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엘 청게
리즈화이
아직은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스치는 겨울의 끝자락. 나는 그날 학교 운동장에서 너를 처음 봤다. 포근해 보이는 하얀색 목도리에 얼굴을 묻은 채 사람들 속에서 웃는 모습이었다. 스치듯 보이는 너의 눈동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담고 있었다. 살면서 맑다는 수식어가 그리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그만큼 너에게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에 나를 건드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난 그 자리에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겠지. 다시 널 찾으려 했지만, 남은 겨울이 모두 지나가는 동안 한 번 시야에서 사라진 너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봄날이 되어서는 어느새 바람은 따스함을 품고 왔다. 지나가던 복도에서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살랑이는 하얀 머리칼을 봤다. 그 사람은 하얀 목도리를 하지도 않았고 그가 파란 눈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꼭 그 사람이 너인 것만 같아서 무작정 쫓아가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그의 손을 잡아서 멈춰 세웠을 때, 가까이서 본 너의 하늘은 내 기억보다도 더 푸르렀다.
“눈이 예뻐서, 계속 찾고 있었어.”
그날 이후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도, 여름의 첫 소나기도 모두 너와 함께 봤다. 장마를 앞두고 한층 습해진 여름날, 복도에서 마주친 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는 나란히 선 너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너희, 진지한 사이는 아니지?” 하고 물었다. 장난이 섞인 질문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너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득 그런 너를 더 놀리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에게 “매우 진지한 사이입니다.” 하고 농담을 던졌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선생님은 이내 폭소하며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지나쳐 갔다. 그의 뒷모습에 성의 없는 인사를 하고서 다시 바라본 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파란 눈에 당황스러움을 가득 담고,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으로 꺼낸 말 한마디는 나를 고장 내는 데 충분했다.
“진지한 사이라는 건… 뭐예요?”
쿵.
여름날의 태양 빛이 부서지는 소리 위로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덧입혀졌다. 방금까지도 소란스러웠던 복도의 소음이 점점 희미해져 갔고, 습기를 머금은 눅진한 공기는 왠지 더 덥게 느껴졌다.
쿵.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 열기라면 목덜미까지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네가 왜 그런 반응인지, 왜 내 얼굴은 너를 따라 붉어지는지, 어째서 너의 눈을 피하게 되는지…. 나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쿵.
분명 장난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우릴 향해 둘이 사귀냐고 묻는 말을 웃어넘기는 것처럼, 그들이 네가 나를 찾을 때 내게 네 애인이 찾고 있다고 말을 전해주는 것처럼. 네가 나에게 소중하다는 사실만 담긴 작은 장난이었다.
나는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얼버무리면서 서투른 손길로 얼굴을 가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요동치는 이 심장 소리가 너에게는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옆에서 너와 맞댄 어깨 너머로 평소보다 더 뜨거운 네 체온이 느껴졌다.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면서 나의 고장 난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면 내가 몰랐던 것을 알 것도 같았다.
아, 화이트. 내가 널 좋아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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