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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무리가 비추는 길

하늘에는 어슴푸레한 초승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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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커뮤니티 '창공의 유스티티아'

델피오 크레센트 개인 엔딩로그

※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의 캐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리 죄송합니다.)


" 자랑스러운 내 아들, 듣거라."

한 번은 왜 성이 초승달을 뜻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여신 유스티티아의 축복을 받은 땅, 하늘 대륙은 태양이 지는 날이 없었고 당연히 '달'이 하늘에 뜬 적도 없었다. 달이란건 머나먼 과거에 인간이 대지에 머물러 살던 시절 기록된 '태양의 반대'가 아니었던가. 델피오를 안아 든 아버지는 한 손으로 태양을 짚었다. 

"우리를 항상 비추는 태양의 뒷면은 달이란다. 인류가 지상에서 살 때엔 낮과 밤이 공존했다고 하지. 태양이 지면…"

하늘에 짚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어린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다. 태양 빛을 가린 커다란 손의 그림자가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밤길을 걷는 나그네들이 헤매지 않게 달이 뜬단다. 태양과 다르게 달은 모습을 자주 바꾸었는데 그중 하나가 초승달이지."

엄지와 검지를 벌려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아버지의 손이 불쑥 델피오의 앞으로 내밀어진다. 

"이렇게 생겼지, 어떠냐?"

"동그랗게 비어있어요."

"그렇지. 비어있다면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델피오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만 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초승달을 따라 하느라 안쪽으로 둥글게 굽은 손. 꼭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작은 손을 주먹 쥐고 아버지의 손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버지는 델피오의 손을 감싸 쥐며 크게 웃었다. 

"장하구나! 바로 그거란다. 비어있는 부분만큼 채울 수 있지. 이게 우리 크레센트 가의 중심이다. 우리 아들은 뭘로 채우고 싶으냐?" 

… ….

자신이 무어라 답했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대답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의 대답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 스물 여섯의 델피오 크레센트는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니발리스에 내려앉은 밤, 길 잃은 행인처럼 오래도록……

달무리가 비추는 길 

호외요, 호외! 신문을 판매하는 상인이 큰 소리로 외쳐댄다. 광장으로 나온 인파는 하늘로 돌아온 탐험대를 반기느라 여념이 없다. 유스티폴 전역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다. 예상보다 빠르게 지상이 수복되면서 이주 정책에 불이 붙었고 많은 이들이 지상에 내려가 터전을 꾸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쉽사리 지상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이주를 망설였고 누군가는 미개척지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발리스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정든 그들의 터전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은 델피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늘 대륙으로 올라오자마자 소란을 피해 니발리스의 크레센트 저택으로 돌아왔다. 

대지에 해가 떠오르자 하늘 대륙에는 달이 떴다. 세타 사람들은 밤을 신기해했지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워낙 세타는 심한 눈보라가 자주 불었고 안개가 끼면 어두워 이미 도시 곳곳에는 불빛이 많았던 덕이다. 창밖으로 거리의 등이 하나둘 켜지는 것을 바라보며 밀린 우편을 정리했다. 대부분 지상을 되돌려준 영웅에 대한 감사와 시기, 명성에 빌붙으려는 아첨이었다. 이 사이에 반가운 동료들의 편지가 섞여 있으니 델피오는 읽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으로 나누었다. 왼쪽 위 발신인만 보고 넘기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리다 우뚝 멈춘다. 발신인…… '유스티폴 법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고 손에 얼굴을 묻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겠지.' 

테이블 위로 쌓인 편지들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법원 우편만을 지칼로 뜯어 펼쳐보았다. 예상대로 탐험대 귀환까지 미룬 범인에 대한 처분을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델피오는 복잡한 마음에 제복 안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자 느릿한 숨을 따라 연기가 부옇게 흩어진다. 연이어 두어 개를 더 피워대고 나서야 일어나 엘리스에게 기별을 보냈다. 

'오는 건 상관없다만, 괜찮겠나.' 엘리스에게서 온 답은 짧지만 충분했다. 오래 머물 생각도 아니었고 하룻밤 정도이니 에센시아 가문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거기다 벗인 엘리스가 그의 편의를 봐주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델피오는 가벼운 짐을 챙겨 에클레시아로 향했다. 

마법 사용자들을 지나칠 때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어지러움이 수반되었다. 마력을 극도로 제한된 저택에서 사는 그가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건 이 이유 때문일 터다. 덕분에 수도에 이르기까지 그는 내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모든 약은 무조건 정량을 먹어야 해!'라며 호통을 치던 티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정량 이상으로는 복용하지 않았지만 종종 유혹을 참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벌을 받듯 두통이 더 심해지는 부작용에 시달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퀭한 얼굴로 엘리스를 마주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못 본 새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것 같은데. 법원은 내일 방문하는 게 어떠신지."

"말은 고맙지만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야."

얼마 되지 않는 짐은 사용인에게 맡기고 바로 유스티폴 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델피오가 범인의 처분을 보류했던 이유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몇십년 형을 받을 바에는 처벌을 보류한 채로 결정권자가 죽게 되면 범인은 영원히 구금될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처분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 돌아왔고 결정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범인이 받은 기한은 30년 형. 처음에는 무기징역까지 갔으나 그가 이전에 유스티폴에 세운 공이 있어 점차 줄어들었더랬다. 결정권자가 가지는 권한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대로 그를 교도소에 30년 동안 형을 받게 할지, 아니면 유스티티아의 말씀에 따라 자비를 베풀 것인지. 재판장에는 단지 영웅의 판결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몰렸다. 저마다 델피오가 무슨 선택을 할지 아무렇게나 떠들고 있었다. 단상에 오른 델피오는 처분을 결정하라는 재판관의 말에 입을 뗐다. 

"저, 델피오 크레센트는 하일 마이어를 여신의 말씀대로 용서하겠습니다." 

"뭐? 네가 뭔데 나를 용서해?" 

재판장이 술렁였다. 믿지도 않는 여신을 거들먹거리며 자신을 용서했다는 것이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범인은 되려 그에게 화를 냈다. 재판관은 큰 목소리로 정숙-! 이라 외치자 하나둘 떠드는 소리가 잠잠해져 간다. 크레센트가 테러사건은 유일한 생존자 델피오 크레센트가 범인을 용서하면서 끝이 났다.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는 법원을 나서는 델피오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질문했다. 

"네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군. 정말 괜찮겠나?"

"…음, 뭐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끔 압력을 넣어달라고 했던 건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거 아닌가." 

"하하, 그랬지. 괜찮아.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날 해칠 수도 없을 거야. 여차하면 너희가 날 지켜주겠지……. 이런 일 벌이기 전에 방비도 안해둔게 아니니까." 

"참 태평하군 그래."

델피오는 작게 소리내어 웃어넘겼다. 엘리스는 델피오가 터무니없이 범인을 용서한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델피오의 얼굴은 그저 편안해 보였다. 그의 판단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범인이 용서로 풀려나자마자 보복을 하려 한들 그들은 영웅이며, 따라붙는 눈이 많아 쉽게 움직이진 못할 것이다. 꾸준히 친구들이 그의 곁을 채울 테니 노리기도 어렵겠지.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남들의 시선'일터다. 마법사용자가 마도공학자의 가문을 박해한 사건에서 노여움을 잊고 용서를 했다, 꽤 흥미로운 토픽이 아니던가. 마도공학계에서 인지도가 있는 그가 마법을 아예 등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풀려난 범인이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조용히 지내준다면 더더욱 좋고. 

물론 과연 그가 정말로 이런 사고를 거쳤는지는 물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 나중에 묻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 바로 니발리스로 돌아가려고?"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을까. 전문가랑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야."

엘리스의 질문에 델피오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굳이 '전문가'라고 칭했다는건 일 얘기라는 뜻이다. 엘리스는 장난스럽게 답했다. 

"제대로 뒤엎으려면 꼰대들 앞에선 다크써클은 화장으로 가려야 할 거다."

"윽, 굳이 해야 할까…"

"흠……, 네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 적당히 가리고 평범하게 신뢰감 가는 인상 주기. 둘, 아예 피폐하게 가서 골방 연구자의 전문성을 부각하기. 어떤 게 편해?"

장난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델피오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차라리 화장하겠다고 답했다. 신뢰감을 주는 건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이어지는 말들은 친구 사이에 나오기엔 지나치게 비즈니스적이긴 했지만 엘리스는 종종 농담을 섞어가며 분위기를 가볍게 띄웠다. 얼마 안 가 마도공학계가 발칵 뒤집힌 건 예정된 일이었다. 마력에 기대지 않는 마도공학을 퍼뜨리고 그를 위한 학교를 세우겠다는 건 아무래도 학계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한가로운 오후. 하늘하늘 내리는 눈을 구경하며 늦잠을 잔 여운을 가득 느끼고 있을 즈음에 벌컥, 저택의 문이 열리며 모티머의 노성이 들려왔다. 

"델-피-오- 크- 레- 센- 트!!"

깜짝 놀라 침대 시트를 담요처럼 어깨를 감싸도록 두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뜩 흥분한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티머를 발견한 델피오는 본능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든 말든 동그란 안경을 쓴 그의 친구는 폴짝폴짝 뛰면서 담아놨던 말을 순식간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엘리스한테 들었어! 너 또 정량 안 지키고 복용해서 두통에 시달렸다며!! 내가 말했지, 델피!! 정량을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네 몸에 독이 될 수도 있다니까!! 자꾸 이러면 정말, 정말 정말-!!! 쓴 맛을 넣어버릴 거야!!!"

"까악- 깍!"

씩씩거리며 얘기하는 모티머의 머리에 앉아있던 까마귀 피피마저 델피오에게 날개를 펄럭거리며 화를 내는 듯 굴었다. 그는 둘의 환영인사를 하기도 전에 달달 추궁당하며 언제 엘리스에게 자신이 약을 정량보다 더 복용해서 부작용에 시달렸다는걸 말했는지 찬찬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근황을 얘기하다 주고받았구나……. 그게 그렇게 모티머에게 전해질 줄 몰랐다. 정말로. 

"티티, 내가…… 잘못했어."

이미 전해진 잘못이라면 빠르게 비는 것이 낫겠단 판단을 끝마친 델피오는 모티머에게 순순히 잔소리를 들었다. 티티의 잔소리는 그를 걱정하는 애정에서 기반된 것이므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나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거기다 잠에서 깨자마자 들을 줄은 몰랐기에 정신이 없었다. 다신 안 그럴 거지? 응… 괘씸하니까 이번엔 쓴 맛을 넣어버릴 거야. 알겠어…. 그래도 모티머는 질문마다 바로 들려오는 긍정적인 답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쓴맛을 넣겠다고는 했으나 시무룩한 그의 표정에 결심이 종종 흔들렸다. 

한바탕 혼이 나고 나서 델피오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고 모티머는 크레센트 저택 내에 있는 '모티&피피'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어서와! 어서와!'라고 소리를 내는 태엽 인형이 반기는 작은 보금자리. 피피는 자신을 닮은 태엽인형을 그리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기특하게도 망가뜨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방에 짐을 내려놓은 모티머는 델피오에게 주기로 한 약이 담긴 주머니를 들고 방금 끓인 홍차 향이 은은하게 퍼진 거실로 향했다. 탁자엔 방금 데운 빵과 카이막, 진한 홍차가 찻잔에 담겼다. 마주친 시선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델피오였다. 

"어서 와, 티티. 아까 못한 환영인사 겸… 네 얘기도 들을 겸 준비했어." 

모티머는 익숙하게 의자에 앉아 약주머니를 빈 곳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둘은 그동안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어디를 여행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의 친구는 상냥하게도 각지에서 자라난 꽃들을 함께 가져왔다. 싱싱한 꽃들도 있었지만 오래 보관한 탓에 아쉽게도 시들어 버린 꽃도 있었다. 델피오는 가장 상태가 좋은 꽃을 꽃병에 꽂아두며 벗이 가져온 계절의 정취를 느꼈다. 달각이는 찻잔의 소리, 모험담을 들려주는 재잘거림… 크레센트 저택에 활기가 돌았다.

 이맘때쯤 니발리스는 축제 기간이었다. 외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동네 사람들도 축제 기간만큼은 관광 특수를 즐기곤 했다. 집마다 개성 있는 장식들로 꾸몄고 거리에는 마도 등불이 줄지어 달렸다. 그리고 때마침 샤카르도 집으로 돌아와 축제 준비를 거들었다. 델피오네 집에 모티머가 와있다는걸 안 샤카르는 뻔뻔하게 크레센트 가에 잠시 눌러앉았다. '샤카 2호'를 온 김에 정비해주겠다는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다만, 걱정이 많고 다정한 그의 친구는 머무는 동안 매일 점검하려 들 테다. 델피오는 의수에 몰린 집중을 흩트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샤카네 집은 다 꾸몄어?"

"응? 돌아오니 이미 다 꾸며놨던데. 오히려 바힌 아주머니네 부스를 만드는데 거들었지."

"그래? 잘 됐다. 너희 온 김에 저택 꾸미는 것 좀 도와줘." 

"어쩐지 델피 집만 휑하더라! 당연히 도와줄게!" 

밖에 연금재를 사러 잠시 나간다더니, 언제 돌아왔는지 델피오와 샤카르의 사이에 불쑥 나타난 모티머가 마지막 말을 가로챘다. 그런 그녀의 품에 있는 물건들은 연금재라기보단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화사한 장식들이 들려있었다. 샤카르는 모티머가 가져온 장식을 하나 꺼내며 저택을 둘러보았다.

"좋지, 델피 네 부탁이라면야. 당장 시작해야겠는걸? 이 저택은 크니까." 

"전부 할 필요는 없고 거리에서 보이는 울타리만 꾸며도 돼." 

"안 돼! 그럼 축제 분위기가 안 살잖아! 전부 꾸미자!"

"모처럼 축제니까. 그렇지, 모티 브락?"

"델피, 모처럼 축제니까!" 

정말이지, 이 저택을 정말 다 꾸밀 셈이야? 두 친구는 씨익 올려 웃는다. 우리는 그렇게 축제 첫날을 저택 꾸미기에 열중했다. 모티머가 가져왔던 장식과 델피오가 원래 축제용으로 사두었던 장식은 금방 동나버렸다. 있는 대로 주변 가게에서 남는 재고를 싹 쓸어오니 각각 스타일이 달라 따로 걸어두니 태가 안 살았다. 고민하던 셋은 결국 장식을 같은 간격으로 잘라 이어 붙이기는 걸로 통일성을 맞추기로 했다. 샤카르와 모티머가 난로 앞에 모여 그 많은 장식을 일정하게 자르고 맞춰보고 붙여가면 델피오는 그 사이사이마다 반짝거릴 작은 전구를 이어 연결했다. 

저택이 큰 탓에 장식을 감을 울타리도 길어서 작업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새벽녘에 들어서자 속도가 느려지던 둘은 고단했는지 각각 소파에 기대고 책상에 엎어져 까무룩 잠에 들었다. 어둑해진 거실에 장식에 달린 전구만이 은은하게 깜빡였다. 델피오는 난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밀어 넣고 춥지 않도록 담요를 가지고 와 모티머와 샤카르의 어깨 위로 올려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정한 두 친구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 곁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 날, 화려하게 꾸며진 크레센트 가의 울타리에 만족한 친구들은 축제를 즐기러 나갔다. 축제 중인 니발리스는 외부인으로 붐볐고 시끌벅적했다. 광장에는 눈으로 만들었다는 게 안 믿길 정도로 정교한 모양의 조각들이 전시되어있는가 하면, 축제의 먹음직스러운 길거리 음식들이 널렸고, 이제는 기념품으로 탐험대의 영웅들을 본뜬 단추 인형을 만든 곳도 있었다. 우리야 당사자들이니 편안히 축제를 즐기러 갔다가 알아보는 사람들에 휘말려 얼마 못 가고 집으로 돌아왔다. 

특히 많이 시달렸던 샤카르가 "헉, 허… 델피, 왜 네가 밖으로 안 나오는지 조금 이해했어."라며 소파에 드러눕자 델피오가 "그건 무슨 뜻이야?" 답하며 눈을 흘겼다.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 모티머도 그 옆에 널브러지며 한마디 했다. 

"지상에서는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많진 않았는데 말야~" 

"그 인형때문이 아닐까."

"단추 인형 말하는거지?"

"생각보다 잘 만들긴 했어!"

그 북적거리는 안에서 모티머는 친구들의 단추 인형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서 품에 안고 왔다. 그 중에서도 자신, 델피오, 샤카르의 인형만 빼서 팔을 쭉 펴 들어보이더니 둘의 얼굴과 인형을 비교해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둑해지자 창문 너머 화약으로 만든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폭죽을 구경했다. 마법으로 만드는 폭죽처럼 엄청 화려하지 않지만 큰 소리와 함께 투박하게 터지는 폭죽은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더 이상 폭죽이 터지지 않을 때까지 추억들을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축제가 끝나고 모티머는 다시 여행 준비를 했다. 샤카르는 모티머보다 하루 먼저 지상으로 내려가기로 해서 먼저 방을 비웠다. 이것도 델피오가 계속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미뤄진 일정이었다. 그는 다음 축제에도 꼭 여기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티머까지 집을 떠나던 날, 델피오는 하얀 곱슬머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 거리를 바라보다 언젠가 돌아올 친구들에게 먼저 편지를 쓰기로 했다.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친구가 어떤 길을 걷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자씩 써 내려갔다. 


"너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집 알아달라고 한 거야, 아우라!"

"거긴 아지트로 쓰면 되지. 안 쓴다곤 안 했어."

"그런 거면 그냥 오빠 집에서 살면 되지! 어째서 같이 산다는 사람이 델피오야!"

"킨사, 제발 좀…"

델피오와 루룬의 동거 소식에 누구보다도 버선발로 달려온 것은 루룬의 오빠, 킨사 뮬러였다. 자유 연구 기간에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루룬이 킨사를 델피오에게 소개해주었고, 생각보다 둘이 죽이 잘 맞아 금방 친해진 이후로 킨사는 델피오네 집을 제 집마냥 드나들곤 하였다. 그러니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방에 들어앉아 여동생에게 서운함을 고래고래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루룬은 골이 울리는지 관자놀이를 짚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어디서 살든 내 마음이야, 킨사. 그리고 어차피 여기로 자주 오잖아. 겸사겸사 동생도 같이 볼 텐데 좋은 거 아냐?"

"그야 편해지긴 하겠지! 근데 가족이랑 친구랑 같냐고오-. 근데 이럴 거면 그냥 내 집에서… " 

계속 고집을 부리는 킨사때문에 루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참다못한 루룬은 징징거리는 제 오빠를 단호하게 내쫒곤 대문을 등에 기댄 채 한참 열어주지 않고 실랑이를 했다. 킨사 성격에 이 의미 없는 설전과 투닥거림은 일주일 정도 가겠거니 싶어 밖에 나가 있는 루룬이 추울까 싶어 담요를 어깨에 둘러주고는 왁왁거리는 두 남매를 바라보며 약간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닷새가 되던 날, 마지못해 킨사가 고집을 꺾고 나서야 집 안이 조용해졌다. 그동안 시달린 루룬은 소파에 무릎을 올려 끌어안은 채로 늘어졌다. 그 옆에 앉아 피곤한 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루룬의 머리를 쓸어주는 델피오에게 기댄 루룬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끈질긴 사람이 아니었는데……."

"형은 너를 엄청 아끼잖아. 가끔 보면 동생 말고 딸처럼 여기는 것 같아."

"흥, 그럴 거면 연락이나 끊질 말든지." 

델피오는 루룬과 킨사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유추할 수 있을 만큼 드러날 때만 귀를 기울일 뿐이다.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찡그렸던 표정이 평온해지면 그제서야 손을 떼냈다. 쓰다듬는 손길이 사라지자 루룬은 눈을 뜨고 델피오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면 그는 옅게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시간도 늦었는데 잘까?" 따위의 평화롭고 다정한 일상으로. 

둘이 동거를 시작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루룬이 니발리스로 이사 오면서 자주 그의 집으로 놀러 왔고 집에 돌아갈라 하면 혼자 있길 싫어하는 그가 루룬을 이런저런 핑계로 붙잡았을 뿐이다. 이제는 가까운 곳에 산다고 말했음에도 시무룩한 델피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루룬은 거절하기 어려워지곤 했다. 그의 얼굴에 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가장 힘들어하던 때의 위태롭고 두려워하던 그 낯이 그대로 겹쳐 보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혼자 두기 어려운 사람, 루룬은 델피오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의 기억이 무색하게 우리는 꽤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하고, 아직도 미련이 남은 오빠를 달래고, 아침잠이 많은 델피오의 잠든 얼굴을 구경하고… 오늘처럼 눈이 살랑살랑 흩날리는 날에는 산책을 했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인적이 드문 설원 위를 거닐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게 다였지만 루룬은 이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눈밭 위를 작은 발자국과 큰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져갔다. 

"내기 하나 할래, 델피오?"

"갑자기?"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끝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루룬으로 옮겨간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다시 물으며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엄지 위에 올려두었다. 

"내기 하자."

"뭘 걸고?" 

"비밀이야. 그럼 너는 뭘 바라는데?" 

"그건 불공평하잖아… 나도 비밀로 할게." 

"그래 좋아. 앞면, 뒷면?" 

델피오는 고민하는 듯싶더니 뒷면을 골랐다. 그녀가 내기를 좋아하는 건 언제나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살짝 건드려 어떤 면이 위로 오도록 조작하기는 쉬웠으니까. 그는 마법을 쓰는걸 꺼리는 데다 지금도 약간 긴장한 티가 났다. 그에 작게 웃은 루룬이 동전을 높게 튕긴다. 처음으로 마법을 쓰지 않고 순수한 운에 맡기는 내기였다. 손바닥에 안착한 동전 위로 손을 포개어 덮고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뒷면이었다. 루룬도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비죽이며 델피오를 홱 바라본다. 그가 마법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 내기에 졌다는 게 그냥 분했는지 되려 억울한 표정이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먼저 내기하자고 한 건 넌데, 표정이 왜 그래?"

"……마법은 안 써도 바람은 내 편일 줄 알았거든. 하아… 그래도 결과에는 승복해야겠지. 뭘 원해?" 

"흠, 글쎄……. 난 지금이 가장 좋은데, 바라는 것도 더 없고." 

"그래? 그럼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지금이 당장 바라는 것이 더 없다는 말에 루룬은 잡고 있던 손을 풀곤 도망치듯 델피오보다 앞서 걸으며 혀를 베에, 내밀었다. 바로 말 안 했으니 이렇게 넘어가 버리려는 행동에 그가 뒤를 따라가며 루룬이 이기면 뭘 해달라 하려고 했는지 알려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계속 못 들은 척 했다. 그러다 바싹 약이 오르면 허리를 잡고 위로 안아 들고 루룬을 올려다보며 잘게 보채는 것이다. 갑자기 들린 몸에 놀란 루룬이 "델피오!" 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 그는 아이처럼 웃었다. "알려주면 내려줄게." 몇번 버둥거리던 루룬이 결국 힘을 빼고 흘기듯이 내려다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그래. 알려줄 테니까 내려줘." "지금 알려주면." "으으, 내려주면…" 그렇게 작은 실랑이가 오래도록 이어져갔다. 두 사람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번져가면서 말이다. 


덜덜덜 떨려오는 비공정의 진동을 느끼며 델피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 대륙이 점처럼 멀어져가고 드넓게 펼쳐진 푸른 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억센 탓에 진동이 심해지면 그는 품에 있는 유골함을 더 단단히 안았다. 짐칸에 넣어두는 건 불안해 고집스럽게 안고 탄 부모님의 유골함이었다. 가족들의 유품이 담긴 상자는 델피오의 옆 좌석에서 놓여있어 거기에도 신경을 쏟느라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안색이 파래졌다. 착지를 알린 운전기사가 그의 안색을 보고 약을 권했으나 살짝 고개를 내젓고는 땅에 발을 디뎠다. 

 그가 도착한 곳은 큰 나무가 몇 그루 자라있는 너른 들판이었다. 모티머가 지상을 여행하고 들려주던 이야기에 한 번 등장한 적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은 설원과 비슷하지만 눈 대신 꽃이 끝없이 자라있어, 델피……엄청 따스한 곳이야. 모티머가 가리킨 사진에 피어있는 꽃과 풀, 그리고 커다란 나무까지. 그는 친구가 떠난 뒤에도 그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가족들의 장례를 치러줘야겠다고. 물론 유스티폴에도 묻을 곳은 많았다. 거기다 크레센트 가는 설산에 가문의 묘가 세워져 있었다. 초승달의 자손은 누구라도 눈 아래 묻히는 게 자랑이고 긍지였으나 델피오의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 이주가 끝나면 사라질 하늘 대륙보다는 지상이 나을 테다. 그리고 아버지라면 그가 대지를 되찾아왔을 때, 대지에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림짐작하는 것이다. 

그는 나무 근처에서 유품 상자가 들어갈 만큼 흙을 파냈다. 유골이 남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의 원소에 녹아버렸다. 잿더미에서 그나마 형태가 온전한 친척들의 유품을 찾아 담은 것이 이 상자에 담겨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혼이 여기에 깃들어 작게나마 위로받으리라 믿으며 상자를 묻었다. 흙을 만지느라 더러워진 손을 털어내고 나무에 기대 앉아 유골함 위로 손을 얹은 채 꽃이 만개한 들판을 보았다. 

하늘에는 어슴푸레한 초승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낯설면서도 지겹도록 익숙한 모양이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 아들은 뭘로 채우고 싶으냐? 그 물음이 기억날 때마다 그는 비어있기에 더 외롭다고 느꼈었다. 채워져 있던 자리가 비고나니 서러울 만큼 외로웠다고. 하루는 복수를 꿈꾸며 악을 채웠고,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지 모를까 두려움이 넘쳐흘렀고, 어떻게 외면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엔 체념하기를 수백 번. 그가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그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곳에서는 샤카르와 그 가족들에게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어릴 때와 한 톨도 변함없이 자라 전국을 여행하며 계절과 소식을 들려주는 모티머에겐 과분한 걱정을 받고 있다. 그저 친구의 부탁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걸 제쳐두고 들어주었던 엘리스의 호의와 굳게 닫힌 문에도 아랑곳 않고 두들겨 곁에 있어 주었던 루룬의 애정이 스며들었다. 그 외에도 함께한 친구들의 모든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가 그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걸 그는 늦게 깨달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눈가를 간질이자 델피오는 눈을 감았다. 무엇으로 채우고 싶냐는 물음엔 이젠 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그럼에도 비어있는 부분은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괴롭더라도 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 너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 하나,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용기를 채우고 싶다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어쩌다보니 엔딩로그를 빙자한 친구들과 함께한 로그가 되었네요. 등장한 친구들 이야기도 제대로 못풀어나간 것 같아 역시 능력부족에 캐붕 미안합니다()… 그냥 완성에 의의를 두려고요.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아가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엔딩난지 벌써 20일… 정도? 엔딩로그가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러닝 고생하셨고, 델피오의 친구가 되어준 28명의 친구들 고맙습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적고 싶었는데 능력부족… 그렇지만 아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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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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