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타와 미오리네

미오리네 씨, 자르지 마세요!

미오리네의 머리카락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신랑

“결사 반대에요!”

“하든가 말든가!”

보글보글. 지글지글. 저녁을 준비하던 단란한 소음을 차갑게 식혀버린 외침이었다. 깜짝 놀란 마틴이 놓친 접시를 틸이 받아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식기를 놓던 릴리크는 전혀 상관 없는 제 입을 헙하고 두 손으로 막아버렸고, 덕분에 흔들리는 숟가락과 포크를 누노가 빠르게 붙잡았다. 과거부터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낸 그들의 합이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그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쉽게도 없었다.

이 중 가장 눈치가 빠른 동시에 앞 뒤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아리야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오제로가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고, 숨막히는 부엌을 차례차례 재빨리 빠져나왔다.

정원에 나오기 전까지 숨소리가 날까 슬쩍 호흡까지 참고있던 릴리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제 소리 내도 돼. 숨 쉬어, 릴리크.”

“후하.”

“마틴. 조리대 불 끄고 나왔어?”

“헉!”

“내가 껐어.”

“역시 틸이야.”

소곤소곤.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마틴은 땅이 꺼져라 숨을 뱉으며 주저앉듯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뭐야? 둘이 싸우는 거야? 우리 저기 있으면 안되는 분위기인거지?”

“아무래도 그렇지.”

“슬레타가 소리 치는 건 오랜만에 듣네.”

“난 저런 거 중재 못한단 말이야. 차라리 니카랑 추추가 있었다면….”

“니카라면 모를까, 추추가 하는 건 중재가 아니라 깽판이잖아.”

“다툼을 끝내주긴 하겠지.”

“싸움을 ‘끝내주게’ 하는 거겠지.”

“너흰 지금 농담이 나와?!”

“다들 가만 있어봐.”

쪼그라든 키만큼이나 새된 소리를 내지르는 마틴의 뒤로 아리야가 불쑥 솟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성대에 힘 준 마틴의 입을 턱 막았다. 얹혀진 손에는 꽃잎이 다 떨어진 들꽃줄기 하나가 바람에 나부꼈다.

“잠깐 산책하고 오면 될 거야.”

그녀의 점술 실력도 사람을 보는 눈도 인정하는 친구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산책하고 와서도 저 상태면 어떡하지….”

“지각한 니카랑 추추 데려가야지 뭐.”

“그러다 진짜 추추가 집 엎어버리지 않을까?”

아리야는 흘깃 뒤쪽에 놓인 집을 바라보았다. 괜한 걱정이 송송 올라왔지만 아리야는 끝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집 안, 성내느라 손님들이 자리를 비켜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두 신랑신부가 언성을 높였다.

“싫어요! 절대로 안돼요!”

“네가 안된다고 하면 내가 못할 줄 알아?”

“그, 그러면 제가 엄청 슬플 거예요…!”

“…그낭 머리카락 좀 자르겠다는 거잖아!”

“하지만 미오리네 씨 머리카락은 정말 가느다랗고 고와서 예쁘단 말이에요! 자르다니 너무 아까워요…!”

“불편하단 말이야. 나도 대표로서 성숙한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도 있고!”

“미오리네 씨는 이미 훌륭한 대표잖아요!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제가 가서 따, 따질게요!”

“넌 어차피 회사에 오는 거 부담스러워하잖아!”

“저는 미오리네 씨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날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 있으면 머리카락은 왜 안되는 건데?”

“아침마다 미오리네 씨 머리카락 빗는 걸로 제가 얼마나 행복해지는데요. 제 빗자루 같은 머리털과는 달리 부드러워서 좋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밤마다 네 머리를 좋다고 만지는 나는 뭐가 돼? 애초에 너 단발 좋아한다며!”

“제가요?!”

“저번에 우리 회사 홍보모델 짧은 머리 어떠냐고 나한테 물어봤잖아!”

“그건…미, 미오리네 씨가 그 모델 분을 골랐다고 해서… 그런 걸 좋아하시는 건가 궁금해서….”

“…네가 하려고 했어?”

“에리가 저희 집안은 악성 곱슬이라 엄청 뻗치니 그만두라고 해서 하지는 않았지만요….”

“바보 아냐? 넌 무슨 머리를 하든 내가 데리고 살 거니까 상관 없잖아.”

“우으… 하지만 미오리네 씨의 머리카락이 짧아지면 아침에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게 되잖아요. 미오리네 씨가 아무리 바빠도 머리 정리 시간은 저랑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럼 앞으로는 남는 시간 동안 더 붙어 있으면 되잖아, 바보 슬레타.”

“미, 미오리네 씨…!”

“…니네 뭐하냐?”

결국 친구들과 뒤늦게 합류해 방문한 추추의 분노어린 난입으로 상황은 일단락 되었다. 아리야는 이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 미오리네는 어릴 때부터 기르던 머리카락을 단정히 잘랐으나, 부부의 아침 시간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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