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이부키 아이의 동창생 모브

404 by 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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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 드림입니다

이부키와의 관계성은 깊지 않으나 모브의 독립적인 서사가 깊어 드림이라고 나을 거 같았습니다...^.^

이부키가 병풍처럼 등장합니다(..)

이부키는 좌천 이후 이바라키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A에게.

잘 지내니?

네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적어도 육 개월에 한 번은 날아오던 엽서는 어디로 갔니? 답장해 준다면 기쁘겠지만 부탁한다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 대신 하던 대로 내 소식을 적어 보낸다.

이바라키의 아파트에서 펜을 잡는다. 계약 문제는 잘 해결되었고 삼 주 전에 무사히 입주를 마쳤어. 새 집은 조금 외딴 곳에 있지만 그래도 볕이 잘 들어서 마음에 들어. 가져온 짐은 절반 정도 풀어 놨어. 방 한쪽에 일렬로 쌓인 박스들을 볼 때마다 저걸 언제 다 정리하지,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와. 바뀐 집 구조 안에서 각자의 물건들에게 제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지치게 되더라. 내가 짐 푸는 일 따위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

생각해 보면 이사를 준비할 때도 짐 정리하는 일을 퍽 피곤하게 여겼었지. 나는 내가 나름대로 미니멀리스트라고, 버려야할 물건은 잘 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상상도 못한 곳에서 잡동사니가 튀어나오더라. 무얼 버리고 무얼 정리할지고민하는 게 나한테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너도 그러니? 그 일은 꼭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정리하는 일로 여겨졌어. 중요한 물건과 필요없는 물건을 분류하는 게 아니라 기억해야 할 일과 잊어버려도 되는 일을 분류하는 일로 여겨졌다. 뭐, 어쨌든 이사를 무사히 끝내긴 했어. 이제 어른이니까 그 정도 어려움은 알아서 해결해야지.

지금은 영업 부서에서 일을 해. 일을 찾기가 좀 힘들었지만 다행히 지인의 주선으로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한 직무의 일을찾았어.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잦아서 요즘 운전을 자주 해.

다른 도시로 나가려면 우리가 만나던 그 굴다리를 꼭 지나가야 한다. 그때마다 네 생각이 나. 도시를 잇는 길들 사이에서고개를 쭉 빼고 허둥대느라 오래는 생각하지 못하지만.

알고 있는 풍경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변하면 변한 대로 변하지 않았다면 또 그것대로 마음을 복잡하게 해. 이바라키는둘 중 어느 쪽인가 하면, 변하지 않은 쪽에 가까워. 패여 있는 길목에 고인 물처럼 이제 이곳은 변할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는 일들만 일어나는 내 작은 고향.

거두절미하고, 몇 주 전에 나 하수구에 지갑을 빠트렸다. 세상에, 말이 되니? 어린애도 아니고. 길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한참을 그 안을 휘저었는데 손이 닿질 않더라.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며 한창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려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기웃대면서 훈수를 두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따라 보기도 했는데 삼십 분이 넘어가니까 웃음도 나오지 않더라. 쌓인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정말 그럴 뻔 했어. 지나가던 순경이 멈춰서기 전까지.

다행히도 그 사람 팔이 나보다 길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먼지로 범벅이 든 얼굴을 드는데 그 순경 가슴팍의 명찰과 눈이 마주쳤어.

이부키 아이. 기억하니? 일 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왜, 삼 학년과 주먹질을 해 교무실을 한참 시끄럽게 했던 애 있잖아. 그 애 경찰이 되었더라. 그 애였다.

먼저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어릴 때의 인연은 전부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이 드물진 않지만, 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니 상대가 반가워할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 별 것도 아닌 옛 친분을 밝혀 친절한 순경과 어색한 공기를 나누게 될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를 알고 나를 아는 미츠바 할머니가 그 애도 알았고, 두 사람 고등학교를 함께 나오지 않았냐 물었는데 그 애가어리둥절해하며 웃어 보이자, 기어코 내가 어린 시절에 안경을 썼었고 교차로 모퉁이에 살았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 애가 아는 척을 하더라. 더러워진 옷을 경찰서에 가서 정리하겠냐고 묻더라. 상냥하지. 너무 상냥해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어.

그 앤애는 내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한정판이라는 걸 알아차리면서 축 늘어진 생머리 사이로 장난스레 웃었다. 그런 인상은 아녔는데 많이 변했더라. 그 애가 몰던 오토바이나 왁스로 넘긴 머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변한 거라곤 없는 이 작은 동네에서 혼자서만 훌쩍 커 버린 그 애가 신기했다.

이것저것, 짧게 대화나누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됐어. 함께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빠트릴 수 없는 주제인가 봐.

너랑은 대화할 일이 없었지 하는 말을 하며, 속으로는 학교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내 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말을 꺼내면서 동시에 스스로 상처받았어. 너를 제외한 동창과 이야기해 보는 게 오랜만이라 잘 몰랐는데, 나는 그때의 멍청한 나를 바라 보는 게 아직 힘든가 봐.

경찰서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깊은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너무 횡설수설한 나머지대화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아. 도쿄 도심에 살다 귀향했다는 이야기 정도는 한 것 같다. 왜냐면 그 애가 자신도 도쿄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한 게 기억이 나거든. 나는 그 말을 듣고 기시감에 가만히 눈을 끔뻑이다가 문득 부끄러워져서, 바쁜 척을 하며 휴지로 옷을 이리저리 닦아내곤 작별인사를 했다.

얘, 사람은 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일생을 고향을 미워하며 보낸 사람도 왜 궁지에 몰리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나는 그저 내가 이곳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돌아왔어. 그 애가 지금 이바라키에 있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 애도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걸 알고 나니, 이곳의 까만 풀숲과 하얀 바다밖엔 떠올릴 수 없었던 걸까.

사실 이런 생각은 부끄럽다. 모르겠어, 그냥 그래. 남에 대해 뭔갈 너무 많이 짐작하는 건 낯간지러워. 그만할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와 같이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거야. ‘잘’ 이라는 말은 굶 주리지 않고, 제때 잠을 자며, 종종 외로운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내가 고향을 떠나간 후 한 번 완전히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건 잠들기 직전의 나를 위축 되게 해. 그래도 나를 잠 못 들게 하지는 않는다.

네가 그 애를 모종의 이유로 좋아했다는 걸 안다. 쑥스러움 탓에 나를 포함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보고 너에게 또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잘 지낸다고 네게 알리는 게 그렇게 좋더라.

말이 길었지? 이만 줄인다.

올해는 덥다는데 더위 조심하고, 사랑해.

고향에서, B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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