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ㅈ같아서 지움 if 연성임
아스리오
시작은 아스터+리오셀의 첫만남이었지만
저는 로맨스가 없으면 글을 못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이 글은 if 아스터x리오셀이 되었습니다.
캐해 안했습니다. 스토리 이상합니다.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뒤로가기를 누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데 쓰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네가 찾아달라던 리오셀 네페르티말이야. 클레이버그였더라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얼굴은 가린 사내에게 검은 서류철을 건네며 말했다. 남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클레이버그?”
“그래, 네페르티로는 정보가 잘 안 나와서 더 털어봤더니 재밌는 과거가 있더라고. 어쩜, 안쓰럽기도 하지.”
여인의 얼굴에 연민이 스며든 것에 비해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 감정 없는 모습에 남자는 픽 웃음을 지었다.
“귀족 집안 도련님이셨네. 무슨 사정이 있어 그 안락한 가문을 뛰쳐나오셨나?”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거칠게 서류철을 열었다.
리오셀 네페르티 (리오셀 클레이버그)
네페르티 의상실의 소유주이자 수석 디자이너
28세, 178cm, 60kg
어릴 적 정신병으로 대외 활동이 적었음.
지속적인 치료로 정신병이 호전된 것으로 보임.
아셴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당시 11세 '헬리오 로스티안'의 치료기록이 있음.
클레이버그의 가신 가문인 로스티안의 이름을 사용, 헬리오 로스티안이라는 가명으로 치료를 진행.
마지막 치료기록 2년 후 헬리오 로스티안의 이름으로 디자인된 3벌의 옷을 공개. 반년 뒤 헬리오 로스티안 사망.
4년 전 네페르티 의상실이 오픈하면서 리오셀 네페르티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냄.
네페르티 특유의 세련된 디자인으로 디자인계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음.
1년 전 루이스 델핀이 고객으로 네페르티를 찾아간 것이 첫 만남.
그 이후로 고객과 디자이너 관계로만 만나고 있음.
“생각보다 델핀과 연관성은 많이 없고, 과거가 재밌네. 클레이버그는 용케도 이런 걸 숨기고 있었어.”
원하는 정보는 없었지만, 흥미로운 서류철 속 내용에 남자가 감탄했다.
“사교계의 소문 하나하나가 가문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 클레이버그가 가지고 있기엔 예민한 비밀이지. 특히나 직계에선 더더욱. 저 높으신 분들 체면 하나는 지극히 아끼시잖니?”
여자의 쓸데없는 설명에 남자는 짜증이 올라왔다.
“있어도 더러운 위상, 챙겨서 어디에 쓰나.“
"쓸데가 있나 보지?"
남자가 건조한 목소리로 하는 투정을 여자는 가볍게 받아쳤다.
남자는 서류철 사이에 끼어있던 리오셀 네페르티의 사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진 그 너머의 리오셀을 바라보는 것처럼 강한 시선이었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엔 원하는 게 뭔데.”
여자는 올 게 왔다는 생각으로 냉큼 말을 이었다.
“아니… 다름이 아니라 그 서류철 안의 네페르티씨가 6개월짜리 경호 의뢰를 맡겼어. 아스터 바헤르의 경호가 필요하대.”
“나?”
“응, 너.”
지금까지 아스터가 받아왔던 의뢰는 대부분이 타겟 제거, 잠입, 조직 소탕 등의 거친 의뢰였다. 그랬는데 난데없이 얌전한 경호 의뢰라니.
“…나보고 경호를 하라고? 얘를?“
“아무래도 그렇지?”
“안 해.“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는 거절하고 방을 떠나려 했다. 여자의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안 돼, 보스가 직접 부탁하는 의뢰야. 이걸 너에게 꼭 맡기고야 말겠대.”
아스터는 ‘보스‘라는 인간의 끈질긴 고집을 알고 있었다. 이 의뢰를 거절했을 때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질 것인지는 더더욱 잘 알았다. 얌전히 받아들이는 게 여생에 좋았다.
“…언제 시작인데.“
아스터는 온몸에서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런 아스터를 보면서 여자가 세상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안,“
“안 돼, 안 바꿔줘.”
제기랄.
“키가 좀 작은데?”
리오셀이 아스터를 처음 보고 뱉은 말이었다.
뭐지? 싸우자는 건가?
아스터는 귀를 의심했다. 의뢰 내용을 듣자마자 다음날 바로 시작한 것도 불만이 많아 죽겠는데, 사람 불러놓고 1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더니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저게 지금 사람 면전에다 대고 하는 소리가 맞는 건지.
아스터는 평소 자신의 키가 큰 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에게나 목숨은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스터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은 상태다. 억지로 받은 의뢰에 경호 대상은 첫 만남에 (아스터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예민한 키 이야기로 성질을 건드리니 아스터의 생각은 정상적인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기는 뭐 얼마나 크다고.“
이런, 아스터의 필터링이 꺼졌다. 아스터는 군인 시절 미친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아가리로 털어버린 경험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사람 혈압 오르게 만들어 뒤로 넘어가게 했던 싸가지가 재림했다. 이젠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 나갔다.
”뭐라고요?“
리오셀이 까칠하게 되물었다. 리오셀은 어이가 없었다. 나 그렇게 작지 않아, 비율이 좋아서 티도 안 난다고!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아스터는 퉁명스럽게 뻔한 거짓말을 했다.
"아닌데, 했는데. 나 들은 것 같은데.“
리오셀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따졌다. 날카로운 인상이 눈살까지 찌푸리니 꽤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잘못 들으셨습니다. 귀에 문제가 생기신 것 같은데 병원 예약 잡아드립니까? 아, 귀가 아니라 머리가 문제인가.“
물론 그것에 겁먹을 아스터는 아니었다. 시비 거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야.”
분명 자신이 먼저 때리긴 했지만, 얻어맞은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리오셀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아닙니다.”
아스터가 재빠르게 부정했지만 그게 안 들렸을리가. 이미 리오셀의 귀를 통해 전두엽에 박힌 지 오래였다.
"너 나가.“
바로 리오셀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경호 임무 중입니다. 못 나갑니다.”
아스터는 의뢰를 핑계로 남아있어 보려 했지만, 그는 을이었다. 리오셀은 갑이었고.
“아니, 고용인은 나야. 나가.”
-쾅
문이 강하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스터는 작업실 밖으로 쫓겨났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성격이 더럽네.“
리오셀에게 맞아서 쓰라린 등은 덤이었다.
“손은 맵고…. 쓰읍, 아픈데.”
한편 작업실 안에 있는 리오셀은 속에서 차오르는 짜증에 몸부림쳤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저런 모자란 놈이 눈앞에 알짱거리고 있으니 저절로 머리를 쥐어 뜯을 수밖에 없었다. 두통이 몰려왔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쟤 맞아? 사람 잘못 온 거 아니야? 쟤가 아스터 바헤르라고? 거짓말하지 마! 쟤가 어떻게 아스터 바헤르야?"
-밖에서 다 들립니다.
문밖에서 아스터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오셀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스터의 목적이 절반은 성공한 순간이었다.
방금 그 한마디로 머리끝까지 올라온 짜증에 리오셀이 소리 질렀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아스터 바헤르의 리오셀 네페르티 경호 첫날이었다.
리오셀은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종이를 뚫을 기세로 바라보는 리오셀에 아스터는 슬슬 눈치가 보였다.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그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리오셀이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편지에 고정된 채였다.
“심각하다면 심각한 일이죠. 방금 당신이 진짜 아스터 바헤르라는 확답을 받았거든요.“
아스터는 진지한 대답이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내가 진짜 아스터 바헤르라는 확답이라니. 아닌 줄 알았던 거야? 아스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제가 사기치는 줄 알았습니까?”
목소리에서도 억울함이 흘러넘치는 아스터를 앞에 두고 리오셀은 표정 하나 변하는 것 없이 당당하게 따졌다.
“그럼 그걸 의심을 안 해요? 첫날의 그 태도를 보고서?”
아스터와 리오셀은 서로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아스터는 최근 몇 년간 당해본 적 없는 취급이 서러웠다. 팔자에도 없는 경호 의뢰를 받아서 이런 취급이라니 서러움은 배가 되었다.
“저 의심이라던가, 불신 같은 그런 취급 처음 당합니다.”
“나도 이런 경호 처음이에요.“
리오셀 또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류층 특유의 돌려 까기에는 익숙해도 눈앞에서 싸우자고 덤비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자존심이 있어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돌아오는 수치심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럼, 왜 저를 골랐습니까? 제대로 된 경호원을 바랐으면 다른 사람을 찾았어야 합니다.”
아스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곱상하게 대우받는 경호를 바랐다면 자신을 찾아선 안 됐다. 자신은 대우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줄 몰랐다. 애초에 이렇게 연약한 사람도 처음이었다.
“…당신이 경호 의뢰를 받지 않는 사람이니까 원한거에요. 그래야 아버지가 회유할 수 없을테니까.”
리오셀은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리오셀에게는 아스터의 신뢰가 필요했다.
“난 집안을 나왔고, 그 이후로는 가끔 어머니의 편지만 받는 수준으로 지냈는데 최근에서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내게 경호를 붙일 준비를 한다더군요. 경호는 무슨, 감시인게 뻔하지. 나는 내 일거수일투족의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 안위 문제가 핑계라면, 내가 먼저 경호를 구해 그 핑계를 없애겠어요. 그래서 필요한 게 당신이에요.”
리오셀의 집안이라면 클레이버그일 것이다.
클레이버그. 가문의 이름을 건 악단이 있는 음악계에서 명망 높은 가문이다. 클레이버그의 피가 흐르는 자는 지고한 음악의 여신, 에우테르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소리를 다루는데 특출난 재능을 자랑한다. 가문의 모두가 음악을 향한 사랑이 정도를 넘어 집착에 다다랐다고도 한다. 그런 클레이버그를 나와 옷을 만든다라….
‘사정은 이해된다. 다만, 왜 날 믿는 거지?‘
“저는 안 넘어갈 것 같았습니까? 무슨 확신으로?”
“당신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생각보다 겁이 많아요, 잃을 게 많거든. 그리고 당신의 소문이 이미 거칠어서 무작정 거래를 제안하기에는 좀 어렵죠.”
리오셀은 태연한 척 웃었지만, 아스터는 그 속의 자그마한 긴장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제가 계속 당신 곁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알아요. 잠시면 돼요. 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때까지만 옆에 있어 줘요. 너무 오래는 아닐거에요.”
“가능한… 오래 있어 보죠.”
아스터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마음에 드는 조건 하나 없던 의뢰였다. 사람도, 내용도, 기간도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맞춰진 조건은 없었다. ‘보스’의 강요가 아니었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의뢰인데, 어째서 자신은 왜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이지? 분명 나쁜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없었다. 사람이 너무 얇아서 그런가? 막, 약해 보여서 그런 건가?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는 생각을 멈춘 건 리오셀이었다.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면서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아스터는 그 얼굴에 눈을 고정했다.
“그것 참 마음에 드네요.”
이미 시작한 의뢰는 무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6개월, 짧은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 의뢰가 끝나는 순간까지는 의뢰에 충실해야 한다. 이번 의뢰는 네페르티 경호이니 앞으로 6개월 동안에 나의 최우선은 리오셀 네페르티가 된다. 그래, 단순한 의뢰라고 생각하자.
.
.
.
“근데, 부모가 당신 나이는 알고 있는 거죠?”
갑자기 드는 의문에 아스터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나 아들을 너무도 어리게 알고 있는 탓에 일어난 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알아요, 스물여덟.”
아네…, 왜지…?
“….”
“조용히 해요.”
아스터는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억울했다.
“저 이번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얼굴로 말하고 있잖아요. 얼굴 간수 잘해요, 거슬리게 하지 말고.”
아, 표정을 읽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근데 말을 꼭 저렇게 하냐.
“…유의하겠습니다.”
불만이 있어도 아스터는 고용인이었다.
아스터 바헤르의 리오셀 네페르티 경호 셋째 날이었다.
리오셀은 바른 자세로 서있는 아스터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쭉 훑었다. 적당히 두꺼운 몸을 감싸고 있는 슈트의 선이 예쁘게 떨어졌다. 리오셀이 머리를 스쳐 가는 감상을 본인도 모르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몸은 좋네. 머릿속으로 생각한 소리가 다시 귀로 돌아오자, 본인이 더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마음에 듭니까?“
대답이 돌아올 줄은 더 몰랐던 탓에 리오셀이 당황해 버렸다.
“예?…아뇨, 그, 모델로는 찾기 힘든 몸이다, 뭐 그런 거죠.”
리오셀이 아스터의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괜히 부끄러움에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들리는 모든 말에 대답을 해요? 사람이 혼잣말을 좀 할수도 있지 그걸 다 대답하고 있어요?“
아스터는 날카로운 리오셀의 시선에도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아뇨, 그건 아닌데 저한테 하는 말 같아서 말입니다.”
평범한 대답도 아스터가 하니 마음에 안 들었다. 리오셀이 인상을 쓰면서 투덜댔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답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아스터는 조용했다. 리오셀이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스터를 재촉했다.
“뭐야, 왜 대답 안 해요. 알겠냐고요.”
아스터가 뻔뻔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름 안 부르셨잖습니까.“
진짜 쟨 왜 저럴까. 그래, 미안하다. 이번엔 내가 잘못했다. 리오셀은 다시금 올라오는 혈압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아니, 알겠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을 좀 해줘요. …바헤르씨.“
“알겠습니다.“
대답 한 번 듣기 어려웠다. 리오셀은 계속해서 말을 걸면 화가 날 것 같았지만 이건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사람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지? 원래 좀 불필요한 곳에서 깐깐해요? 솔직히 말해요, 나한테만 그러죠?”
사실 리오셀도 아스터가 유독 자신한테만 이상하게 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직접 저 입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이상한 고집이 생겼다. 저 봐라, 또 이름 안 불렀다고 대답을 안 하는 꼴이었다. 리오셀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 이름 한 번 불러주고 말지.
“…바헤르씨?”
아스터의 입꼬리가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에는 대견함이 배어있었다.
‘잠시만, 대견함?’
“눈치가 없진 않으십니다.”
장난하나.
“나가.“
꽤 여러 번 쫒겨났다고 이젠 나가는 뒷모습이 익숙하다. 리오셀은 뒷목이 당겨왔다. 쟤가 눈앞에 있으면 되는 일도 안 돼.
아스터 바헤르의 리오셀 네페르티 경호 보름 되는 날이었다.
최근 날씨가 풀리면서 리오셀의 할 일이 많아졌다. 의상실을 찾아오는 손님부터 예약, 거래, 신상 준비 등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오로지 일 뿐이었다. 최근 며칠간은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오늘도 그럴 예정이었다.
“오늘도 먼저 들어가요. 내일 봅시다.“
리오셀은 네페르티의 신상 디자인을 손보면서 아스터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도 기어코 밤을 새우겠다는 의지가 다분한 말이 아스터에게 불편하게 다가왔다.
“…댁에 안 들어가신 지 좀 된 것 같은데 데려다 드릴까요?”
아스터는 며칠째 잠도 안 자고 일하는 모습이 걱정되었다. 집으로 돌아가 잠이라도 편하게 잘 것을 제안했으나 리오셀은 단호했다. 눈은 여전히 스케치에 고정하고 있었고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내일 일정 때문에 조금 힘들 것 같네요.”
결국 의상실에서 밤을 새우겠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의상실에는 몸을 누일만한 공간도 없었다.
“이곳엔 잠들만한 곳이 없습니다."
“안쪽에 소파 하나 있어요. 거기서 잘 거에요.”
아스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안 잘 거다. 밤을 새운다는 것에 내 손목을 걸지. 저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니 아스터는 이상한 오기가 들었다. 내가 널 재우고 말 것이다.
“댁으로 가서 주무시는 게 컨디션 관리에 더 좋을 텐데요.”
“한번 자면 잘 못 깨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할 거에요.”
잘 못 일어나서 안 잔다고?
“깨워드립니까?”
내가 깨워주면 될 일이지.
이쯤 되면 자는 게 나을 것이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아스터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아스터는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방법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제발 자라. 이러다 너 쓰러지는 꼴 보게 생겼다.
“네?”
리오셀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아스터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잘 못 깨는 게 문제면 제가 깨워드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안 늦을 수 있어요?”
리오셀은 피식 웃으면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물론 아스터는 진심이었다.
“늦으면 뭐, 제가 여기까지 업어서 모셔다드리죠.”
“허, 들 수는 있고요? 늦기만 해봐요. 진짜 가만 안 둬.”
리오셀도 피곤이 쌓여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상태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슬슬 휴식이 필요했던 찰나에 아스터가 그리 제안해 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깨우면 일어나기나 하십시오.”
결국 아스터는 리오셀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퇴근했다.
리오셀이 잠에서 깨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스터의 등 위에 업혀있는 상태였다. 리오셀은 도저히 이해되지않는 상황에 아스터에게 따졌다.
“지금 이게 뭐예요? 날 왜 업고 있어요? 난 분명 깨우라고만 했는데?”
아스터는 평온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답했다.
“제가 당신을 업고 의상실로 가는 중이고, 난 분명히 깨웠지만 당신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제 제가 늦기 전에 업어서라도 데려다준다고 했을 텐데요.”
분명 답을 들었음에도 리오셀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그걸 누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요…! 아니, 그전에 옷은… 옷은 어떻게 한 거에요. 설마, 아니죠?”
잠옷이 아닌 외출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리오셀이 급하게 물었다.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아쉽게도 신은 리오셀의 편이 아니었다.
“제가 갈아입혔습니다. 나체를 봤냐고 묻는다면, 예, 봤습니다. 졸려서 그런가, 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데요.”
“미쳤어요? 그걸 왜 봐요?“
리오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걸 봤다니! 고분고분했다니!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이게 무슨 추태인지. 수치심에 온몸이 떨렸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그 와중에 아스터는 평온할 뿐이었다. 리오셀은 평온한 아스터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가 아직도 자신을 업고 있는 건 더더욱 불편했다. 리오셀이 아스터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나 잠 깼어요. 빨리 내려줘요.“
“싫습니다.”
물론 아스터는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장난해요?“
리오셀은 어이가 없었다. 날이 지날수록 아스터는 알 수 없었다.
아스터 바헤르의 리오셀 네페르티 경호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리오셀은 고심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구체화되지 않는다. 추상적인 단어와 흐릿한 형태로만 존재했다. 삼일 밤낮을 잠을 안 자면서 이 일에만 몰두했다. 다른 일은 다 밀어두고 이 디자인만 붙잡고 있었는데도 제대로 된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리오셀이 머리를 부여잡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돌렸다. 영감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루이스를 무작정 찾아갈 수는 없었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내게 영감을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 모델. 차리리 모델이 있어 준다면….
그 순간 리오셀의 시야에 들어온 손이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었지만 예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리오셀의 시선이 눈앞의 손을 지나 뼈대 굵은 손목을 거쳐, 두꺼운 근육이 예쁘게 자리 잡은 팔뚝 위에 아스터의 눈을 바라봤다.
아스터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핥으면서 바라보는 리오셀의 시선에 부끄러워졌다. 왜… 그러는 거지…?
“펜… 떨어졌습니다.”
리오셀의 머리를 지나는 한 가지 생각.
‘그래, 네가 필요해.’
“바헤르, 몸 좀 빌려줘요.”
생각보다 더 이상한 부탁에 아스터가 눈을 크게 떴다.
“예…?”
평소 같으면 진작에 변명을 시작했을 리오셀은 없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 내가 왜 좋은 걸 눈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지?”
리오셀의 필터 빠진 말은 아스터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 좋은 거라니요…?”
아스터는 서둘러 손을 올려 가슴 앞에서 엑스자(X)를 만들었다. 자신의 순결이 위험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결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위험했다.
리오셀은 손을 뻗어 아스터를 당겨서 그를 책상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스터는 어리둥절한 채로 끌려가자마자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자켓, 넥타이, 와이셔츠…. 아스터는 살면서 그렇게 빨리 단추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 아니…! 네페르티, 잠깐!”
“쓰읍!”
아스터는 저항했지만 리오셀을 이기진 못했다. 아스터는 점점 더 풀려가는 와이셔츠 단추를 느끼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리오셀을 만나고 처음으로 쫓겨나고 싶었다.
‘제발 나가게 해줘….’
아스터 바헤르의 리오셀 네페르티 경호 석 달째 되는 날이었다.
리오셀이 고대하던 루이스와의 약속은 망했다.
약속 장소에는 루이스와 그의 약혼녀인 칼리아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리오셀의 짝사랑이 망한 사랑이라는 게 결정되는 심판의 날이었던 것이다. 온몸이 물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터지기 직전의 댐을 제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알코올이 들어가야 한다.
리오셀은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해왔다. 중독에 의존하는 삶은 쓸데없다고 취급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해가 되는 중독을 싫어했다. 사실 술 깨고 나서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 같은 디자인에 치가 떨리는 것도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면서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는 날을 버티기 위해 마시는 것이었고, 리오셀의 그날이 오늘이었다.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아스터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금 술이 필요해요. 따라와요."
아스터는 자신을 이끄는 리오셀을 군말 없이 따라갔다.
잘 가던 리오셀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난데없이 길거리 한 가운데 서있게 된 아스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오셀을 바라봤다. 아주 오래 고민하던 리오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는 술집 있어요…?”
“…따라와요.”
그랬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늦은 밤까지 영업하는 술집을 알 리가 없었다. 아스터는 조금 가라앉은 미소를 보이고는 리오셀을 이끌었다.
술집에 자리를 잡은 리오셀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부었다. 즐기는 것도 아니고,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위장에 부었다. 저 얇은 몸에 저만한 술이 들어가는 것도 신기했다. 보다 못한 아스터가 리오셀을 말렸다.
“그만 마셔요. 내일 힘들어.“
“아니, 마실 거야. 내일 죽든지 말든지.”
리오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부었다. 아스터는 앞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오셀은 마지막 잔을 다 털어 넣고서야 테이블에 쓰러졌다. 머리를 박은 리오셀의 뒤통수를 보던 아스터가 리오셀을 일으켜 업었다.
“일어나요, 집에 갑시다. 데려다줄게.”
“누구세요…? 당신 옷 진짜… 못생겼다….”
싱상 이상의 술주정에 아스터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해 줘도 난리야.
“당신이 입혀준 건 기억 못 하지?”
그리고 일부러 마음에 안 드는 옷 준 거 알아, 멍청아. 너 아니었으면 이런 옷도 안 입었어.
술집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새벽의 찬 공기가 술기운에 뜨거워진 뺨의 뺨을 식혔다. 등 위에 업힌 리오셀은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어떤 때는 루이스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사랑 고백을 하기도 했다. 아스터는 눈앞에 없는 사람 찾는 소리에 기분이 바닥을 찍었다가도, 가끔가다 그를 부르면 또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바헤르…, 넌 사랑해 봤어? 난 망했다…. 말도 못 하고 차이는 게 너무 아프다….”
리오셀은 술에 취해 온갖 말을 다 했다. 존댓말은 갖다버린 지 오래였고 평소 기를 쓰고 숨기고 다니던 짝사랑을 떠벌대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 넌 절대 모를걸….”
조용히 리오셀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알 것 같은데. 지금.“
“으응….“
리오셀에게 닿지 못한 말은 공기 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적막이 깃든 새벽 거리, 아스터는 리오셀을 업고 걸었다. 내일은 그의 눈물이 그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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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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