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망각 - (상)

EAND by M0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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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사소한 것을 잊어버렸다.

 잠시 후 퇴근할 자크씨를 위해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사러 간 날. 평소였다면 망설임 없이 주문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 날은 한참을 망설이다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뭘 좋아했더라? 싫어하는 채소가 뭐였지?  그저 며칠간 밤을 세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가보다, 그 생각은 하지 말 걸 그랬다. 그것조차 며칠 후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챈 것은 한달 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늘어져있는 해루미들 사이에서 신작의 구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해루미의 생명력을 표현하려 했던 스케치는 어느 순간 자크씨의 얼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도 저 하늘의 태양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리고, 무슨 옷을 입었더라? 양복에 조끼, 넥타이... 넥타이 색이 뭐였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인상을 쓰자 놀란 해루미들이 우르르 달려와 에워싸고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모름지기 트레이너라면 포켓몬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 언젠가 자크씨가 말했던 것이 생각나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해루미들을 뜰로 내쫒아냈다. 꽉 쥔 손을 펴보자, 언제 부스러졌는지 손바닥은 흑연으로 새카맣게 반짝거렸다.

 자크씨에게 나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을 들킨 것은 한 계절이 지난 후였다. 혹시 자신이 싫어진거냐고, 눈 앞에서 주저앉은 채 펑펑 우는 자크씨를 달랬다. 그러다가 해루미의 우울을 만든 날 했던 약속을 기억해내지 못해 들키고 말았다. 약 때문에 그러겠거니 생각한다고 설득해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죽음의 색으로 가득한 곳에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약간 축축해지고 따끈해진 나보다 커다란 울보 용을 있는 힘껏 품에 끌어안자, 뺨을 간질이는 노란 머리칼에서 상큼한 향이 났다. 자크씨의 생일날 내가 선물했던 향수였다. 개인전 일정으로 누룩스시티에 방문한 날 상점가를 지나다 자크씨에게 어울릴것같아 샀던 향이었다. 그 향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확실히 자크씨를 잊어가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 나의 용. 팔자크. 기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다. 밖에는 내보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나의 선명한 햇살은 자물쇠가 걸린 아틀리에의 창고 속을 한가득 비추고 있다. 불안함에 팔을 긁자 핏물이 붕대 위로 스며나왔다. 날카롭게 새긴 세 글자가 어지럽게 흩어진 팔이다. 내가 기억해야만 하는 이름. 팔자크.

 피가 흐르는 상처와 딱지로 뒤덮인 팔로는 조각을 할 수 없어 나을때까지 당분간 쉬기로 했다. 다행히도 건강을 염려해준 리그 덕분에 관장일도 잠시 휴가였다. 리그가 소개해준 의사는 친절하게도 아틀리에까지 찾아와줬다. 팔의 상태를 살피고 붕대를 갈아준 의사는 조만간 병원에 한번 들러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정밀검사를 해보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거절하자, 팔의 상처 때문이라고 꼭 오라며 의사는 내게 명함을 줬다. 아틀리에의 밖으로 의사를 내보내듯이 배웅하는 길에 의사가 사적인 질문일수도 있는데 혹시 팔자크씨는 무슨 말 안하더냐는 말을 들었다. 팔자크. 내 팔을 잡아먹은 글자들. 누구지.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나의 일부분이었던 그 사람의 목소리도, 얼굴도 전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찢기는 듯 욱신거렸다. 다행히 새로 사귄 친구와 예술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조금 괜찮아져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난잡한 팔의 흉터에는 딱지가 내려앉아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가 없어져  조각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자, 친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면서 펑펑 울고 말았다. 드니차와 닮았을지도,라고 생각하며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건넸다. 하지만 역시 드니차보다는.

 새 친구는, 해루미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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