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인

백세 (6)

인고 실험체×연구원 AU

“민화인…”

비소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뇨. 아닙니다. 정신차리세요.

비소가 바라보는 공간은 다시 일그러진다.

끔찍한 고통이 비소를 뒤덮는다.

다시 비어있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이질적이던 흰 빛이 가득한 민화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비소의 눈 앞에는 검은 머리칼의 민화인이 서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비소.

“방금은 뭐야?”

뭐긴요. 방해꾼입니다.

나를 방해하는 것이요.

장치를 기용할 겁니다.

비소, 당신은 기동을 도와주세요.

민화인은 중앙의 기기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민화인은 걸치고 있던 가운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지만 기기의 기동을 위해 조작 단말장치 앞에 있던 먼 거리 탓에 비소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잠깐… 우리 작별 인사도 없는거야?”

필요합니까?

민화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비소.

누군가 비소의 이름를 부른다.

“응? 불렀어?”

헛소리 말고 장치 전원이나 올리세요.

민화인이 독촉한다.

비소는 찜찜했으나 이해했다.

오랫토록 준비해온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이라면 더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비소에겐 갑작스러우나, 민화인에겐 드디어 다가온 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서운했다.

-비소. 그거 건들지 마세요.

또 누군가 비소에게 말을 걸었다.

“뭐? 대체 어쩌라는거야?”

비소는 장치의 전원을 올리고 장치의 기동을 망설였다.

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기기 안에 있던 민화인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비소는 다시 단말장치로 시선을 옮겼다.

툭.

비소의 손에 하나의 테잎이 걸린다.

- 009 rec.

하. 드디어 조용해졌군.

인지는 인지를 덮을 수 있다는 말 기억합니까?

나는 드디어 나를 덮을 수 있는 인지의 간섭을 깨달았습니다.

결과, 나는 그를 이곳의 간섭에서 떨어뜨려놓게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도 물론 꼼수를 부릴 순 있지만, 고작 떨어져 나간 조각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주 쓸데없는 녀석이었습니다.

한시라도 돌아가기 바쁜 나날 중에 사랑? 하. 웃기지도 않지. 그것도 오로지 나의 목적만을 위해 탄생한 도구에 밖에 미치지 않는 녀석에게? 제 자격에 그딴 기만적인 행보가 납득이 될거라 생각하는건가?

아니면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다보니 정말 자기가 인간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던가? 풉. 푸하하하하!

아, 정말로 미개하군. 미개해!

“뭐…?”

비소는 녹음된 민화인의 목소리에 혼란을 느낀다.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 999 rec.

미안합니다 비소.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고개를 돌려 당신의 눈에 보이는 민화인을 저지해주세요.

당신들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당신은 그를 저지해야합니다.

이 기록은 기록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미 저녀석이 지겹게도 당신에게 시도했죠.

비소는 녹음 테이프를 내려다본다.

그것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굴러가는 테잎을 내려다본다.

비소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누구긴요.

-당신이 사랑해마지않은 민화인이죠.

“…네가 민화인이면 저쪽의 민화인은 누군데?”

-…저것 또한 나입니다.

-하지만 저건 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군요.

-저건 그저 혼란의 덩어리일 뿐이라 생각하세요.

-모든 것은 저녀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조금 아플겁니다.

“!!!!!”

소리조차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비소의 머리를 감싼다.

순간적인 격통에 몸을 휘청인다.

다시금 보이는 시야가 일그러지며 흰 빛으로 가득찬다.

비소의 인지가 뒤엎힌다.

흰 민화인이 눈을 감고 있으며, 그 아래로 검은빛의 ‘민화인’이 단검을 쥐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소는 ‘민화인’이 민화인을 해하려함을 곧바로 눈치챈다.

머리를 부여잡던 비소는 고통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달렸다.

‘민화인’이 민화인에게로 날을 겨누어 올려찌르려 했기 때문이다.

“멈춰! !!!”

비소는 달려가 ‘민화인’의 단검을 붙잡았다.

방해하지 마시죠. 내가 장치를 움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뭘 하려는건데! 저건 민화인 너잖아!”

저게 나라고요? 하하하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 저것 또한 민화인이지만. 저것은 절대 내가 아닙니다.

“칼이나 내려놔!”

비소가 민화인의 팔에 힘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꾸 귀찮게 마십쇼. 내가 당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온 건 내가 당신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하! 헛소리는 네놈이 하는 것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 놈들이 뭐가 좋다고 붙잡고 있는건지.

대화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로 빠진다.

‘민화인’이 비소를 내려다본다.

삐딱한 얼굴이 이내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당신이 날 못 믿는 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좋은 걸 보여드리지요.

그리고 다시금 비소의 인지가 뒤엎힌다.

이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다.

주위에 수많은 잔해들이 공중에 떠있다. 잔해들은 마치 찢기고 태워진것 마냥 처참한 상태였다.

비소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더 살핀다.

그곳엔 연구소가 있었다.

허공에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무척이나 어색한 관경이었다. 건물 안으로 생활하는 연구진들이 보인다.

마치 이들의 눈에는 바깥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이게 대체…”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죽을 놈들에게-.

‘민화인’의 말이 끊겼다.

다시 홀로 남은 비소가 연구소를 더욱이 관찰한다.

새하얀 건물.

아니 이것은 건물인가? 미묘하게 반투명하고 비소가 기억하던 갑판의 재질이 아니었다.

제가 인지를 도와드리지요.

비소는 홀린듯 연구소에 가까이 다가간다.

연구소의 외갑판은 마치 어떠한 태동과도 같이 흐름를 갖고 있었다. 잔잔하고 복잡하게 엉킨 이 흐름은 중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연구실 안에서도 보았던 새하얀 민화인이 눈을 감은채 연구소를 품고 있었다.

-비소 정신차리세요.

비소의 인지는 다시 뒤집혀 연구소로 돌아왔다.

‘민화인‘의 한탄이 들린다.

하, 여기까지 와놓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겁니까?

-돌아가도 결국 무로 돌아갈 뿐인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아주 많지요.

멋대로 나를 부르고, 주제도 모른채 나를 이해하려 들었다는 것. 뭐, 미개해서 인지조차도 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난 그런 미개한 것들의 방자를 인내해주기 어렵군요.

내 소소한 복수입니다.

넌 이해하잖아.

-유감스럽게도 이해해드리긴 싫군요. 당신의 복수는 그때의 난동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 거기서 끝내려했는데, 어떤 대-단하신 분께서 마지막을 다 망쳐버리셨잖습니까.

‘민화인’이 민화인을 노려본다.

*

당시는 민화인이 본인이 존재하던 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을 때였다.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민화인은 인지로 존재하는 존재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다.

그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감에 대한 의미는, 그가 이곳에 불려오기 전의 상태로 돌아옴을 뜻한다.

이는 그가 인지에서 벗어나 미시적 상태가 됨을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그가 돌아가기 위해선, 자신을 인지한 모든것을 지워버리면 된다.

다만, 절차가 필요했다.

민화인이 일으키는 모든 현상은 타인의 인지가 있어야지만 실현된다. 하여, 민화인은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매개체를 찾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연구원의 연구진 중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민화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연구진들에게 수많은 인지 간섭을 시도했었다. 인간격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지 시키는 것은 노력이 없어도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연구진이 된 민화인은 실험체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인지하는데에 부담을 적게 느낄 수 있도록 실험을 기획했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존재의 부담을 변형 시킬 정도로 다양한 우주 물질을 적용시켜 적응 시키는 일이었다. 굉장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민화인에게 그의 사정은 알바가 아니었다.

이 또한 인지로 조작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실험체는 천천히 진화되어 만들어졌다.

비소는 그렇게 탄생했다.

인지의 매개를 만드는데 성공한 민화인은 간섭의 영역에서 더욱더 자유로워졌다. 제한이란 보이지 않았으며, 그는 마침내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민화인은 망설임 없이 자신을 인지한 존재들을 지워버릴 계획을 바로 실행했다.

드디어 해방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비소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 말이다.

민화인은 이곳에 와, 자신의 정체에 대한 정의만을 학습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인류의 지식을 배웠고, 그들의 습성과 생각. 그리고 감성이라는 초월적인 추상 개념에 대해 이해하는 법을 익혔다.

하여, 민화인 또한 감정을 갖고 알게 되었다.

이는 민화인에게 망설임이 생겼음을 뜻한다.

민화인은 아주 짧은 찰나에 자신을 인지한 이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에 대해 망설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윽고, 이 망설임은 민화인에게 균열을 일으킨다.

웃기지마.

민화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하지마.

민화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줘.

민화인은 절규한다.

-그를 사랑하게 해줘.

민화인은 애원한다.

그렇게 인지는 뒤틀리고 개념은 변화한다.

‘민화인’은 돌아가기 위해 파멸을 택했다.

민화인은 사랑하기 위해 유지를 택했다.

‘민화인’의 의지로 연구원과 그 주의의 땅은 모조리 파괴되고 증발하였다.

하지만 민화인의 의지로 연구원은 유지되고 그 안의 연구진들 또한 지워지지 않았다.

민화인은 자신이 있었던 곳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민화인’의 지우기 작업에 새로운 인지를 덮었다.

파괴는 작은 사고였을 뿐.

사용 못하게 된 연구원은 폐쇄하고 일상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연구진들은 파괴된 땅에서 자신의 죽음조차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인지의 힘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민화인’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민화인은 자신이 아끼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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