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

박민균 이승준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동아리 술자리에서 자꾸 둘이 뭐 있지 않냐고 도발했다. 당시 아무런 생각도 없던 박민균은 잠자코 있었고, 왜인지 뜨끔한 이승준이 있긴 뭐가 있냐며 손사래쳤다. 오늘은 이승준 놀리기로 작정한듯이 뭐 없냐고 양쪽에서 몰아가는 바람에 말도 안되는 내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럴거면 한 달 동안 먼저 반하는 사람이 지는걸로 내기해!“

그 말에 분위기가 확 달아오르며 여기저기서 얼마빵할래 묻는 소리로 더 시끄러워졌다. 그 소리를 듣자니 이승준은 박민균이랑 하는 내기인데 왜 쟤들이? 싶어져서 숟가락으로 앞접시를 쳤다.

”아니 니네끼리 걸면 뭐해. 나랑 박민균 내기잖아. 민균아, 소원 들어주기로 내기할래?“

소란이 가라앉고, 시선이 다들 박민균에게로 향했다.

”그래. 소원빵 좋지.“

박민균 대답에 한층 조용해진 테이블이 다시 달아올라 시끌벅적 해졌다. 승준을 향한 관심이 줄어들자, 그제서야 등을 기대앉아 편히 술잔을 들 수 있었다. 몇 잔 더 마시면 술집에서 골아떨어질게 분명해 더 많이 마시지는 못했다.

사실 처음 전제부터 잘못된 내기였다. 이미 반한 상태로 내기를 제안했기 때문에 애초에 이승준이 진 내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승준은 표정을 숨기는 걸 잘했고, 박민균은 한 달이 끝나기 전에 머릿속에서 이승준을 잊는 법을 못 찾았다. 이승준은 동아리 사람들 도발에 넘어가 내기를 해버린 것을 후회하다, 이럴거면 들키지나 말자 꼭꼭 숨기기로 했다. 박민균 앞에서는 더 신경 써서 표정을 숨겼다. 박민균이 내기에 진다는 건 이승준이 예상한 미래에는 없는 결과였다. 그래서 차라리 한 달 동안 잘 숨기면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만, 어쩐지 전보다 더 자주 마주치고 함께 있게 되더라는 것이다.

박민균은 내기를 한 후로 자주 이승준과 있었다. 동아리실에서, 이승준이 알바하는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갔다가, 공강이 겹쳐 같이 끼니를 때우려, 마침 시험날이 겹쳐 전날 같이 도서관에서 밤을 세우려고. 그러면서 눈에 들어온 것들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승준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일 때라던가, 멀리서 박민균을 발견하고 신난 강아지처럼 뛰어오는 모습이라던가, 종종 우리 뀨니, 하며 부르던 목소리같은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승준 앞에서 동동 뛰는 가슴 안쪽 때문에 쑥스럽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기의 승자는 자신이 아니겠구나 짐작했다. 이승준을 하나하나 더 알게 될 때마다 결국엔 좋아하게 되겠구나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약속했던 한 달이 끝나갈 무렵에 박민균은 이승준이 알바하는 카페에서 마감까지 기다렸다. 문을 잠그고 나오는 이승준에게 형이 내기에 이겼다고 전했다.

”그니까 형 소원 들어줄게.“

“소원?”

“우리 내기 했던거, 내가 졌어. 형 소원은 뭐였는데?”

“너 나한테 반했다고?“

어두운 밤, 길가의 가게들과 가로등 조명이 밝힌 박민균의 얼굴 색이 불그스름했다. 이승준은 자신의 얼굴은 어떨지 가늠해볼 정신도 없어졌다.

”아니, 미안.“

”어?“

”그게 아니라, 이거 내기 하면 안됐는데. 진짜 미안.”

“무슨 말이야?”

“니가 진짜 반할 줄 몰랐어. 아니, 내기를 했으면 안됐는데. 그니까...”

머릿속이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려는 말은 따로 있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죄다 꼬여서 이승준이 전하려는 말의 의도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박민균은 이승준 얼굴에 도로의 자동차 브레이크 등이 비춰져 붉은지, 정말 얼굴이 붉어진건지 잠시 생각하며 이승준이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내기는 니가 이긴거야. 전부터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래서 내기를 하면 안됐다고 했던거야. 그러니까 니가 소원을 말하면 돼, 민균아.”

“어... 소원, 나중에 말해두 돼?”

”그래, 그럼.“

어색하게 내일 보자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박민균은 이승준이 자신을 그냥 친한 동생으로만 본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꽤 혼란스러웠다.

“내가 소원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랑 어디 가주라.”

박민균을 따라 걷다보니 박민균이 종종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러 가는 곳이었다. 박민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울며 박민균을 반겼다. 몇 번 쓰다듬어주다 말했다.

“형, 나랑 맨날 고양이 보러 올래?”

“어?”

“아니이... 연애하면 이런거 해보고 싶었어서, 싫어?“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끝이 붉었다. 나랑 사귀자, 를 멀리 돌려말한 고백이었다. 이승준이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박민균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일어나 이승준 앞에 섰다. 이승준도 얼떨떨했다. 이미 서로 반했으니 사실은 내가 아니라 니가 이긴 내기다, 서로 좋아한다고 말 다 해놓고 이제와서 고백했다고 둘 다 긴장해버린 것이다. 누가 고백했어도 결국 연애로 도달하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웃을 상황이었다만, 지금 둘에게는 많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종종 어떤 사랑의 시작은 꽤 이상하기도 하니 말이다.

“아니, 좋아.”

“우리 연애하자는 거잖아. 좋아.”

이승준은 앞에 선 박민균 손을 꼭 붙들었다.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민균에게 이승준이 맑게 웃어보였다. 박민균이 처음 반했던 얼굴이었다.

*

둘의 연애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내기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쪽지시험이니 과제니 바빠지기도 했고, 동아리도 사실 술모임과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주위의 몇몇은 둘의 엔딩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저딴 내기하는 애들 있으면 옆에서 기필코 막아 저 꼴을 다시 보지 않으리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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