. 양도한다고 양도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요."
그는 스튜의 맛을 보더니 빙긋 웃으며 화덕의 불을 껐다.
"단지 내가 당신 근처에 머무르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서도 세계는 관조할 수 있어요."
"......오늘 너 이상해. 갑자기 깃털을 보낸 것도 그렇고."
"제가 더는 못 기다리겠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나랑, 그, ......아무튼. 그것도 그렇고."
"저번 방문일에 당신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그게 계속 기억나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그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번 방문일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또 귀족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을 들었을 때였나? 나는 셀 수 없이 짚이는 점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날 향한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내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어서 늘 거절이라는 이름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남자는 진심을 꺼내 보이고 있었다. 내 앞에선 항상 솔직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늘 도망치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러니 안 될까요, 여기서 사는 건."
눈매를 늘어트리고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봐 달라는 듯 눈을 깜빡인다. 나는 그의 비언어적 표현에 말문이 막힌 채 입술만 달싹였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이번엔 그와 시선을 맞춘 채였다.
"......좋아해. 처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얼마든지 언제까지라도 머물러도 돼. 수호자의 일 때문에 집을 떠난다고 해도 안 섭섭해 할게. 집을 며칠씩 비워도 돌아온다고 약속만 하면 기다릴게."
좋아한다는 말에 그의 얼굴이 환희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주절주절 덧붙인 말이 형편없이 너덜거리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끝까지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내 손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자리를 비울 때가 된다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을 며칠씩이나 비우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당신이 질릴 때까지 머무를테니까...... 제 영원을 받아주세요."
그 남자의 입술은 도톰했고 붉었으며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초조한 듯 입술이 종종 달싹거렸다. 초조히 답을 기다리는 사람 특유의 불안이 배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만은 올곧았으므로, 나는 큰 고민 없이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받을게. 그러니 내 영원도......읍?!"
"그건 더 아껴두시길 바랍니다."
"읍?!읍!!!"
방금 로맨틱한 상황 아니었나? 나는 그의 손에 입을 막힌 채 무어라 항변했지만 그는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내가 완전히 포기한 뒤에야 겨우 손을 거두며 적당히 식은 스튜를 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하. 내가 대체 왜 네......영...... 하여튼 그걸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안 될 것까진 없지만 신중히 접근하는 게 좋다는 거지요."
"그게 그 소리잖아. 너 혹시 내 모, 몸에만 관심 있고 다른 건......."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입니까? 제가 저를 드린다고 하지 않았나요?"
대체 무슨 황당한 경우냐며 빵을 찢어 넘겨주는 남자가 괘씸해진 나는 잔뜩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스튜를 떠먹었다. 그래, 이론상 나쁠 거 없다. 같은 마음이지, 고백도 했지, 한쪽은 자신을 다 주겠다며 전원생활이나 즐기자고 한다. 나쁠 거 없다. 나쁠 거 없지. 근데도 왜 진 기분이 드는 걸까?
"......나도 네게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
내가 우울한 투로 중얼거리자 그는 큰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건 노후가 되어서 해도 될 약속인데요. 제가 은퇴하고 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대체 왜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 많으니까요. 나는 온전한 당신을 약속받고 싶지, 다른 존재들이 얽힌 당신을 약속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제법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결벽증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난폭하게 요약할 필요까지 있습니까."
나는 그를 힐끔거리다가 뜯은 빵을 입에 밀어넣었다. 하여간 요리도 잘 해서는.
"알았어. 나중에...... 해 질 녘이 되면 네게 말해줄게. 새벽동이 터도 너와 함께하겠다고."
그제야 그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꼭 끌어안고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헤집듯 쓸어냈다. 그리고 둘 사이엔 달콤한 밀어가 가득 쏟아져내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행인처럼, 밤이 깊고 새벽이 터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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