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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hite Memory

눈처럼 새하얀 기억이다.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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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카] 안드로이드 한기설 - 인간 한주석 if
디비휴 설정을 살짝 가미했어요… 디비휴 설정을 알고 계신다면 조금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어요 :)
예현고등학교의 좀비 사태가 없는 아예 다른 세계입니다. 

BGM :: https://youtu.be/sKqfb2TtZak?si=q7sDDMfSbr5wANHE (함께 들으면 좋습니다.)

AX-3765-K는 못하는 게 없습니다. 설거지, 청소, 식사 준비… 혼자 살고 있어 외로우신가요? 이 제품은 당신의 친구가 되어줄 겁니다! … …  세상은 정말 빠르게 바뀌는 것 같다고 주석은 안드로이드 가정부 포스터 앞에서 생각했다. 실제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는 LED 상태표시등뿐이다.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음식을 먹일 필요도 없고 월급을 주지 않아도 평생 부려 먹을 수 있는 순종적인 인력. 처음에는 사람들도 그들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반대했으나, 그들이 제공하는 편의와 안락함에 익숙해져 갔다. 가정부로 시작해서 자식을 대체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 공무용 안드로이드… 조만간 교사도 안드로이드로 대체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이미 사교육 쪽은 안드로이드를 교사로 내세웠다고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눈이 많이 내립니다."

가게 유리창 너머로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던 중 주석의 머리 위로 우산 그늘이 드리워진다. 담백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눈 보다 새하얀 사람, 그의 삼촌인 한기설이다. 주석은 가게에서 눈을 떼고 기설이 건네는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기설은 여분으로 가져왔던 우산을 핀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돌아갑시다."

"네, 돌아가요."

"…필요하십니까, 가정부."

물끄러미 주석을 바라보던 기설의 질문은 이러했다. 아마 한주석이 바라보고 있던 포스터를 기설도 본 것 같았다. 주석은 약간 기가 찬 목소리로 손사래까지 쳐가며 답했다.

"예? 아, 아니요. 그냥 보고 있었어요. 오늘 수업 주제가 안드로이드였거든요."

"그렇습니까."

주석은 기설이 흥미를 보이기를 바랐다. 오늘 그의 수업 주제가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을 들으면 기설은 무슨 반응을 하려나? 하지만 기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집을 향해 걸을 뿐이다. 소복이 쌓인 눈 위를 걷는 두 사람이 있다. 주석은 기설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힐끔 바라본다. 동그랗게 빛나는 LED 빛이 청색으로 빛난다. 그의 삼촌은 안드로이드다. … 이제는 말이다.

A White Memory

— 눈처럼 선명한 기억이다.

"뭐, 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주석아. 그만해라."

기설에게 꼭 따지듯이 묻던 주석을 만류한 것은 주석의 아버지인 기정이었다. 기정은 흥분한 주석의 어깨를 꾹 내려 앉힌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지만 주석은 일단 침대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병실 침대 헤드에 겨우 기대어 앉아있는 기설의 안색은 창백하다. 원래도 새하얀 사람이었으나 더 하얘진 것이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기설은 방금까지 주석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남의 이야기처럼 태연자약하게 떠들어놓았으니까. 기설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든가, 그것도 모자라서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얘기부터 주석에게 남긴 선물이 있다는 말까지. 그 말 하나하나가 주석은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그는 요새 바빠 가족들과 연락을 자주 못했다. 주석이 기설과 함께 예현고등학교에 근무할 적에는 그래도 만날 때마다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기설이 타 고등학교로 발령 난 후로부터는 연락이 점차 뜸해졌다. 그렇지만 기설이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아팠다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자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었지 않은가? 말수가 적은 기설은 그렇다 치고 부모님마저 주석에게 기설의 병환을 숨겨왔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주석은 의자에 앉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기설이 주석의 말이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잦은 기침 때문에 기설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안락사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삼촌, 저는… "

"그 덕에 이리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주석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든 기설에게 닿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설은 이미 결정했고 그 결정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번복하게 할 수 없었다. 연락을 안 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기설의 앞에서 주석이 할 수 있는 항의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는 그의 삼촌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기설이 얼마나 주석을 아끼는지 알고 있기에 그는 더 이상 투정 부릴 수 없었다. 말간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기설의 손이 주석의 눈가를 훑는다. 그리고 이내 팔을 벌린다. 주석은 머뭇대다가 기설을 끌어안았다. 기설은 품에 안긴 주석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조카님."

"… 저도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정말 많이."

주석은 목이 메여 바로 답하지 못했다. 기설의 환자복의 어깻죽지가 젖어 든다. 한참을 답하지 못하다 주석은 겨우 답한다. 그만하면 됐다는 듯 기설이 주석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거둔다. 조카님은 괜찮을 겁니다. 스쳐 지나가듯 들린 목소리. 주석이 기설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기정이 기설을 꽉 끌어안는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기설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에 주석의 의문은 낄 데가 없었다. 그럴수록 안락사 시간은 다가왔고 가족들은 기설의 숨이 멎을 때까지 다 같이 지켜봤다. 가족들은 이미 기설의 안락사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걸까? 주석은 간호사가 기설의 팔에 연결된 수액을 바꾸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도한다. 기설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빌고 또 빌었다.

우리는 병원을 나섰다. 기설의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을 했다. 작은 유골함에 담긴 당신이 낯설다. 주석은 기설의 유골함을 들고 장례를 치렀다. 본인이 장례식 자체를 원하지 않았기에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가족끼리만 모여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이 끝인 말 그대로 조촐한 장례였다. 주석은 혼자 있어야 하는 자신의 집으로 가기가 싫었다. 소중히 여기던 혈연을 잃는다는 건 언제 겪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기에 그는 본가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본가에서 마주친 건 다름 아닌… 한기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기설의 모습을 본뜬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는 말한다.

"다녀오셨습니까."

어머니, 아버지, 누나들마저 안드로이드에 대한 반발감이 크지 않았다. 주석 외의 가족 모두가 기설의 결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석은 그들이 왜 주석에게 알려주지 않고 숨겨왔던 데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가족에서 막내, 그리고 막내 손자. 유독 주석을 아이로 보는 가족들에게 기설의 결정은 그를 힘들게 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요즘 기술에 감탄했고 아버지는 껄끄러워했지만 나쁘지 않아 했다. 누나들은 생전의 기설과 별로 다르지도 않다며 신기해했다.

오직 주석만이 '저것'을 불편해했다. 가족들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자신을 걱정한 기설의 처사라고 설득했지만 주석은 그냥 불쾌했다. 이게 당신의 선물인가요? 정말 '이걸'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면 당신은 최악이다. 어떻게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지? 오래도록 기설과 지내왔고 이제는 기설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건만, 사실은 주석은 기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주석은 문턱에 서서 기설의 '안드로이드'를 바라보다 밀려드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주석의 발자국이 멀어진다. 멀리, 저 멀리. 부은 눈가가 따갑다. 그리고 시려온다. 눈가인지 마음인지 모르겠다. 그저 멀어지고 싶었다.


그것은 기설이 지내던 집에서 살며 고양이 연탄을 챙겼다. 시간이 남으면 청소를 하고 주석의 가족들을 챙긴다. 가족의 대소사에도 빠지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라는 이유로 그것의 의견은 참고만 하지만 그것은 별말 없이 얌전했다. 생전과 별 다르지도 않았다. 기설의 의견은 유독 튀곤 했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고모와 작은 아빠는 그것이 말을 얹을 때마다 정말 '기설'같다며 좋아했다. 가족 대화에 오가는 화제에는 기설처럼 죽음을 대비해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들이 하나둘 나온다. 주석은 언제나 그 대답에는 반대했다. 그제야 어른들은 주석의 눈치를 보고 그 화제를 벗어난다. 주석은 테라스에 가서 안경을 벗고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것은 주석에게 관심이 많았다. 다른 가족들은 그것의 존재를 이미 받아들였기에 혼자서 톡 튀는 주석의 반응이 흥미를 끈 걸지도 모른다. 그것이 제일 먼저 챙기려 드는 것은 주석이었고 주석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주석이 그것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그것은 조카님이 원래 이렇게 까다로운 분이 아니었는데. 라고 말해 주석의 화를 돋웠다. 그렇게 매번 반응하는 것도 힘들어 이제는 그것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 한결같았다. 주석이 화를 내든 못마땅해 하든 무시하든 나가려는 주석의 목에 하얀 목도리를 매주며 그를 챙겼다.

"날이 찹니다, 조카님."

기설의 안드로이드와 지낸 지 2년이 지났다. 주석은 더 이상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뒤를 바라본다.

"네, 다녀올게요. 삼촌."

그 대답에 그것이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고 주석은 생각했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주석은 두 손을 모으고 뜨거운 숨을 뱉는다. 얼어붙은 손가락이 녹았다가 입김에 다시 차가워진다. 그러면 그제야 손가락을 비벼 열을 냈다. 또 한 번 겨울이구나. 주석은 미끄러워진 빙판길을 조심하며 학교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엔 수업 준비를 했다. 교무실에서 책상 정리를 하고 있던 때 옆자리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책자는 여행 책자였다.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 별장이었다. 아늑한 겨울을 별장에서 즐겨보라는 광고문구가 적혀진 곳을 선생님이 가리킨다.

"여기 정말 예쁘지 않아요, 한 선생님?"

"그렇네요. 사진 찍으면 잘 나오겠어요."

"가고 싶은데 이건 추첨 이벤트 상품이래요. 그냥 내놨어도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추첨으로 내놓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혹시 모르니까 한 선생님도 참여해보시는 건 어때요?"

"예? 저는 별로……."

"에이, 그러지 말고. 만약 당첨됐는데 가기 싫으면 저 주세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선생님을 떼놓지도 못한 채 주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자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고 나서는 다시 수업 준비로 돌아갔다. 한두명이 참여하는 추첨도 아닐 텐데 여기에 당첨될 리가 없지 않은가. 적당히 떨어졌다는 말을 하고 다음에는 집에서 미리 수업자료를 추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옆자리 선생님은 너무 주석이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잊고 지낸 지 2주가 넘었을까. 문자로 날아온 당첨 소식에 주석은 안경을 여러 번 닦아야 했다. 이게 당첨이 된다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옆자리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기회를 넘겨주기엔 좀 아까운데…… 당장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할 사람도 크게 없어 혼자 가야 하나 생각하려던 순간 그것이 뇌리를 스쳤다. 눈 내리는 별장, 그리고 한기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주석은 그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그는 그것에게 연락을 넣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별장은 고즈넉했다. 주변엔 너른 눈밭만이 펼쳐져 있어서 별장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 났다. 도시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소음도 없었다. 밤하늘이 그렇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주석은 한껏 들뜬 채로 성능 좋은 카메라를 챙겨왔더랬다. 둘의 짐은 많지 않았다. 거의 주석의 짐뿐이다. 주석이 먹을만한 식량과 덧입을 옷가지, 그리고 카메라 정도인 소박한 짐을 차에서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그것이 주석의 짐을 들고 내리려고 하자 주석은 그것에게 짐을 줄 틈을 주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내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것은 이내 주석을 따라 내린다. 주석은 짐을 바리바리 든 채로 빙글 돌아 그것에게 물었다.

"여기서 7일 동안 있을 거예요, 어때요?"

"감상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렇죠. 뭐든지요. 감상이어도 좋고 그냥 드는 생각들이 궁금해요. 우리 여행은 처음이잖아요."

"가족여행이라면 같이 갔습니다."

"아뇨, 다 같이 간 그거 말고요. 우리 둘이요."

그것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설이 주석과 둘이 떠난 여행은 이전에도 있다고 말했다. 주석은 그 답에 반박하지 않고 다시 앞의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떠세요?"

이런 질문은 난감했는지 곤란했는지 그것은 잠시간 침묵한다. 표정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전에도 기설의 속내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기설을 본떠 만든 이것 또한 그러했다. 오히려 안드로이드라서 더 파악하기 힘들었다. 주석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것의 얼굴을 살핀다. 사람의 피부를 본뜬 철의 가죽 아래에선 무엇이 피 대신 흐를까. 어떤 신호가 그것의 생각이 될까. 그것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세상, 내리는 눈, 그리고 고즈넉한 집. 그것이 보기에 여기는 주석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온 주변이 하얗다 보니 그를 찾기에는 수월한 곳이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곳에 7일이나 머무르려고 하는 주석의 결정이다. 그것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단순한 감상입니다."

"그게 마음에 든 거죠. 삼촌은 싫었으면 싫다고 얘기했을 사람이니… 그리고 딱이죠? 일주일이면요. 우리가 못다 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거든요."

그것은 의아해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것의 메모리에 담긴 주석의 데이터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주석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판단했다. 여행을 가자고 했던 주석의 제안에는 밤하늘 사진을 찍고 싶다던 말을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고 온 짐도 촬영 장비가 대부분이었다. 그 외의 쓸데없는 것을 챙기긴 했지만 기간이 기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자신을 생각할 때, 자신은 그다지 시간 때우기에 친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둘은 별장에 짐을 풀고 안을 둘러보았다. 둘이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별장. 거실의 벽난로가 안을 데웠고 안에 있는 방의 개수는 족히 10개는 되었다. 그것은 아예 가족 여행으로 왔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주석은 이미 한 번 거절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단 둘이 가고 싶다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주석을 혼자 보내는 것보단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나을 테니 그러자고 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실에 서서 주석이 별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관찰했다. 주석은 여기 이런 것도 있네요? 따위의 말을 하며 온 별장을 뒤지고 있었다. 주석이 들고 있는 것은 얼음낚시용 낚싯대였다. 그러고 보니 가이드의 말로는 이 근처에 얼어붙은 호수가 있다고 했던가. 근처에 호수가 있다던데 거기에 쓰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귀찮아하지도 않고 주석이 꺼내며 한마디씩 하는 것에 전부 대답을 했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둘째날 주석은 낚싯대를 가지고 얼음 호수로 향했다. 날이 추운데다 추위를 잘 타는 주석이 옷을 껴입어 무장한 반면 그것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따라 나갔다. 주석은 꽝꽝 언 호수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빙어 낚시를 해볼 생각인 듯했다. 얼음낚시는 처음이라고 하더니 역시나 낚시할 구멍을 만드는 것에도 애를 먹었다. 송곳 뒤를 망치로 여러 번 두드린 끝에 낚싯바늘을 넣을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냈다. 둘은 그 구멍에 둘러 앉아 빙어가 낚일 때까지 옛날이야기를 나눴다. 주석이 꺼낸 이야기들은 그가 어릴 때 기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었다. 그것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카님을 처음 보던 날이 기억납니다. 무척이나 작았습니다. 앞선 조카님들보다 유독 조카님이 작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석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는다. 그날 빙어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철수했다.

셋째날 낮에 주석은 너른 눈밭으로 카메라를 들고 향했다. 그것은 사진을 찍으러 가는 내내 주석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눈밭을 한 번쯤은 찍어보고 싶었다는 이야기, 얼음 호수에 얽힌 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찰칵- 셔터음이 들릴 때 마다 주석은 저 너머를 바라보았고 한 번씩은 그것과 눈을 맞춘다. 그럼 다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말이 많았나? 어쩌면 못다 한 이야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듣고 있다는 짧은 대답만을 이으며 주석을 따라 걷다가 눈이 발목까지 쌓인 들판에 풀썩 드러눕는걸 보고 당황했다. 그게 얼굴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주석은 카메라를 가슴께에 둔 채로 팔을 휘적이며 그것을 올려다본다.

"같이 하실래요?"

"이런 건 중학생 때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뭐 어때요, 아무도 안 보는데. 어른은 하면 안 되나."

"……그건 아닙니다만."

"빨리요."

주석은 자기 옆자리를 계속 눈짓했다. 그것은 눈 위로 눕는 게 못마땅했는지 고민을 하다가 주석의 옆으로 누웠다. 주석이 웃는 소리를 내며 팔을 휘젓는다. 그것은 차마 그 행동까진 무리였는지 가만히 누운 채 주석을 바라본다. 주석은 카메라 렌즈를 둘 쪽으로 돌리고는 팔을 쭉 뻗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화면에 찍힌 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어쩐지 그리워 보이는 낯이 스며든다. 주석은 나지막이 말한다.

"생각보다 눈은 차갑지 않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추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기엔 삼촌 옷차림이 너무 얇은데요."

"체온 센서를 끄면 돼서 괜찮습니다."

주석은 정말 안드로이드다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숨기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신이 안드로이드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생전의 기설 또한 자신이 안드로이드가 되었다면 숨기지 않을 것 같아 하는 대답일까? 어느 쪽이든 주석은 알 수 없었다. 누운 채로 또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면 둘은 별장 테라스에 나가 삼각대를 설치하고 밤하늘을 함께 구경했다. 흐려짐 하나 없이 검푸른 하늘에 보석처럼 별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운이 좋게도 그날은 유성우가 떨어졌다. 주석이 그것에게 묻는다. 소원 비셨어요, 삼촌? 그것이 주석에게 답한다. 저는 그런 미신은 믿지 않습니다. 주석이 의미심장하게 웃어넘겼다.

넷째날 폭설이 내렸다. 밖을 나갈 수 없을 만큼 눈보라가 쳐서 그것은 눈보라가 그치면 계획했던 일정보다 더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놨다. 아마도 주석의 안위가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주석은 탁자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여행 계획에 변경은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식량은 일주일 치를 가져왔고 그것은 식사를 하지 않으니 넉넉하다는 것이다. 장작도 이미 일주일 치를 여행사에서 가져다 놨다고 했으니 얼어 죽을 염려도 없다며 평소보다 강경하게 버텼다. 그것은 고민한다. 주석이 이렇게까지 버티는 이유가 있을 거란 판단 끝에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별장 안에서 벽난로 앞에 모여 눈이 언제 그칠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섯째날 새벽, 여전히 폭설이 내렸다. 그것은 휘날리는 눈을 보다가 잠든 주석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러다간 둘이 여기에 고립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억지로 그를 데려간다면 그는 반발할까. 예정했던 일주일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한다면 그가 버틸 수 있을까. 많은 가능성을 머리 속으로 계산했다. 그는 반발할 것이고 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금 있는 식량과 장작을 계산해 그를 최대한 오래 버티게 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자 주석이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주석은 멍하니 그의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어림잡아본다. 운이 좋다면 마지막 날에야 눈이 그칠까. 주석은 카메라를 들고 벽난로 앞 의자에 기댔다. 그것 또한 이제는 익숙하게 그의 곁에 자리한다. 잘 잤냐는 그것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던 주석이 입을 연다.

"저, 이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 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못다한 이야기라니. 그것은 바로 알아채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주석과 나눈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석의 검은 눈이 카메라의 화면에서 그것의 낯으로 움직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입이 열린다.

"삼촌 한기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HGS-M0202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를요."

"……."

HGS-M0202는 혼란스러웠다. 왼쪽 관자놀이에 붙은 LED의 불빛이 황색으로 빛났다. 그가 어떻게 HGS-M0202의 제품번호를 아는 것일까? HGS-M0202는 자신의 제품 번호를 아는 사람이 극히 소수라는 것을 안다. HGS-M0202을 만든 제작사와 한기정 정도일 것이다. 절대 알려주지 말라 일렀을 텐데 기정은 아무래도 주석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고 HGS-M0202는 생각했다. 그제야 HGS-M0202은 답한다.

"무엇을 제게 묻고 싶으십니까, 조카님."

"음… 일단은 우리 호칭 정리를 해야겠어요. 당신은 한기설이 아니잖아요, HGS-M0202."

"…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예."

"그러니 그냥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것은 HGS-M0202에게 퍽 곤란한 답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궁금했던 탓이다.

"좋습니다, 한주석 씨. 이러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해요."

호칭정리가 끝나고 나서야 주석은 속 안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낸다. 벽난로 안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을 구경하던 그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HGS-M0202을 바라봤다.

"삼촌은 왜 당신을 만들었나요?"

순수한 의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유를 유추하고 있는 듯 보였다. HGS-M0202는 답한다.

"제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은 저 또한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까?"

"예,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추측해주세요. 한기설이 왜 당신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요."

HGS-M0202은 주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쩐지 HGS-M0202는 혼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여기에서 주석이 자신과 이런 화제를 꺼냈는지 HGS-M0202는 알 것 같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했구나. 밖에 폭설이 내리지 않더라도 HGS-M0202는 한주석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다. 여기에는 HGS-M0202와 한기설을 비호해줄 다른 가족마저 없다. 주석은 그 점을 파고든 것이다. HGS-M0202는 시간을 끌어봤자 어차피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아직 둘에겐 이틀의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제 기억은 한기설의 사망 전날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망 당시 그 이의 생각까지는 제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이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걸 알았을 때 가족을 떠올렸습니다. 떠올린 순서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 형제자매, 그리고 당신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여림을 심히 걱정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게 나쁜 핑계가 되더라도 그저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잊히기 싫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주석은 HGS-M0202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 담아왔던 의문, 그리고 답. 묵혀있던 감정들이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 입을 열었다간 정제되지 않은 날 것마냥 뱉어버릴 것 같아서 꾹 참아낸다. 응어리진 감정이 대화 한 번으로 풀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보다 사소한 이유에 주석은 울컥했다. 바보 같은 사람이다. HGS-M0202의 추측이 사실에 가깝다면 더더욱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 주석은 기가 찬다는 듯 물기 어린 한숨을 내뱉는다.

"… 어리석어요, 정말. 고작 그런 이유로… 그것도 제 마음이 약하다는 이유로 당신을 만든 거라면 최악이네요.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저를 어린 아이로만 봤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왜 당신이 면목이 없어요? 잘못한 건 삼촌이죠. 당신이 아니고요. 바보 같아요. … 그냥 말하면 되잖아요. 잊지 말아달라고요. 그랬으면 잊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잊어달라고 해도 저는 기억했을 텐데. "

맑은 눈물이 뺨을 타고 툭, 툭 주석이 들고 있던 카메라 액정 위로 떨어진다. 카메라 화면에는 생전의 기설의 모습이 찍혀있는 사진이 비친다. HGS-M0202이 아닌 그 사진만을 응시한다. 주석은 안경을 벗어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탓에 고개가 앞으로 수그러진다. 잘게 어깨가 떨린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나는, 나는 괴로웠다고요. 당신을 제대로 추모하고 떠나보낼 틈도 없이 당신과 닮은… 기계가 당신 행세를 하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비어버린 자리를 아무리 닮은 모조품으로 대체한다고 그 구멍이 메워지는 건 아니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아닐 텐데도. 오히려 마주칠 때마다 당신의 죽음이 거짓말 같아서… 한시도 당신을 제대로 떠나보낸 적이 없다, 고요……."

"……."

HGS-M0202는 어떠한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존재 때문에 그리도 괴로웠다는데. 그저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한참 말이 없던 주석은 붉어진 눈시울로 HGS-M0202을 바라본다.

"HGS-M0202, 당신을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저는 당신이 삼촌과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모조품이라고 한 말에 상처를 받았다면 죄송해요."

"한주석 씨의 말이 그렇게 틀리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인정하는 HGS-M0202의 모습에 주석은 어째선지 웃음이 났다. 그 모습마저 기설과 지독하게 닮아있기 때문일까? 주석은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구나 싶었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가족에게 잊히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과 닮은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오판을 했다는 것이. 상실을 견뎌야 한다고 말할 줄 알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상실만은 두려워했다는 게 주석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이 안드로이드는 …… 어쩌면 기설의 유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HGS-M0202. 삼촌이 당신을 제게 남긴 가장 큰 이유가 저를 염려해서인가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주석은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확실해졌네요. 저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HGS-M0202. 네, 정말이지… 필요 없어요. "

"……."

"안드로이드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제게서 삼촌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한기설의 모습으로, 한기설의 목소리로… 당신이 올 필요는 없어요."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 나가는 주석은 다른 누구보다도 침착했다. 한기설의 대체품으로 HGS-M0202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HGS-M0202는 한기설과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구분해주었다. 어떤 안드로이드도 어느 한 사람을 똑같이 본떠 만들지 않는다. 만들더라도 그 안드로이드가 그 인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행동하는 안드로이드가 생전의 그 사람이 할 선택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주석은 HGS-M0202의 손목을 꾹 잡는다.

"삼촌, 저 이제 괜찮아요. 정말 이게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거둬도 되겠죠."

"……."

"HGS-M0202, 안드로이드도 죽음을 무서워하나요?"

HGS-M0202는 주석의 말에 고민했다. 무서워하는가? 죽음을. 기계회로는 주석의 질문을 여러 차례 돌렸지만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기설의 기억에서의 죽음은 언젠가 응당 그래야 하만 하는 것… 그러나 그 기억의 주인 마저도 마지막엔 자신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HGS-M0202는 되려 되묻는다.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입니까?"

주석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한다.

"영원히 잠드는 것이요."

"그것이 저 같은 안드로이드여도 말입니까."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 기억의 주인도 무서워하진 않았을 겁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다만…"

HGS-M0202는 주석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당신은 삼촌을 두 번이나 잃게 되겠습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괜찮아요."

주석의 웃음소리가 뒤따른다.

"한 번 잃어봤으니까요. 이번엔 조금만 아파할게요."

"예, 부디 그래 주십시오."

HGS-M0202는 자신의 목뒤의 삽입구에서 새하얀 칩을 눌러 꺼냈다. 그것을 한주석에게로 건네며 말한다. 한기설의 메모리칩입니다. 주석은 그것을 받아든다. 이걸 꺼내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 안에 있는 기억은 제게 다 저장되어있습니다. 단지 제가 손상을 입으면 더 이상 복구할 수 없을 겁니다. 토대로 복구할 메모리칩 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설의 메모리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꾹 쥔 채로 HGS-M0202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HGS-M0202는 그런 주석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주석에 머리에 살짝 기댄다. 피곤했던 탓인지 주석은 금세 잠이 들었다. 

"한기설이 아니더라도 저는 당신의 삼촌이라 생각합니다. 조카님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게 마음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타들어가는 장작을 바라보며 HGS-M0202가 조용히 말했다. HGS-M0202의 LED등의 색도 벽난로의 불꽃과 함께 붉게 물들어져 갔다.


별장에 혼자 일어나 맞이한 아침엔 기설의 필체로 쓰인 쪽지와 물건들이 남겨져 있었다. 쪽지가 남겨진 식탁에 온기가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겉옷에 팔을 대충 끼워 넣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직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지만 주석이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누군가가 치워놓았기 때문이다. 주석은 두리번거리며 그것을 찾는다. 자신의 삼촌이자 친구였던 안드로이드. 이번에는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잠들어버린 자신을 약간이나마 원망했다.

설원의 저 멀리 하이얀 사람이 서 있다. 얇은 하이얀 옷을 걸치고 맨발로 서 있는 사람. 너무 새하얘서 내리는 눈과 분간이 잘 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며 다가오려는 주석을 보곤 고개를 내젓는다. 주석의 입에서 입김이 뿌옇게 흩어진다. 다가가려던 주석의 발걸음이 멈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탓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그 인영은 온데간데없다.

HGS-M0202는 주석에게 새하얀 메모리칩을 남기고 떠났다. 어떠한 작별 인사도 받지 않은 채로. 주석은 그의 삼촌들을 가끔 회상한다. 창문 밖으로 하얀 눈이 내릴 때마다 한기설도… HGS-M0202도.


HGS-M0202 : 한기설 - Memorial 0202의 약자입니다. 2월 2일은 한기설의 생일.

분량조절 대실패 … ! 엄청난 캐붕! 퇴고도 안 함! 그냥 가볍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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