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Unexpected Journey
장송의 프리렌 AU
주석 주전자가 달아오르며 요란하게 물 끓는 소리를 낸다. 창밖으로 몰아치는 눈보라와는 별개의 소음이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뒤섞인 소음 사이로 간간이 흔들리는 유리창 너머를 응시한다. 온통 흰 외부를 훑던 시선이 여전히 요란스레 끓어오르는 주전자에 닿는다. 온종일 눈이 내리니 원. 작은 중얼거림 이후에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티타임이 늦었는지, 이른지, 혹은 옳은지 가늠하기란 영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에 마을에 내려가서는 회중시계라도 하나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로시난테는 때를 맞추었을지 모를 티타임을 준비했다. 작은 협탁 위에 놓인 찻잔은 두 개였다.
이곳에 발이 묶인 지도 어언 이 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마음만 같아서는 눈을 헤치고 당장이라도 산맥 너머로 나아가고 싶을 따름이지만, 또 로시난테 혼자 여정을 이어가는 상황이었다면 분명 그랬겠지만, 동행인이 있었기에 섣불리 나서기는 어려웠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사히 산맥을 넘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건만,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더더욱 잠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눈보라가 꽤 오래 부는 것을 제외하면 산맥 초입의 작은 마을엔 겨우내 이렇다 할 사건이랄 게 없었다. 기껏해야 창고를 습격하려 드는 잔 마물을 토벌하는 정도가 일감의 전부였다. 겨울은 사람에게 혹독한 계절이기도 했지만, 마물이나 산짐승에게도 버티기 힘든 시기다. 이즈음이면 짐승이니 마물이니 하는 것들이 곧잘 마을 어귀까지 기어 나왔다. 로시난테와 이바르는 마물과 짐승을 토벌하겠다는 의뢰를 수락하고 마을 외곽의 빈집에 자리를 잡았다. 사냥꾼들이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던 오두막에는 적잖은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었다. 요란스레 증기를 내뿜는 주석 주전자와 같은 것들이.
로시난테가 주석 주전자 안에 찻잎을 쏟아붓자, 창틀 근처에 앉아 검을 손질하던 이바르도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차가 충분히 우러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로시난테는 느슨하게 턱을 괴고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입어야 할 망토를 응시하며 운을 뗐다.
“슬슬 망토도 손질해야 하는데.”
“번거로운 장식을 달 셈이라면 그만둬.”
“번거롭다니, 이건 미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물건이야.”
이바르가 미간을 좁혔다. 로시난테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간 열심히 유지해 온 매끈한 미간이 머잖아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직감했다. 이바르와 로시난테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이었다. 벌써 이렇게 몸이 뒤바뀐 채로 여정을 이어간 지도 꽤 시일이 흘렀다.
달리 말하자면 이바르 베르트손이 자작령을 비우고 급작스레 여정을 떠난 지도 어언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잠시 문제가 있었던 방어 결계는 여정을 떠나기 전 충분히 강화했기에 자작이 자리를 비우는 걸 반대하는 우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는 사실을 가신들마저 납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바르 베르트손의 태도는 강경했다. 지금이 아니면 토벌을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없다는 설득과 완강한 태도에 모든 가신이 그가 일정 기간의 유예를 두고 여정을 다녀오는 데에 동의했다. 논의 과정 중 자작님께서 조금 변하신 것 같다고 수군대는 목소리도 있었다. 여정을 위해 자작의 옆자리를 꿰찬 것이 자작저의 기사가 아닌 수도에서 당도한 웬 수상한 마법사 나부랭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거 안면이 있었다는 자작의 증언으로 소란은 일단락되었지만 걱정하는 목소리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이질감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당시 ‘이바르 베르트손’의 몸을 차지한 건 이바르 베르트손이 아닌 로시난테 베르디우스였다. 그는 닿아오는 의문의 시선들을 무시하기 위해, 몸에 밴 경박함을 내리누르고 예의 진중함을 가장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여정 도중 로시난테는 살아오며 그때만큼 머리를 많이 써야 했던 시기가 또 없노라 회고했다.
어떻게든 마력의 흔적을 쫓은 결과 방어 결계를 강화한 순간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었으며, ‘영혼을 바꾸는 마법’을 사용하는 마족이 결계 반대편에서 동시에 마법을 시전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영주인 이바르를 목표로 삼은 건 명확했다는 게 로시난테의 추론이었다. 사실 백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면 자연스레 해주 될 저주였지만, 휴먼에게 백 년이란 생이 끝나고도 남을 긴 시간이 아니던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삼 년이었다. 삼 년 내로 마족을 찾아 저주를 풀고, 마족을 토벌한 뒤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 지금, 두 사람은 눈보라 속 오두막 안에 갇힌 처지다. 로시난테가 수색이 짙게 우러난 주전자 안에 우유와 도수 높은 술을 넣고 휘휘 저었다. 날이 추울 땐 이것만큼 몸을 데우는 데에 좋은 게 없었다. 두 사람 앞에 나란히 온도감 있는 차가 놓인다. 이바르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추위를 잘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게 조금은 아쉬운 장점이 되겠지만. 추위와 더불어 마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도 했는데, 이건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사실 우리 말일세, 더 오래전에 만났을 수도 있어.”
“마물 토벌 이전에 자넬 만난 기억은 없다만.”
“그럴 만도 해. 삼십 년도 더 된 일이니까.”
이바르의 말마따나 두 사람이 처음 안면을 튼 건 수도 침공을 막기 위해 꾸려진 임시 기사단에서였다. 로시난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를 홀짝이는 동안 바람 소리만이 내부에 가득했다.
“그때는 어렸었지……. 젊었다고 해야 하나?”
“경, 삼십 년 전이면 젊은 시절이야.”
“아무튼. 그즈음 자네 영지에 마족이 거하게 들어왔던 적이 있잖아. 우리 파티도 근처에 있다가 막으러 왔거든.”
이바르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구리 잔이 나무 테이블에 얹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래전에 칠붕현 중 하나가 침입해서 크게 소란이 일었지. 기억하네. 나도 전장에 있었으니.”
“나도 선봉에 섰었어. 그러니 수도에서보다 훨~씬 전에 마주쳤을 수도 있다는 말씀. 뭐, 자네가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 않는데.”
“그런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다만. 확신하는 이유는 뭐지?”
“내가 자네를 모르겠나? 그리고, 그때는 다른 이름을 썼으니까.”
의문을 모두 해결하기 이전, 찻잔을 비운 로시난테가 몸을 일으켜 망토를 걸어둔 곳으로 향했다. 나란히 걸려 있는 망토는 이래저래 털이 덧대어져 이젠 제법 북부인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엉켜 있던 털을 복복 손질하기 시작했다.
“칠붕현 토벌 이후에 우리 파티가, 흠, 다른 마족을 잡다가 전멸했거든. 나랑 다른 성직자 하나만 빼고.”
“그게 이름을 바꾼 것과 무슨 관계가 있나.”
“서류상으로는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상관이 있지. 죽은 신분으로 쏘다닐 수야 있나.”
“신분 세탁이 불법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수도 백작가의 탕아가 된 건가.”
“탕아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로시난테는 망토에 아껴두었던 근사한 브로치를 달아버릴지 고민하며 손질을 이어갔다. 이바르는 고개를 돌려 그가 망토를 손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적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절차를 밟았어.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귀족도 아니고, 족보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지. 그러니 그간 방랑 마법사로 살던 것 아니겠나.”
목소리는 경쾌하다. 원주인의 발성이었다면 분명 끄트머리에 웃음이 딸려왔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털 손질이 끝난 뒤에는 주름을 손볼 차례다.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져 구김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게 그가 가진 망토의 장점이었다.
“난 그때, 칠붕현과 맞섰을 때, 자네와 마주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네. 그때 자작에게 장성한 자식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옆에 붙어 있던 기사 하나 정도는 기억하고 있거든. 서른 해가 지났으면, 이바르, 딱 자네 정도 나이가 됐을 것 같은.”
기억이 난다고는 했지만 얼굴마저 떠오르지는 않았다. 서른 해는 사소한 기억을 지워버리기 참 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바르가 미간을 좁히거나 말거나 로시난테는 이바르에게 이쪽으로 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망토에는 호박색 브로치가 막 붙은 참이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네가 무얼 기억하는지. 내가 그런 걸 묻지는 않잖아. 그러니 나도 이 정도로만, 납득 가능할 정도로만 이야기 해주는 거야. 무엇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뭔갈 해명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 온다면 결국 더 깊은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테니까.”
가볍게 운을 띄운다. 부러 그런 투를 가장하는 듯도 싶었다. 로시난테는 이제 ‘이바르’의 망토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평소의 이바르 베르트손이 입는 옷이라기에는 굉장히 말끔하게 정리된 채였다. 브로치를 응시하는 이바르를 향해 로시난테가 핀잔 몇 마디를 던졌다. 역시 저 미간에 머잖아 깊은 주름이 팰 것 같다.
“표정 펴고.”
“웃는 걸 그만두는 건 어때.”
“그건 이미 자네 몸에서 충실하게 하고 있는 걸.”
이젠 일부러 웃지 않아도 돼서 얼마나 좋은지 자네는 모를 거야. 시답잖은 대꾸가 이어진다. 방음 마법을 걸지 않아도 비밀을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건 듣는 귀 없는 눈보라 치는 날, 외곽 주민의 특권이다. 눈이 그친 뒤에는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이 여정이 얼마나 더 길게 이어질까? 북으로, 또다시 북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의 끝이자 재난의 근원이 뿌리뽑힌 장소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세상의 끝을 본 뒤에는 다시 몸을 되찾고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까지 이 골 아픈 여정이 잘 이어질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지만.
마법사로 살아가던 자의 역사가 기사로서 새롭게 적히고, 마력 감응력이 없는 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마력 해설서가 절찬리 집필되는 와중, 여정은 한동안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 마을마다 머무는 소소한 소란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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