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간이 겨울을 지날 때
사람을 위로하는 데에는 딱 두 가지만 있으면 돼.
<겨울나기>
늦가을, 북부 자작저
“이번에 부탁할 물건은 없나?”
“으음, 흠. 아마도? 당장 생각나는 건 없으니 몸 성히 오기나 해.”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아침이라기엔 이른 시간부터 성의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 소규모로 이루어진 인원 뒤로 말들이 이끄는 수레가 따라 붙었으니 공적인 일을 해치우기 위해 꾸려진 인원임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거란 사실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선봉에 선 이는 성주인 이바르 베르트손과 아예 성에 자리를 잡아버린 객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로, 오늘 자작성을 떠나는 이는 이바르였다. 객이 주인을 배웅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로시난테는 얼굴이 겨우 보일 만큼 털망토와 외투 따위로 단단하게 무장한 채였다. 주변인들이 비교적 가볍게 채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날이 냉해질 즈음부터 이것저것 방한용품을 꾸리더니 아직 가을의 끝물에도 밖에 나올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유난을 떨었다. 동이 트기 전 훅 불어온 한기에 묵직한 천자락이 딛는 걸음마다 장막처럼 흔들렸다.
“자네도 이젠 나이가 있잖아.”
“피차 마찬가지지.”
“흐음~ 나는 이번에 안 나가는데?”
북부의 정점에게 이런 염려가 얼마나 우습게 들렸을지는 차치하자. 이바르 역시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로시난테는 뒤를 돌아 수행인들에게 몇 번이고 강조했던 당부를 또다시 읊었다. 뭔갈 사고 싶다면 일단 반값은 후려치고 시작하라는 괴상한 조언도 함께였다. 적막한 성 안에 말발굽 소리와 유쾌한 목소리가 섞여 울렸다.
도개교를 지나 어느새 성곽의 끝자락이다. 방벽마냥 곧게 솟은 산맥 너머로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로시난테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해 나란히 속도를 맞추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종이 새라도 날려 보내지. 높은 확률로 너덜너덜 해질 것 같긴 하다만.”
“읽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군. 차라리 전서구를 보내.”
“이 시기에 귀중한 재산을 낭비하기도 좀 그렇지 않아? 그렇다고 정령을 보낼 순 없잖아. 자넨 그네들 목소리를 못 들으니까. 그러니 종이 새로 만족하게.”
종이 새도 나름 전서구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하지 않는 데에는 일정 수준의 인내가 필요했다. 먼 길을 다녀올 이에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짧은 행렬이 성벽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즈음 로시난테가 옆으로 빠져 물자를 간단히 점검했다. 짐마차의 연결고리 하나까지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는 이바르를 필두로 다들 말 위에 올라 채비를 했다. 성벽 너머의 길은 아직 얼지 않았으므로 당장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빨랐다. 이바르가 뒤를 돌아보며 두를 헤아렸다. 말이 가볍게 앞굽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정말 출발이 머지 않았다.
“다녀 와.”
“그래.”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배웅을 마친 뒤로는 말굽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마지막 수행인까지 성벽을 통과한 뒤에야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벽을 울리는 충격에 마른 먼지가 잠시간 붕 떠올랐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이바르가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성이 아주 오래 비어 있지는 않겠지만, 떠난 이들이 돌아올 즈음에는 겨울이 당도하고도 남을 시간이기도 했다. 그 계절을 겨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안으로 방비해야 하는 일들 역시 적지 않았다. 아주 많이 쌓여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일들을 하나둘 씩 처리하다보면 빈 자리를 체감할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되리라. 가끔은 적막함을 온전히 누리는 일도 기껍다. 외로움보다는 크지만 고독이라 명명하기엔 시시한. 가을의 마지막에 제법 어울리는 감각이기도 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로시난테는 머잖아 걸음을 돌려 자작성으로 향했다. 마른 모래가 밟혀 버석한 소리를 낸다. 이제는 동쪽을 등지고서도 하늘이 환했다.
***
며칠이 지나 늦은 오후였다. 집무실 안에 훈훈함이 가득했다. 날이 추워질수록 땔감을 많이 때는 건 사용인들의 배려일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몇 번이고 강조했음에도 집무실과 그의 방만큼은 늘 적정한 수준의 온기가 돌았기에 로시난테는 한파가 들이치는 시기에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가벼운 차림으로 내성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환기도 필요한 법이다. 내부의 공기를 갈아치우든, 머무는 생각들을 뒤집어 엎든. 때마침 외부에 근원을 둔 속삭임이 알맞은 순간에 들려왔다. 집무실에서 종이를 정리하던 로시난테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들린다’기보다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전언에 가까웠지만, 정령사로 짧지 않은 시간을 살다 보면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마치 문을 열라는 듯 종용하는 음성. 아주 가볍고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자들의 잠시간의 유희. 그런 것들에 어울려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성주가 자리를 비운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두터운 유리 너머로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므로 기껏 정리해둔 종이들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잘 고정해두어야 했다. 묵직한 흑철 문진으로 서류 더미를 눌러둔 로시난테가 창문을 열었다. 찬 기운 머금은 바람이 금세 방 안을 휘감듯 들어차 온기를 외부로 내몰았다. 훈풍이 가신 집무실에는 오직 서늘함만이 맴돈다. 로시난테가 가벼운 웃음기와 함께 운을 떼었다.
“어이고, 추워라. 짓궂은 건 변칠 않군요.”
‘네가 너무 약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이만큼 살았으면 약해질 법도 하지요.”
로시난테는 정령에게 방 안을 어지르지 말라며 가벼운 주의를 주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라고는 하지만 시답잖은 내용이 주였다. 오늘의 날씨는 어떻다느니, 올 겨울은 그리 춥지 않을 거라더니 벌써부터 이렇게 날이 차면 어쩌냐는 둥. 정령도 꼬치꼬치 답하는 모양새를 보니 고작 하루 이틀 만난 사이는 아닌 듯 했다.
북부에 도착한 이래로 그는 종종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에는 특히 허공을 향해 한두 마디를 건네곤 했는데, 정령들 역시 계약보다는 한때 정령사였던 이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었으므로 시답잖은 수다를 나눈 뒤엔 흥미를 잃고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들 역시 없지는 않았다. 지금의 정령처럼. 이 이름 모를 정령은 자작성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기 일쑤였고, 날이 추워질 즈음에는 꼭 한 번씩 이렇게 들어와 내부를 헤집고 훌쩍 떠나가는 모습이 참 변덕스러우면서도 꾸준했다. 로시난테가 의자에 걸쳐둔 겉옷을 가볍게 걸치며 말을 이었다.
“올해도 눈은 내리지 않을 모양인가 봅니다.”
‘글쎄?’
“그렇게 답한 게 벌써 몇 번 째인 줄은 기억 하십니까?”
‘그것도, 글쎄.’
말버릇을 흉내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혀를 찰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신 항의의 의미로 창문 한 쪽을 밀어 닫는다. 경첩이 맞물리며 긴 소리를 냈다. 로시난테는 창틀에 몸을 기대고서는 눈앞의 정령을 응시했다. 아래로 내려묶은 머리칼이 어깨에서 떨어져 벽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네가 왜 그렇게 겨울에 목을 매는지 이해가 안 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보다는 싫어하지 않는다. 이쪽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그거지. 말장난하기는.’
금빛 담긴 시선이 잠시간 외성을 일별한다. 계절이 한 해의 끝을 향해 가기 시작하며 이른 저녁부터 금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팔뚝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로시난테가 가볍게 팔짱을 꼈다. 벽에 기댄 고개가 시선을 따르듯 자연히 옆으로 돌아갔다.
“약속한 게 있어서요. …그전까지는 살아있어야 할 텐데. 나이가 드니 몸이 영 제 기능을 못 합디다.”
‘그런 것치고 제법 오래 살지 않았어. 당신만큼 산 인간도 드물걸.’
“그러니 더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유예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니.”
이바르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성내는 월동 준비를 대강 마쳐 이제 분주함이 잦아들었다. 그가 돌아올 즈음엔 많은 것이 변해있으리라. 아니면 무엇도 변하지 않거나. 자작성은 계절을 불문하고 많은 나날이 고요했다. 그 모습이 꼭 성주를 닮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잇새 사이로 흘렀다.
성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했다. 삶의 대부분을 겨울과 함께 보낸 자와 삶의 많은 부분을 계절과 함께 보낼 사람들, 과거에 남아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과 예정되지 않은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사람을 두 가지 중 하나로 구분짓기란 언제나 어렵다지만 이것만큼은 구분할 수 있었다. 끝을 기약하는 자와 미래를 응시하는 자들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로시난테는 겨울을 기억하는 자였다. 그들 사이에서 아주 조금, 무의미한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반만 열린 문 틈으로 푸른 기 도는 빛이 훌쩍 빠져나갔다. 방 안의 한기는 여전했지만, 어쩌다보니 정령이 밖에서 들어오는 한기를 막아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디선가 비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계약이라도 할래?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아하하. 뭐가 됐든 목숨을 내맡기는 건 생에 한 번으로 족합니다. 두 번은 없어요.”
‘아쉽게 됐어.’
“그리고 당신은 그럴 힘이 없잖습니까? 이래봬도 대정령과 계약했던 몸이라, 보는 눈이 없지는 않아요.”
‘아야, 그건 좀 아프다.’
빛무리가 이젠 어둠이 내려앉은 곳을 가만히 맴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저 집무실의 창이 반쯤 열려 있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늦지 않게 눈이 내려야 할 텐데…….”
평원이 눈으로 가득 뒤덮일 만큼. 앞이 보이지 않고,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오직 잔잔한 바람만이 남아 적막함이 감돌게 되는. 한때에는 이곳의 모든 계절이 겨울일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많지 않다. 종말이 끝난 뒤로 세기가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은 이제 묻혀 잊히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눈이 내리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 끝나겠죠.”
‘그게 뭔데?’
낯에 능청스러움이 밴다 싶더니 로시난테가 그대로 남은 반쪽의 창문을 닫았다. 축객령이다. 정령이 항의하듯 반짝였으나, 그는 커튼의 끝자락을 붙들며 씩 입꼬리를 밀어 올릴 뿐이었다.
“글쎄요? 과욕이나 한번 부려볼까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커튼이 닫힌다. 빛무리가 닫힌 창 위를 가만히 맴돌다 산맥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 위로 구름이 빠르게 흐른다. 바람 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로시난테는 또다시 석벽에 등을 기댔다가도 이내 책상으로 다가가 비뚤어진 종잇장들을 마저 정리했다. 문진을 떼어낼 즈음에는 실수로 잉크 병을 툭 쳤는데, 코르크 마개를 아직 닫아두지 않았기에 병을 반사적으로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기껏 하루종일 정리해둔 일들이 허사가 될 뻔했다. 낚아챈 반동으로 손등 위에 검은 방울이 점점이 튀었지만, 이 정도야 닦으면 그만이었다.
신경을 대체 어디에 팔고 있는 건지. 로시난테가 미끄러지듯 의자에 기대 앉으며 중얼댔다. 그리고 방금의 대화를 잠시간 복기했는데, 돌이켜보니 스스로가 뱉고서도 제법 우스운 말이었다.
겨울. 마지막. 눈. 어떤 가정. 끝. 그리고 과욕.
삶 속에서 정체 모를 충동에 휩싸이곤 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근원부터 목적까지 모든 게 불확실한, 그저 발길이 닿는 곳으로 하염없이 걸어가다가 세상의 끝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멈춰 서고 싶다는 감각을 그는 아주 오랜 세월 가지고 왔다. 마치 오랜 전설 속 무지개의 끝에 머무는 황금향을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복수를 꿈꾼 이래 안주에 대한 욕망을 버렸다면 복수가 무산된 뒤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로시난테는 그 답을 아주 긴 시간 강구했다가도, 결국 찾지 못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다다른 곳은 무지개의 끝. 이곳에는 황금향 대신 사라진 설원이 있다.
살아오며 필요한 건 많지 않았다. 가지고 싶다고 바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거처를 마땅히 마련하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복수로 눈을 가린 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므로 긴 시간을 들인 행동은 체화되고 끝내 습성이 되어 삶의 방향성을 규정한다. 그러니 메마른 욕망 속에서 무덤 자리 하나와 기억될 이름 하나면 분명 충분했을 텐데.
그는 때를 잘 맞추지 못한다. 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 다다른 이래 이어가는 일상이 모두 알량한 욕심에서 기인했음을 알았다. 앞뒤를 맞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 변명으로 시작된 정체는 어느새 정착의 형상을 했다. 무수히 쌓인 일감부터 북부의 생활에 자연히 녹아든 일상의 한순간. 이제는 익숙해진 모든 것이 로시난테 베르디우스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정착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안주를 갈망하는 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주 오래 전에는,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에는 모든 걸 내버려두고 떠나고자 했는데. 어딘가로 더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정말 마지막임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퍼즐을 늘어두고 기워서라도 조각을 맞추기 위해 고뇌하는 건 결국 무용하다. 조금의 쓸모라도 얻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뜻을 두고, 이유를 만들고, 그렇게 정체 모를 감각의 근원을 설명하고……. 미로 같은 선문답의 끝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야기의 방점은 어떻게 찍힐 것인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여전히 한기가 머무는 공간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이 풍경만큼은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똑똑,
인기척을 잘못 느낀 것이 아닌지, 노크소리 뒤로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로시난테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정리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제안했고, 이후 앳된 사용인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익숙한 낯이었다.
로시난테는 잉크가 손에 묻어 정리하기가 좀 그렇다, 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껄였음에도 사용인은 순순히 응해주었다. 누군가라면 고작 이런 걸로, 라는 말을 덧붙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제법 성정이 순하거나 윗사람의 심기를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류임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무렵, 문득 방 안의 한기를 느낀 건지 사용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로시난테는 그 모습을 보며 그에게는 전자가 더 걸맞을 것이라 평가를 수정했다. 평가를 방증하듯 염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방이 되지 않았나요? 장작을 더 땔까요?”
북부인들이란. 이곳을 마지막 거처로 두었다 한들 그는 언제나 추위 속의 이방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법 자연스레 녹아들지 않았나. 어쩐지 입꼬리가 슬쩍 위를 향했다.
“아냐, 괜찮네. 걱정 마.”
“하지만 방 안이 찬걸요.”
“정말 괜찮다네. 환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잠시 창문을 열었거든.”
말을 끊고 대화를 이어가는 건 끝내 버리지 못할 못된 습관이다. 나도 가끔은 만사 미뤄두고 찬 바람을 쐬고 싶을 때가 있어. 장난스레 덧붙이자 사용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마지막 종이 위로 문진이 제자리를 찾은 뒤에는 다시금 무겁지 않은 침묵이 사이를 채웠다. 사용인이 식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적막한 걸음 소리가 주인 없는 성을 울렸다.
<WINTERING>
초겨울, 자작저
귀환일이었다.
예정보다는 조금 늦은 복귀였지만 염려하는 이들은 없었다. 영지와 영지 경계를 잇는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성에도 전해졌다. 수행인이 보낸 전서구 역시 무사히 성에 도착했으므로 며칠 정도의 지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뀔 즈음이면 으레 이런 일이 생겼다. 계절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한바탕 쏟아진 호우 덕에 지반이 약해진 까닭도 있을 것이다.
다만 로시난테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보낸 문제의 '전서구'에 답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가 오지만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날씨에 움직임이 지연될 것을 알았는지 미리 종이새를 하나 보내두었는데, 도착했음을 인지했지만 정작 명확한 답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다. 종이새에 적힌 내용이 무언갈 사오라는 것도 아니고, 뭔갈 잊고 갔음을 상기시키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안부 한 줄이었던 것 치고는 굉장히 속좁은 행태였다. 대강 둘러댄 핑계에 사용인들이 핀잔을 주는 것도 벌써 네 번째였다. 자작님이 그런 걸 신경 쓰는 분이시냐면서.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어 넘기는 건 로시난테의 몫이었다.
북부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지 않았다. 벌써 월의 중순을 훌쩍 지나 보름달이 저물고 있음에도 고작 땅이 얼거나 쌓이지 않을 싸리눈이 빗발에 섞여 내리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한 차례 먹구름이 지난 뒤에는 보다 미끄럽게 얼어 이동이 어려웠다. 로시난테가 성 내에만 머물게 된 것도 그 시점이었다. 흔한 산책 한 번 하지 않은 꼴을 보면 분명 혀를 찰 테지만,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겨울이 되면 움츠러드는 건 오랜 습성임을.
벌써 땅이 얼고 있어. 늦지 않게 와. 그 전서구를 날려 보낸 것도 며칠 간 이어진 겨울비가 그친 뒤였다. 정문으로 날려 보낼 법도 한데 굳이 집무실의 창 한켠을 열어 날리는 모습이 꼭 일종의 굳어진 습관을 충실하게 따르는 듯 했다.
북방의 산줄기를 따라 냉기가 타고 흘렀다. 설산의 꼭대기에는 희미한 흰색이 내려 앉았는데, 자작저까지 눈구름이 다다르기까지는 아직 시일이 요원해보였다. 올해는 정말로 눈이 내려야 했다. 더 늦었다가는 습관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망각의 길로 떠나보낼 것만 같다. 그러니 그가 불만스러워하는 '진짜' 이유는 여전히 자작저에 흰 눈발이 내려앉지 않은 것이다. 더 늦기 전에는 와야 했다. 로시난테는 늘 잡아야 하는 순간을 눈 앞에서 놓치곤 했으므로. 여러모로 신경쓸 게 많았다. 로시난테가 창 너머 성벽의 모습을 일별했다. 굳게 닫힌 성문이 느릿하게 열리고 있었다.
여하튼 많은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귀환일이었다. 자작성은 계절을 불문하고 많은 나날이 고요했다. 하지만 주인이 다시금 영지로 돌아오는 날에는 활기가 돌았다. 때맞춰 기온이 뚝 떨어져 아침 땅에 서리가 곱게 어린 것이 제법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표방하는 듯 했다. 성문이 열리고 출발할 때와 동일한 인원이 입성했다. 가벼운 인삿말 이후에는 분주히 짐을 나르는 인력들이 즐비했다. 이바르는 자작저 앞에 내려 영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가 변한 것도 같았고, 아주 그대로인 것도 같았는데, 하나 분명한 건 성을 지키던 이들도 겨울을 날 대비를 시기에 맞추어 끝낸 듯 보였다.
일손을 돕겠다며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올리려던 아이가 장정들에게 제지당했다. 동시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짐을 나르고 모피의 질을 점검하고 상품들을 확인하는 건 아랫사람의 몫이다. 간만에 얼굴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간만에 자작저 내에 활기가 돌았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훈풍이 불어왔다. 북부인에게는 조금 더운, 그러나 누군가에겐 딱 알맞은 정도의 온도. 단란하고 삭막한 풍경 사이에선 이곳에 익은 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로시난테는 외부로 나와보지 않을 작정인 듯 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고의는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로시난테는 어쩐지 몸이 무겁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덕분에 사용인들에게 땔감을 조금 더 지펴달라 부탁하고 하루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참이었다. 온 몸을 꽁꽁 싸맨 건 덤이었다. 계절이 바뀌기 전 마쳐야 했던 일들은 끝이 났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이만한 장소가 또 없었다. 환기라곤 일절 하지 않고 하루종일 온기 속에 녹아들 작정이었으므로, 구차함을 덧붙이자면 그래, 쉬고 있을 때에나 얼굴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얼추 시간이 흐른 뒤엔 제법 가까워진 사용인이 이바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창 밖으로 성문이 열리는 건 보았는데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나가보지 않을 거냔 말에는 고개만 짧게 저었다. 다들 정신이 없을 텐데 수다스러움은 나중에 얹어줘도 괜찮지 않냐는 말은 덤이었다. 사용인은 대강 수긍하고선 문을 닫았다.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적막함이 기껍게 느껴지지 않았다.
***
로시난테가 이바르에게 찾아간 건 하루가 거진 다 흐른 뒤였다. 어느새 해가 모두 져 외부가 어두웠다. 벽에 간간이 걸린 촛대만이 복도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이후로도 한 번 더 그를 찾아왔지만 적당히 돌려보내고 온종일 늘어져 있던 까닭인지 그제야 피로가 풀려 적당히 움직일 만 했다.
어쩐지 관절이 뻐근한 느낌에 괜스레 어깨를 한 번 돌린 로시난테가 이바르의 방문 앞에 섰다. 익숙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이후에는 들어오라는 음성이 한 번. 로시난테는 느릿하게 문을 열고서 어깨 한 쪽을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댔다. 방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작정인 듯 했다.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작정인 줄 알았는데.”
“배웅만으로는 부족했어?”
돌아오는 이를 반기는 태도치고는 가벼웠다. 굳이 답하지 않는 이바르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로시난테는 제 앞으로 훌쩍 던져진 물건 하나를 얼결에 받아들었다. 마법의 기운이 흐르는… 무언가 마법의 기운이 흐르는 건 분명한데 뭔지는 정확히 모를 물건이었다. 곰곰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던 로시난테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부탁한 기억은 없는데.”
“팔던 게 눈에 띄더군.”
“아니, 자넨 정말 바보야. 내가 이걸 어떻게 쓰나.”
“마법사잖아. 알아서 유용하게 써.”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쓴담? 투덜대던 로시난테가 얌전히 물건을 망토 안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주머니 한 쪽이 묵직해진 기분이었다. 이바르의 말마따나 용도는 나중에 알아서 찾아보면 될 일이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애매한 건지 정말 미묘했다. 로시난테는 괜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휴, 이걸로 뭘 한담. 값 깨나 치렀을 텐데 괜찮았어?”
“별로 안 들었어.”
별로 안 들었을 만한 물건이 아니긴 했지만, 성주의 금전사정을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기는 했다. 이쪽이 아무리 장부를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실질적인 주인은 이바르가 아니던가. 이번 반기의 재정이 아주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괜찮은 편에 속했지.
“안부가 늦었군. 몸 성히 와서 다행이야. '전서구'에는 답을 안 했던데.”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오기라도 바란 건가?”
“결국 이렇게 말 타고 왔으니 내 용서해줌세.”
스스로도 헛소리라는 걸 아는지 로시난테가 혼자 쿡쿡대다 화제를 돌렸다. 기실 떠들 주제는 많았다. 떠나기 전에 의논했던 것들을 얼추 정리했고, 어떤 부분을 보수했고, 물자를 어느 정도 적재해두었는지. 사실에 곁들여진 사담으로 혼자 떠들듯 흘러가던 이야기가 한참 이어졌다. 이바르가 축객령을 내릴까 잠시간 가늠하던 차에 화제가 다시 돌았다.
“이번에는 정말 눈이 많이 내릴지도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걸 어떻게 아나.”
“다 아는 수가 있지.”
이바르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아들었다.
“혹시라도 사특한 수를 쓴 거라면.”
그에 질세라 로시난테 역시 도중에 말을 휙 끊고 문장을 이었다.
“내가 제법 뛰어난 마법사긴 하다만 날씨를 손아귀에 둘 만한 재능은 없어.”
날이 춥잖아, 덧붙이는 목소리가 작았다. 예전보다 더 추워졌어. 말마따나 예년에 비해 훌쩍 기온이 떨어졌다. 로시난테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망토를 고쳐 둘렀다. 옅은 웃음소리가 한숨처럼 맴돌았다.
“나야 성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겠지만, 자네에겐 제법 기꺼운 계절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잠시간의 침묵 이후에는 간단한 수긍이다. 먼 곳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로시난테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돌아가라는 주인의 명 없이도 문을 훌쩍 닫고 떠나는 건 불청객의 특권이었다.
“쉬어. 간만에 집에 온 셈이잖나.”
문이 닫힌다. 새로 간 경첩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흑철로 빚었더니 꼭 그 주인장을 닮은 듯도 싶다. 로시난테는 잠시 문에 머리를 툭 기댔다가, 머잖아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시간이 겨울을 지날 때>
겨울, 계절의 끝
북부에도 종종 수도의 소식이 들려왔다. 가끔 방문하는 객들이 들고 온 소식이 그에게 전해지던 때도 있었다. 분명 한때에는 고향으로 두었던 곳인데, 이제는 그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느껴지는 건 이젠 더는 회한이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온이 훅 떨어져 땅이 단단하게 얼어붙고, 산맥 사이 계곡물이 더는 흐르지 않고 방울방울 얼어붙기 직전에는 다른 영지의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겨울이 도래한 뒤로는 이렇다 할 이야기 없이 적적했다. 전란이 지난 세상은 꽤 평화로웠다.
드물게 마물이 튀어나오는 걸 제하면 겨울은 가장 고요한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밤이 낮보다 길어진 이래 로시난테는 자작저 밖으로 잘 나서지 않았다. 해가 하늘의 가운데에 떴을 때 잠시간 성벽을 거니는 정도였고, 많은 시간을 서재나 방에서 보냈다. 이끌려 밖으로 향하기도 했다만 그마저도 가끔이었다. 일감이 줄어든 것도 게을러진 데에 한몫했다. 얼추 큰일은 마무리 해두었으니 겨울은 그저 버텨 나가면 그만인 계절이 되었다. 이 뒤로 봄이 오리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았다.
로시난테는 가끔 아주 오래 잠들었다 눈을 떴고, 그런 날에는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해 다시 일찍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는 이 계절 내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영원한 비가 끝나고 배 위에서 하늘로 날려보낸 새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불현듯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 잦아지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는 물음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마땅한 답을 내어두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두고 온 백작저를 생각한다고 답했다. 수도의 백작저는 로시난테가 북부로 향했을 무렵 전소되어 골격과 터만이 남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죽거나 다친 이들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북부에도 다다른 소식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지 않았다. 외려 꺼리는 듯도 했는데, 이곳에 와서는 가끔 파편적으로 얘기를 꺼내둘 때도 있었다. 아주 조금씩, 쌓아둔 무언가를 하나씩 놓아두는 것처럼. 그런 이야기 속에 미련은 없어 보였다.
정말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사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는 종종 과거를, 잊힌 이름을, 청산한 약속을, 두고 온 이들을, 자신을 잊어갈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커텐을 타고 불길이 치솟던 순간이 기어코 떠오른 순간엔 관성적으로 설원을 생각했다. 생을 계절로 나눌 수 있다면 말미는 겨울이 되리라.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상하게도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르게 침상에 누웠음에도 눈이 도무지 감기지 않아 창문을 간간이 뒤흔드는 바람 속에서 밤을 지새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바람 소리가 잦아들더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몸을 일으켜 밖을 바라보니 밤이 온통 희었다. 로시난테는 희뿌연 유리 너머를 응시하다 맥없이 웃었다.
기다림의 끝에는 겨울이 머문다. 겨울의 복판에서 눈이 고요히 쌓이고 있었다.
***
로시난테가 이바르를 찾아간 시간은 눈이 막 그쳤을 무렵이었다. 그즈음에는 짙은 구름이 가셔 하늘이 맑았다. 먼 곳에서 해가 내려앉고 있었다. 드물게 먼저 꺼낸 나가자는 제의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말을 데리고 나와 외곽으로 빠져나갔을 즈음에는 어느새 노을의 절정이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체감했다.
그리하여 지금이다. 어두운 주변 위로 말발굽 소리가 밤을 가로질렀다가도, 익숙한 수림이 보일 즈음에는 로시난테가 내려서 걷자 말했고, 이바르가 수긍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익숙하다고 해도 평원이었을 때와 눈으로 한아름 덮인 뒤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그 속에서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말을 매어두고 가는 동안에는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문득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고 걷는 일이 꽤 간만이라는 사실을 복기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이곳이 영원한 설원으로 정의되었다. 다만 시간은 필연적인 망각을 수반하고, 새로이 태어나는 이들은 이제 북부의 끝나지 않는 겨울을 알지 못한다. 그 시절의 북부엔 분명한 삶이 있었다. 척박함 속에서 죽음이 곁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은 곧 모든 나날이 생명력을 태우며 살아간다는 뜻과 같았다.
냉기 어린 바람이 망토를 크게 부풀리고는 한순간 사라졌다. 눈이 그친 뒤에는 으레 추위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어느새 설원의 복판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침엽수의 흔적이 사방에서 멀어진 뒤에야 로시난테는 뒤를 돌아 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약속했었잖아. 기억나?”
“약속한 게 제법 많지 않나.”
말은 그렇게 해도 아주 모르지는 않으면서. 로시난테가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먹구름은 가신 지 오래임에도 부유하는 바람이 자박하게 깔린 눈을 공중으로 흩뿌렸다. 막 설원으로 둔갑한 들판에는 두 사람 분의 발자국이 길게도 늘어져 있었다. 눈이 그친 게 아쉽지만. 이제는 정령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부러 눈을 내릴 수도 없다. 이바르가 그걸 바랄지도 미지수였다.
로시난테는 나름대로 삶을 살아오며 개인의 욕구를 잘 파악한다고 여겼으나 이상하게도 이바르 베르트손에게만큼은 잘 들어먹질 못했다. 왜 나를 쫓아내지 않았어? 이상한 고집을 부려도 늘 적당히 응해주는 모습 역시 결국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행동의 기작을 파악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로 귀결된다. 그냥 바라는 걸 하기로. 해주고 싶은 걸 그 손에 들려주기로. 사람이 개념 아닌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인간으로 남기 위한 오직 단 하나의 지표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기억의 중요성을 알았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서늘한 공기에 뺨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이바르 베르트손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잰걸음에 이미 한 번 사그라든 설원의 눈더미가 한 번 더 밟히며 익숙하고도 낯선 소음을 냈다.
“이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드디어 눈이 내리길래 자네를 냉큼 데리고 왔지.”
이곳을 보았던 적이 있다. 눈이 덮이지 않아 푸르른 초원으로 명명되었을 때.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었던 생명이 가동하던 시절. 그럼에도 들판에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는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그 속에서 들었던 증언을 기억한다. 이바르, 자넨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어?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추위 속에서 위로받고 싶어. 누구보다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해. 북부의 눈이 녹은 이래 많은 이들이 스러졌다. 그는 추위를 기껍게 여기진 않았지만, 평생을 살아온 장소가 한순간 무너진 뒤의 탈력감만큼은 이해하고 있었다. 삶의 터전이 완전히 뒤바뀐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도 모르진 않았다. 그건 로시난테가 한때 갈구해왔던 개념이기도 했다. 로시난테는 많은 삶과 이름을 죽이고 살아왔지만 끝내 재난 속의 생존자가 되었다. 인간성을 규정하는 무언가가 감정의 굴곡이라면 그는 무엇보다 인간적인 사람으로 살아온 존재가 된다. 그가 딛고 선 곳은 언제나 감정의 소용돌이 정중앙이었으므로. 조건 하나가 마련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다.
로시난테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고대해왔다. 조건과 이해는 진작 맞아떨어졌다. 필요한 건 오직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겨울의 복판에 놓인 형국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어지는 행동은 지극히 간단하다.
하나, 손을 감싼 장갑을 벗는다. 벗어둔 장갑은 망토의 안 주머니에 곱게 넣어두었다. 고작 가죽 한꺼풀이 사라졌다고 금세 손 끝이 달아오르는 게 조금은 우습다.
둘, 조용히 손을 들어올려 이바르 베르트손의 뺨을 감싼다.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온기가 차가운 피부에 맞닿는다. 꿈뻑이는 눈과 자연스레 시선이 맞으면 언제나처럼 같은 호선이 입매에 자리한다.
셋, 잠시간 이어지는 침묵은 무겁지 않다. 무얼 하느냐는 질문은 없다. 물음이 없으므로 자연스레 답변도 없이 조용한 침묵이다. 그들의 삶은 물음과 추궁보다는 이해와 납득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짧은 호명이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이바르.”
직후 뒤따르는 조용하고도 엄숙한 선언. 문장은 장황하고, 결국 단 하나의 길로 귀결된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이바르 베르트손에게 쥐여줬던 무수히 많은 일상과 같이.
“사람을 위로하는 데에는 딱 두 개만 있으면 돼. 그 사람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알고 내가 그걸 줄 수 있는지 알면 어렵지 않거든. 꼭 맞물리는 게 아니어도 대강 흉내만 낼 수 있다면 나름대로 위안을 얻는 게 인간이라는 족속이라서.”
손끝이 붉게 물든다. 냉기 속에 체온을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서늘했다. 짧은 숨마다 입김이 안개처럼 번졌다.
“그런데 영 모르겠더라고. 그간 지내면서 자네를 예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보면 모르는 일면이 비집고 나오기도 하니까. 자넨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네.”
오래전의 대화를 떠올린다. 로시난테는 사람을 위로하는 법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선 밖에 머무는 이들에게 한정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좁아진 간극을 바라보며 긴 고민을 이어왔다는 건 진실이었다. 나는 왜 자네를 도무지 가만히 둘 수 없을까. 왜 인간성을 보고 싶을까. 일상의 편린을 살아가고 있자면, 도대체 왜 살고 싶어지는 걸까? 긴 긴 시간을 흘려보내고 왜 이제야. 마지막을 기약하고 찾아온 이곳에서.
“그러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고집대로 쥐여주고 싶은 걸 자네에게 남겨주려고 해.”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래 전의 대화를 떠올린다. 지금이 계절을 돌아 묵혀둔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두기에도 적기다. 이바르,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하루에 한 번씩 내 생각을 해, 이바르. 내가 자넬 인간으로 기억한다는 걸 떠올려. 시답잖은 편지가 도착했을 때, 계절의 흐름에 거니는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질 때. 모두가 자넬 이 땅에 영원히 붙박일 기사이자 군주로 기억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자넬 영원히 이바르 베르트손으로 기억할 거야. 인간미가 조금은 모자라긴 해도 가끔은 허술하고, 이상한 면에서 철저한 사람으로.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는 살아가는 내내 죽음을 바란 적 없다. 하지만 죽음을 약속한 이래 살아야 할 이유를 모두 청산하고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 제법 신경을 기울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곳까지 와서 죽음을 유예한 이유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 다만 마지막을 기약하기는 이르다는 것도 알지. 그러니 그 사이, 아주 짧은 순간. 우리가 유예한 많은 시간 속에서 날 기억해.”
실패한 숙원처럼, 필패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련함의 일종일 것이다.
“그거면 돼. 그게 내 마지막 바람이야.”
그럼에도 이제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였다.
긴 시간 끝에 당도한 설원은 오래도록 적막하리라. 로시난테는 가볍게 이마를 맞대고선 금세 거두었다. 짧은 온기는 금세 다시 식어 사라진다. 뺨을 감쌌던 손 역시 금세 떨어졌다. 잠시간의 응시 끝에 습관처럼 입매가 느릿하게 올라간다.
“생각보다 내가 자네를 꽤 좋아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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