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上. 대륙행 열차
PC 소개
PC 1. 윤몽희 PL 버팬
14세 경성 소녀. 황금정(충무로)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소설, 만화에 깊이 몰두해있는 몽상가. 대단한 배짱과 호기심의 이상주의자.
마을에서 ‘왕년에 만주 최고의 총잡이였다’던 할머니의 말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
PC 2. 임석진 (임승희) PL 하누
30세 전직 독립군, 현직 현상금 사냥꾼.
180cm의 거대한 체격과 뛰어난 무예를 가진 남장여자. 강직하고 독선적이며 무뚝뚝한 성격.
함경도 몰락 양반 가문의 여식으로서 홀로 집안을 이끌던 중, 스승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고 만주로 도망쳐왔다.
PC 3. 미노루 PL 에이미
28세 무법자. 만주에서 제일 악명높은 마적단, ‘백팔요괴단’ 출신.
수려한 미모와 미인계 기술, 독술을 가진 여장남자. 이해타산적이고 위악적이지만 내면의 다정함을 버릴 수 없는 사람.
유사 어머니이자 백팔요괴단의 수장, 물귀신이 소중한 친구인 오도깨비를 살해하자 복수를 다짐하고 도망쳐 나왔다.
부셈이
승희의 과거 장면을 통해 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계절은 봄입니다. 겨울이 끝나가면서 산과 들에는 들꽃이 피어나고, 얼어있던 개울에도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오늘 날씨가 따뜻해서 오빠는 대청마루에 나와서 서책을 읽으며 메모도 하고 있습니다.
하누
좋아요, 따뜻한 봄날인데 곧 소나기가 쏟아지려 하는지 하늘이 흐리고요.
저는 허름한 흰색 한복을 입고 있고 머리는 하나로 땋았어요. 몸가짐을 항상 다정하게 하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굉장히 화를 내시거든요.
하지만 옷은 단정해도 팔자걸음으로 걷고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혼도 많이 나요.
키는 6척인데, 이 시대에 6척이면 남자여도 겁나 큰 건데 여자니까 거의 거인 취급을 받죠.
양반 집안이라곤 해도 찢어지게 가난하니 고용인은 없고요. 집안일, 바깥일 할 것 없이 제가 담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저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부셈이
오빠는 혼자 연필을 깎다가 손아귀 힘이 부족해 잘 안 되니까 당신을 부릅니다.
“얘, 승희야.”
“나는 아귀힘이 부족해서 못 깎겠다.” 하면서 당신 쪽으로 슬쩍 밀어줍니다.
하누
“네, 오라바이.” 오빠를 대하는 태도가 그리 살갑지 않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연필을 깎아줍니다.
부셈이
딱딱한 승희의 태도와 달리 오빠는 승희에게 친근한 편이에요.
오빠는 승희가 깎아준 연필을 햇빛에 대보는데, 뾰족하게 잘 깎여져 있습니다.
“넌 진짜 재주도 좋다.”
“힘도 세고 하니, 목공 일이라도 했으면 딱 맞을 건데, 어쩌다가 몰락 양반 집에 태어나서.”
하누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들이 떠올라요. 자기 없으면 거의 돌아가지 않는 집안과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나 없으면 연필 하나 못 깎는 오라바이 같은 것들.
빈정거리는 듯이 피식 웃으며 “저도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 뻔했습니다.”라고 해요.
부셈이
“내가 이 몸만 괜찮아지면, 경성으로 바로 날아가서 큰돈 벌어 너를 부르마.”
“바야흐로 20세기 아니겠냐, 동생아.”
“이거 봐라.”
주변 양반집 중에 가산을 털어서 자제를 경성이나 동경에 유학 보낸 집들이 있을 것 같아요.
“수철이 알지? 걔가 이번에 동경 가가지고 보내준 엽서들이다.”
엽서 뒤에 수채화로 그린 각국의 모습이 있어요. 모스크바, 만주 등등.
“좋은 세상이다.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니.”
하누
다시 비를 들고 빗질을 하고 있었는데요.
집안에 아무런 기여도 못 하는 오빠는 마루에 앉아 뜬구름만 잡고 있고, 그런 오빠한테 화가 나기도 하고, 또 난 이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데 장남이란 이유로 그렇게 속 편히 살 수 있는 오빠에게 질투가 나기도 해요.
그래서 울컥해서 “오라바이, 그런 헛꿈 꿀 생각은 그만하고 자기 건강이나 잘 추스르시오. 모스크바나 경성은커녕 이 집 울타리 밖에도 못 나가면서 그게 무슨 백일몽이란 말이오?”
부셈이
승희의 말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더니, 큭큭큭 하고 웃다가 기침을 쿨럭쿨럭합니다.
“네 말이 맞지.”
“우스운 소리다.”
“20세기도 우스운 소리고.”
“밖이 20세기면 뭘 하겠냐? 나는 서책에 둘러싸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네 말이 다 맞다.”
하누
그때 할아버지가 부르는 게 어떨까요?
부셈이
좋아요. 그럼 그때 대문 밖에서 “에헴!” 소리가 들리더니 할아버지가 들어옵니다.
오빠는 할아버지가 오는 걸 보자 늘어놓았던 엽서를 황급히 숨기고요.
할아버지는 그걸 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에잉…….” 하면서
“너는 집안을 일으켜야 할 사내놈이 틀어박혀서는 이게 다 무슨 꼴이냐?”
그 말에 오빠는 허탈한 듯 웃고, “네, 시답지 않은 소리를 했습니다. 저도 어서 과거 급제해서 입신양명해야죠.”
할아버지도 오빠의 말에 뼈가 있는 것을 느끼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쉽니다. “얘, 승희야!”
하누
오빠는 장남이니까 할아버지 말에 적당히 언중유골을 할 수 있는 반면, 승희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자기를 누르는 타입이에요. 승희는 사실상 집안을 유지하는 위치다 보니, 좀 더 가정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는 거죠.
공손한 자세로 손 모으고 “예, 할아바이.”
부셈이
“방으로 들어와라.” 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갑니다.
승희가 따라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먼저 앉더니 담뱃잎, 곰방대, 부싯돌을 당신한테 줍니다. 불 피워달라는 말 하나 하지 않고 당신에게 시키는 게 아주 익숙해 보입니다.
하누
늘 있는 일이라는 양 익숙하게 불을 붙여드립니다.
부셈이
“개성 김 대감 집에 다녀오는 길이다.”
하누
김 대감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이러저러하신 그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부셈이
“그래, 옛날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칠 상것 집안인데 이제는 만석꾼이 돼서 거들먹거리더구나.”
“어찌 됐든 끝난 나라는 끝난 나라다. 이대로 망국의 백성으로 남을 수 없지 않느냐.”
“혼사가 들어왔다, 그 말이다.”
하누
담배 도구를 정리하고 쟁반째로 들어 올리다가 깜짝 놀라서 놓쳐요. 덜그렁하고 큰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라서 “혼사요?”
부셈이
쟁반을 떨어뜨린 걸 보고 “조심스럽지 못하게……. 그래. 물 건너간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이런 혼사가 들어오다니 경사가 따로 없구나.”
“선머슴 같은 꼬락서니로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나 했건만 운이 좋다. 너는 앞으로라도 행실 똑바로 하고, 행여라도 부정 탈 일 없게 해라.”
하누
“하, 할아바이. 저는 아직 그럴 생각이…….”
부셈이
“생각? 그게 뭔 말이냐. 가타부타할 게 뭐가 있단 말이야?”
“시끄럽다! 혼삿날 다 잡아놨으니, 어른들 뜻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해라.”
하누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말씀에 거역을 못 했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할아버지 뜻에 어긋나려고 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까요.
그래서 더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단 “네.”라고 대답했지만, 표정은 완전히 엉망이에요.
부셈이
그리고 이 얘기를 오빠가 밖에서 엿듣고 있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문 열고 나오면 바로 건너편 방문이 닫히면서 오빠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면, 오빠가 어스름한 방안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혼자 앉아있을 것 같고요.
이제 스킵을 해서 바로 스승님 만나러 가도 좋지 않을까요?
하누
좋아요. 아까 하늘이 흐리다고 그랬잖아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밤이 됐을 즈음 스승님을 만나러 길을 떠나요.
헌데 가는 길에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내리기 시작하더니, 스승님댁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폭우가 쏟아져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됩니다.
부셈이
산기슭에 있는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에 연기만 살짝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하누
“아주바이!” 하면서 문을 벌컥 열어요.
들어가면 오두막 안쪽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허름하고요. 직접 만든 집기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그 가운데에 스승님이 계시겠죠.
부셈이
스승님은 완전 넝마 같은 옷차림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습니다. 한쪽 팔이 없고, 한쪽 눈은 거의 멀어서 동공이 회색으로 탁해요.
주변에는 토끼나 산짐승 가죽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가운데는 화로가 피워져 있어요.
“뭐이래?”
“아니, 밖에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하누
비를 쫄딱 맞은 데다 표정도 굉장히 안 좋아요. 게다가 봄에 비를 맞아버렸으니 대단히 춥습니다. 얼어 죽을 듯이 창백한 상태로 안에 들어옵니다.
“아주바이,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부셈이
“아새끼레, 어디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니?”
하누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화롯불 앞에서 혼사에 관해 얘기합니다.
“아주바이, 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는 아직 더 아주바이에게 총 쏘는 법도 더 배우고 싶고,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개성으로 시집을 가면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돼버리잖아요.”
부셈이
당신의 얘기를 들으며 당신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합니다. 타고 있는 불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렇게 말합니다.
“고거이 계집으로 사는 것이 참 막막하구나야.”
“길타고, 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나갈 수도 없는 거 아니니.”
하누
그 말에 괴로운 듯한 얼굴이 되더니, 결심한 듯 스승님을 똑바로 보고 말합니다.
“아주바이, 절 만주로 데리고 가주세요.”
“아주바이께서는 항상 만주에 대해 얘기해주셨잖아요. 만주는 참으로 자유롭고 혼란한 곳이라고. 인간사의 잡다한 세속을 벗어나서 가장 자기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전 꼭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할아바이도, 오라바이도 없는 곳에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자유롭게.”
“그리고 이게 제게 남은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요.”
“아주바이, 저와 함께 가요. 이런 답답한 곳을 떠나서 만주에서 살아요, 우리.”
부셈이
승희의 말에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이 굳은 얼굴로 말합니다.
“그럴 순 없다.”
하누
“네? 어째서요?”
부셈이
“세상살이가 어디 꿈에서 노는 모양인 줄 아느냐?”
“만주, 만주가 무슨 무릉도원인 줄 아느냔 말이다.”
“이 좁은 땅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험악하고, 온갖 짐승과 마적단, 불한당이 판을 친다.”
“시집살이 하나 못해서 도망쳐 간 녀석이 잘살 수 있을 정도로 만주가 만만한 땅이 아니란 말이다!”
하누
충격받아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떻게 아주바이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저한테 재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저한테 총 쏘는 법도 가르쳐주시고 활 쏘는 법도 가르쳐 주셨잖아요?”
부셈이
“자만하지 마라. 만주 땅에는 그까짓 재주 가진 사람 빗자루로 쓸 만큼 많다.”
“그래서, 나라고 재능이 없었겠냐? 날 봐라.”
남은 한쪽 팔로 당신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잘린 팔을 억지로 보여줍니다.
“날 봐라. 이렇게 되고 싶냐?”
“지금 네 재주로는 거길 가봤자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할 거다.”
하누
배신감이 사무치는 얼굴로 말합니다.
“그럼, 그게 전부 하나도 쓸모없는 재주였다면…… 제게는 왜 가르쳐주신 건데요?”
부셈이
“내가 가르쳐주긴 뭘 가르쳤단 말이냐.”
“다…… 미친 노인네 헛소리다.”
하누
충격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일그러진 얼굴과 붉어진 눈시울로 스승님을 노려봅니다.
부셈이
“신념은 싸고 죽음은 비싸게 팔리는 세상이다.”
“헛된 꿈일랑 꾸지 말고, 할아버님 말씀을 듣거라.”
하누
“……아주바이를 만나러 온 건 실수였어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여태까지 계속. 매일 만나러 온 것도, 처음 만난 것도! 전부 실수였다고요!”
그러면서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납니다.
부셈이
그럼 당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면서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꾸라졌다가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당신을 잡지도 않습니다.
하누
“아주바이를 진심으로 존경했어요.”
“하지만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이 아주바이에 대해서 얘기한 걸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라고 분에 차서 말하고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나갑니다.
부셈이
당신이 오두막을 떠난 뒤, 허탈하게 웃다가
“그땐…… 정말 젊었다.”
“그땐 젊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빗속으로 사라져 가는 당신을 지켜봅니다.
시간이 흘러, 다음날 아침.
마을 광장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곳으로 다가간 당신은 피에 젖은 앙상한 발이 멍석에 휘감겨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당신의 스승입니다.
그 순간 천둥소리가 쿠르릉하고 들리면서 옛 생각에서 깨어납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습니다. 독립군인 당신은 관동군의 보급대를 습격하기 위해 빗속에 잠복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흑산동 고지입니다. 멍하니 생각에 담겨 있는 당신을 동료가 툭 치면서 “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정신 차려 인마.”
하누
이렇게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질 때는 그때 생각이 나고 그래요.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나서, “아무것도 아니야.” 이러면서 다시 총의 조준경에 눈을 댑니다.
부셈이
빗소리와 천둥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첩보에 따르면 보급대대가 여길 진작에 지나갔어야 하지만, 불길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합니다.
당신과 몇 시간째 잠복하고 있던 동료가 “야, 감이 안 좋다. 이쯤 왔으면 덜미를 잡았어야 되는데.”
“어디서 정보가 샌 거 아니냐?”
하누
저도 생각을 현실적으로 하는 타입이라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듯 묵묵히 총을 겨누고 있을 뿐입니다.
부셈이
불길한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이 지나가고 발포 음이 들립니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면 밤하늘에 조명탄이 포물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발포 음이 들리면 또 다른 조명탄이, 그리고 또 조명탄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흑산동 고지가 순식간에 만월의 밤처럼 환하게 빛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릅니다.
“일본군이다! 정보가 샜어!”
곧, 폭우와 천둥소리 속에서 관동군이 밀려들더니 마치 사슴 떼를 몰이 사냥하듯이 아군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기관총 세례와 산포의 굉음 주위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전우들이 보입니다.
이 불길과 거센 폭격의 파편 너머로 명사수인 당신은 망원경의 반사광을 목격합니다.
망원경을 들고 지휘 중인 관동군 장교, 이시하라 중장입니다.
하누
동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며 저도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저 중장 놈은 내 길동무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오로지 이 조준경에 집중합니다.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제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고요. 오로지 조준경 안에 있는 이시하라 중장의 모습만 보입니다.
숨을 멈추고 탕하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부셈이
그럼 사격 판정해 봅시다. 기회 만들기 판정이고요, 난이도는 3입니다.
성공! 좋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묘사해 주시죠.
하누
탕 소리가 울린 순간 시뻘건 피가 안개처럼 튀면서 이시하라 중장이 뒤로 쓰러지고, 일본어로 “중장님!”하고 주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이시하라 중장은 죽지는 않았지만 사경을 헤맬 정도로…… 뇌까지 손상이 갔다든가 해서 무사히 살아난 게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으면 좋겠네요.
부셈이
그렇다면 턱 절반이 반파 당한 걸로 할게요. 이후 이시하라 중장의 턱에는 호랑이의 발톱 자국 같은 커다란 흉터가 남습니다.
중장은 쓰러지면서 흩뿌려지는 자신의 핏방울 사이에서 당신의 스코프 반사광이 반짝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아소코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기마대가 전부 당신 쪽으로 몰려갑니다.
하누
저는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를 꾹 악물며 레버를 당기자 탄피가 팅 하고 튕겨 나가고, 저한테 몰려오는 기병들을 하나하나 상대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부셈이
당신이 여기서 살아남는 건 확정이기 때문에, 이 판정으로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는지 봅시다.
사격 판정 한 번 접근전 판정 한 번이고, 둘 다 난이도 5입니다.
하누
좋아요, 일단 사격. (도르륵) 주사위값 –1, 그러면 결괏값 3.
부셈이
2 격차 실패죠. 일단 2 피해를 누적시켜놓고 접근전도 굴려주시죠.
하누
(도르륵) 1. 4 차이 실패.
부셈이
4 차이 실패, 그럼 합쳐서 6, 막대한 피해입니다.
어떻게 싸웠는지 묘사해 주시죠.
하누
탕탕탕탕탕 하고 레버를 당기면서 빠른 속도로 쏴넘길 때마다 말에 탄 기수들에게 정확히 적중해서 병사들이 말에서 우수수 떨어지고요. 레버를 당기고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고 급탄을 하는 동작에 하나도 낭비가 없습니다.
그래도 숫자가 너무 차이 나니까 결국 포위당하고 수세에 몰리는데요. 한손으로는 총을 쏘고 다른 한 손으론 총검을 쥐고 맞서 싸워요.
쏘고 찌르고 베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발로 차고 들이받고 물어뜯고 하면서, 어차피 난 여기서 죽을 거니까 단 한 놈이라도 더 끌고 가자는 생각으로 몰려드는 일본군과 필사적인 사투를 벌입니다.
부셈이
좋습니다. 중장에게 이 정도의 상처를 입혔으니 기마대 병력이 당신 쪽으로 몰리는데 잡지를 못해요.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지프에 실리던 중장도 이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호랑이, 창귀가 싸우고 있는 것처럼 기마대들이 석진 한 명을 못 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는 걸 보고 이시하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립니다.
“오니토라(귀호)……!”
지프차가 부웅 하고 출발하고 당신은 피와 빗물에 진탕이 되면서 뛰어가서 말에 탄 기마대를 끄집어 내려서 처박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하면서 온몸에 상처를 입습니다.
하누
전신이 남의 피와 제 피로 완전히 뒤덮여서, 시뻘건 피 사이에서 눈만 형형하게 빛나는 채로 “으아아악!” 하고 괴성을 내지르면서 마구잡이로 싸우고요.
그 모습이 정말 한 마리의 귀호 같습니다.
부셈이
당신에게 병력이 몰리면서, 당신의 전우들은 병력 일부를 온존한 채로 후퇴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당신은 정말 살아남기 힘든 상황, 외통수가 오고 맙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일본군들은 인해전술처럼 끝없이 밀려드 가운데, 당신은 온몸이 피와 땀에 절여진 채로 일본군 한 명을 인질로 붙잡고 후퇴하고 있습니다.
일본군들은 총을 겨눈 채 당신을 천천히 에워싸기 시작합니다.
하누
인질을 붙잡고는 있지만 이게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건 알아요.
억지로 버티고는 있지만, 저도 이제 한계예요.
큰 부상을 입었고 피도 엄청 많이 흘렸고, 총알도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슬슬 진짜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부셈이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스쳐 간다고 했나요? 그날 그 장대비 속에 스승님을 두고 왔던 게 떠오르고요.
등 뒤에서 들렸던 정말 젊었다고 하는 스승님의 말이 이해되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 찰나가 영원처럼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일본군 몇 명이 당신을 향해서 총을 겨누며 다가오는데, 총구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빗방울이 느리게 떨어집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당신의 심장 소리 같이 쿵쿵거리며 들리기 시작하고, 일본군들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그 순간. 탕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을 뒤쫓던 일본군의 머리에 누군가의 총알이 관통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총성 뒤로 곡소리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바람 소리가 따라붙습니다.
일본군들이 외치기 시작합니다.
“저, 저승사자다! 저승사자의 총성이야! 어디냐, 당장 나와라!” 하면서 패닉에 빠져서 소총을 난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명사수인 당신은 총성만 듣고도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볼 수 있겠죠.
뒤쪽을 보면 섬뜩한 총성이 들리는 방향에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장년의 여성, 저승사자가 보입니다.
저승사자가 탄창을 비우듯이 귀곡성을 연사하자 일본군들은 머리가 관통되어 쓰러집니다.
저승사자는 틱틱틱,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을 장전하면서 “거기 독립군 양반! 살고 싶으면 이쪽으로 달려와!”라고 소리칩니다.
하누
거의 희뿌예졌던 정신이 팍하고 들어요.
아까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기자 갑자기 가슴 속 생존 욕구에 불이 붙습니다.
이를 꽉 악물고 일본군을 집어던지고 그쪽을 향해서 미친 듯이 뜁니다.
부셈이
당신이 저승사자에게 달려들면 저승사자는 총 하나를 당신한테 던지면서 “솜씨 끝내주던데, 같이 살아서 도망가자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누
헉헉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당신이 저를 왜…….”
부셈이
“너희 독립군들은 항상 그렇게 생각이 많지!”
“동포 죽는 꼴은 오늘 밤에 충분히 봤다고.”
하누
총을 꽉 쥐면서 “오늘 일은 평생 가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요.
그러면서 함께 응사하기 시작합니다.
부셈이
총을 쏘면서 저승사자의 안내를 따라 산골짜기와 산기슭을 헤치고 샛길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빗속을 대체 얼마나 뛰어다닌 건지 모를 무렵, 계곡 사이에 있는 임시 오두막 같은 공간이 보입니다. 저승사자의 거처인 것 같죠.
저승사자는 몸에 묻은 피와 빗물을 털면서 중절모를 오두막 한편에다 확 하고 던져버리고요.
“에이, 썅. 졸지에 독립군 낙인이 찍혔으니 만주에서 청부업자 일은 못 해 먹겠구먼.”
하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부셈이
“까짓거 차라리 잘 됐나. 현상금도 모을 만큼 모아뒀으니까 은퇴하고 고향이나 가볼까?”
하누
“저희 쪽에서 도움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부대가 거의 전멸해서…….”
부셈이
“됐네, 이 양반아. 빌어먹다가 죽어도 독립군 도움은 안 받아. 안경잡이 샌님들.”
하누
“은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갚겠습니다. 고향과 성함을 가르쳐주십시오.”
부셈이
“경성의 홍금화다.”
“뒤지지 말고 꼭 살아서 이 빚 갚아라. 독립군이고 나발이고 난 나한테 빚진 놈은 저승까지 쫓아가니까.”
“경성 가면 빈관이나 차려볼까? 경성 사는 양반님네들이 환장할걸? 그 코-피인지 뭔지 하는 거.”
하누
은인의 이름과 그런 얘기들을 한 글자도 잊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는데, 저도 이제 슬슬 정신이 흐려지고 있어요.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점점 무너져내립니다.
부셈이
이제까지 너무 멀쩡하게 서 있고 내색도 안 하니까 눈치 못 채다가, 석진이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빗물인 줄 알았는데 문득 바닥을 보니 빗물이 아니라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요.
놀라서 “너 이 새끼……!” 하면서 멱살을 잡고 눕혀서 응급처치하려고 할 것 같아요.
처음에 옷을 벗기면 여자인 걸 알겠죠. 그러면 “사연 없는 조선 놈 없다니까…….” 하고는 정신없이 치료해요.
깨어나 보면 며칠을 내리 잤는지 모르겠는데, 병간호하던 저승사자가 술에 취해서 당신 옆에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물안개가 점점 가라앉으면서 창밖에는 저 평원 건너편으로 백두산맥이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게 보이네요.
언젠가는 저기를 건너서 고향을 갈 수 있을지, 경성에 갈 수 있을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스칠 것 같네요. 석진의 도입씬 마무리 지어도 될까요?
하누
좋아요.
부셈이
현재, 1931년 2월, 경성.
몽희는요, 여관 카운터에 앉아서 신문에 실린 만화를 읽고 있습니다.
당신 주변에는 소설책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고, 화면에는 신문 앞면이 점점 클로즈업됩니다.
<난공불락의 조선은행, 털렸으나 돈은 그대로. 사라진 물건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아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용의자의 몽타주가 그려져 있습니다. 안경을 쓴 단정한 얼굴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건 당신에게 알 바 아니고 당신에게 중요한 건 이 만화죠.
「내 칼을 받아라! 이얍! 송! 방!」
실감 나게 읽고 있으면 누가 당신의 귀를 쭉 잡아당깁니다.
버팬
몽희는 개구리 다리를 하고 발을 의자 위에 올린 채 신문을 읽고 있어요. 신문과 코가 거의 5cm 간격이 될 정도로 집중해서 읽고 있다가, 귀를 잡아당겨지자 “악!” 소리를 지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위를 올려다봅니다.
부셈이
당신의 할머니 (홍금화 = 저승사자) 입니다. “으이그~ 이것아, 계산대 좀 보고 있으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딴청 피우고 있냐?”
버팬
“아! 아! 할머니! 나, 나 귀 떨어져! 아야!”
부셈이
“떨어지라고 잡아당기지! 으이구!” 하면서 놔버립니다.
버팬
“아야야~” 이러면서 보이지도 않는 귀를 보려고 하고요. 닿지도 않는 귀를 호호 불면서 귀가 빨개졌다고 난리를 부립니다.
부셈이
“아이구, 손녀가 아니라 웬수지. 어이고 내 팔자야.”
버팬
“아이, 진짜, 할머니! 손님 오면은 바로 알지! 내가 이렇게 카운터 앞에 앉아있는데.”
부셈이
“바로 알아?” 하면서 아래쪽으로 살짝 눈짓하면 키가 한 140 정도 되는 아저씨가…….
버팬
“아…… 눈에 보여야 알지~” 눈을 데구르 굴리며 머쓱해합니다.
부셈이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당신을 밀칩니다. “가서 빨래나 해라.”
다방 1층 곳곳에는 담배 피우고 있는 손님, 장기 두고 있는 손님, 코피 마시고 있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평소에 일과를 어떻게 보내나요?
버팬
카운터랑 다방을 할머니와 번갈아 가면서 볼 것 같고요. 손님이 없으면 침대 시트 등을 빨래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부셈이
손님들 담배 심부름도 하고, 코피도 타주고.
하누
남는 시간에 틈틈이 책보고!
에이미
꿀 보직이다.
부셈이
청계천으로 빨랫감 들고 가면 그 길에 헌책방 들리고.
버팬
빨래하는 거를 가장 좋아할 것 같아요. 나가서 딴짓하기 딱 좋으니까.
부셈이
좋아요, 그럼 지금 당신은 청계천에서 옷가지를 빨랫방망이로 땅땅 때리면서 물빨래를 하고 있어요.
버팬
손으로는 빨래를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좀 전에 봤던 신문 만화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주인공이 칼을 내려치는 순간 몽희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송! 방! 내 칼을 받아라!” 하면서 방망이를 후려치고요.
청계천 위쪽에 있는 헌책방 아저씨가 끌끌 혀를 차면서 그걸 쳐다보고 있어요.
부셈이
헌책방 아저씨가 말합니다.
“저거 또, 홍 여사한테 한 소리 듣겠구먼.”
“얘! 몽희야! 이리 와봐라.”
버팬
방망이로 물을 막 튀기면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 놀이를 하고 있다가요.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쳐다봅니다.
“아저씨!”
빨랫감을 후다닥 챙겨 들고 돌담을 올라서 책방으로 갑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저렇게 자신을 부를 때는 새 책이 들어왔을 때거든요.
부셈이
책을 보고, 헌책 몇 개를 용돈으로 사고, 빨랫감 챙겨서 청계천 언덕에서 내려옵니다.
빨랫감을 한 아름 들고 가다가 위에 쌓아놓은 책 두 권이 툭 떨어져 청계천 물에 빠져서 다리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버팬
“어, 어! 내 책!” 이러면서 빨랫감을 그대로 내팽개치고요. 빨랫감이 후두둑하고 떨어집니다.
“안 돼! 오늘 산 건데!” 하면서 청계천으로 내달립니다.
부셈이
책은 다리 아래로 흘러가다가 뭔가에 툭 걸려서 멈춥니다.
그래서 다행이다 하고 물에 젖은 책을 주우면, 책이 걸렸던 게 다리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됩니다.
그 모습은 조간신문 첫 페이지에 봤던 그 용의자의 몽타주와 굉장히 닮은 안경을 낀 여성.
그리고 그 품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슬쩍 보입니다.
여자는 가쁘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고 있어요.
버팬
책을 줍기 전에 사람을 먼저 발견합니다.
잠시 멈칫했다가 그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있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얼굴을 쳐다봅니다. 조간신문에서 봤던 도둑의 얼굴이란걸 기억해내요.
놀라고는 도둑을 손으로 살짝 흔듭니다. “저, 저기요?”
부셈이
미간을 찡그리며 당신을 힘겹게 보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소매를 잡습니다.
그러면서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청맥여관…….” 이라고 속삭입니다.
당신이 청맥여관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건 아니고, 청맥여관에 데려다 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버팬
몽희는 도둑에 대한 의구심은 가지고 있지 않고요, 할머니가 아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맥여관을 알고 있고,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데다가, 우리 할머니는 만주의 전설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겨서 할머니를 찾아왔나 보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파바박 하고 떠오릅니다.
만약 위험한 사람이더라도 할머니는 만주의 전설이니까 할머니가 이긴다라는 생각에 데려가도 문제 없다고 판단했을 것 같아요.
부셈이
오타쿠적 감각으로 재현성을…….
버팬
네 자기 혼자 모든 백스를 맞춰버리고요 ㅋㅋㅋ
이 사람이 현상 수배범인걸 아니까 “돌아서 가면은 조금 걸릴 거예요. 그때까지 힘 좀 내봐요.” 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여자를 부축해서 일어납니다.
그 상태로 떨어져 내리는 책을 안타깝게 쳐다보고요. 책까지 손에 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에이미
그래도 사람 앞에서는 책을 포기하는군요.
하누
사람이 먼저다.
버팬
다리와 청계천 사이의 수풀길을 통해서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따라 청맥여관으로 갑니다.
아무래도 나와바리니까 순사들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셈이
여관으로 여인을 데리고 가면 할머니는 놀라며 그녀를 알아본 후에 치료해주고요.
그날 밤, 청맥여관은 창문에 전부 다 커튼을 치고 입구에는 <금일 영업 쉽니다. 주인 백.>이라고 써 붙어 있어요.
카운터 뒤쪽에 있는 1층 방에는 촛불이 고요히 켜져 있고 할머니는 안경을 쓴 여인과 독대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엿듣고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버팬
1층에 아무도 없으니 문에다가 귀를 대고 엿듣고 있습니다.
하누
모험의 냄새가 나서 그러는 건가요?
버팬
그쵸. 몽희는 수배범을 보는 순간 ‘사건이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설레고 있어요.
부셈이
문에 귀를 대면 이런 대화가 들립니다.
“경성은 언제 떠날 거냐. 왜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널 찾고 있는데.”
“오늘 내로 채비를 해서 떠날 생각입니다. 그전에 맡아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여인이 보자기 매듭을 풀면 그 안에 촛불 빛에 은은하게 광이 나는 가죽 두루마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인장이 박혀 있고요.
“몇 주 전 조선은행 금고에서 도난된 물건이 바로 이겁니다. 보물 지도죠. 광야의 빛 말입니다.”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독립군도 아니고, 여관이나 운영하는 노인네야.”
“동지들이 금방 찾으러 올 겁니다. 선생님이 그때까지만 맡아주십시오.”
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 이래서 독립군 놈들이랑 엮이면 재수가 없는 건데……. 이틀. 정확히 그때까지만 맡아준다. 이틀 후에도 안 오면 이거 청계천에다 갖다 던져버리든지 엿을 바꿔 먹든지. 알아들었냐? 그리고 만약에 진짜 보물이 나오면, 김구고 김원봉이고 내 몫 가져가기 전까지는 손도 못 댄다고 그렇게 전해.”
버팬
몽희는 보물 지도, 광야의 빛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콧김을 뿜고요, 이미 딱 붙어 있는 귀를 문에다 더 가까이 댑니다.
부셈이
그 안에서 어쩌고저쩌고하다가, 할머니가 “석진이는 어떻게,” 라고 얘기를 하는데.
(책상을 똑똑똑 두드리며) 여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몽희의 앞으로 할머니가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할머니는 문을 벌컥 열고 상대에게 비수를 확 들이미는데.
“(찌질한 목소리) 으허어 깜짝이야……. 살려주세요 할머니……!” 상대는 다름 아닌 당신의 동네 친구 안경태입니다.
경태를 보면 할머니는 “뭐야?” 하면서 목덜미를 탁하고 놔버립니다.
경태는 “야 몽희 이 기집애야! 나랑 영화 보러 간다매~!”
버팬
할머니가 문을 팍 여는 바람에 방 문이 열렸고요, 문 뒤에 숨어있던 몽희는 경태의 목소리를 듣고 게걸음으로 나와 할머니의 눈치를 살핍니다.
부셈이
할머니는 “어디까지 들었냐.”
버팬
“어…… 그? 뭘…… 요?”
누가 봐도 거짓말 하는 사람처럼 입과 눈이 한 방향으로 쏠려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존댓말을 하고요.
“뭘…… 요? 카운터 정리하려고 방금 내려왔는데요?”
부셈이
할머니는 “……어휴! 으휴~! 어휴~~~!” 하면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경태는 그런 할머니의 눈치를 보더니, “영화 보러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버팬
“아? 영화? 아, 그거…… 어…….” 이러면서 살짝 고민하다가요.
“내일 보자~! 돈도 아껴야 되고…….”
부셈이
할머니가 눈치를 줍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라…….”
버팬
틈 사이로 촛불이 일렁이는 방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할머니가 희번득한 눈으로 눈치를 주자 “어~ 그러면 경태랑~ 영화 보고 올게요…….” 여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경태를 한 번 쳐다보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쉽니다.
“경태! 영화보다 더 재밌는 게 저 안에 있는데……. 너는 진짜 눈치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못 맞춰?”
부셈이
“너네 집 극장도 해……?”
경태는 인력거를 끌고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한테 빌려왔어.”
버팬
“하유, 진짜 답답이. 오늘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니까!” 이러면서 경태와 여관을 번갈아서 쳐다봅니다.
하지만 다시 들으러 가기에는 할머니가 너무 무섭고 만약 들키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입맛을 다시며 인력거에 올라탑니다. “쩝…… 빨리 가자.” 인력거를 탕탕 쳐요.
부셈이
영화 재미나게 보고 돌아오면 안경 쓴 여인은 이미 떠난 것 같아요.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왔던 데로 떠났다’라는 식으로 대답하고요.
다만 할머니가 카운터 위쪽에 있는, 자물쇠로 잠긴 나무 찬장에다가 뭔가를 넣어놨다는 것만은 알 수 있어요.
버팬
몽희는 이틀 내로 저 찬장을 무조건 열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관심이 없는 척합니다.
부셈이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날도 마찬가지로 빨래를 하고 저녁 일과를 마친 뒤, 오늘은 기필코 내 저 상자를 따리라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여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입구 유리창은 깨져 있고, 불은 꺼져 있습니다.
버팬
몽희는 멀리서 유리창이 깨진 걸 보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섭니다. 그리고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짐작하고요. 조심스럽게 여관 뒤로 돌아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부셈이
안쪽을 들여다보면 밤바람이 들이쳐서 커튼이 휘날립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누군가가 뒤지고 다닌 것처럼 서랍장이 죄다 빠져 있고, 가구들은 넘어져 있고, 유리창은 깨져 있습니다.
버팬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에 보물 지도부터 떠오르고요, 그걸 훔치러 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솔직히 그렇게 걱정하지 않을 것 같아요. 왜냐면 몽희에게 할머니는 정말 짱 쎈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엉망진창인 내부를 보니 꽤나 긴장된 상태로 뒷문을 끼익 엽니다.
부셈이
그때 누군가가 당신의 어깨를 확 잡아챕니다. 뒤돌아보니 할머니입니다.
“이럴 시간 없다, 짐 챙겨라!” 할머니는 평소에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입니다.
버팬
“할머니, 괜찮은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부셈이
할머니는 가방에 짐을 눌러 담으면서 “말은 가면서 하고, 얼른 가서 짐 챙겨와!”라고 합니다.
버팬
“지도는? 지도 뺏겼어?”
부셈이
“그걸 내가 뺏겼으면 이러고 있겠냐?”
버팬
그러면 심각했던 안색이 탁하고 밝아지면서 “역시 할머니!”
“바로 짐 챙겨서 내려올게!” 타타탁 하고 위로 올라갑니다.
부셈이
짐을 챙겨서 내려오면요.
할머니가 “짐 다 챙겼냐?”하고는 사슴 박제 옆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을 뗍니다.
그리고 액자를 바닥에다 쨍그랑하고 깨면 할머니의 오래된 현상수배지와 함께 석진을 비롯한 만주 독립군 몇 명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열차표가 한 장 있습니다.
에이미
한 장이네? (불길)
부셈이
그렇게 패물과 짐을 챙기고 있으면 바깥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지나갑니다. 그와 함께 밖에서 일본말이 들리기 시작하고, 곧바로 일본군이 앞문을 부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들어오던 일본군 둘이 총알 한 방에 관통당해서 쓰러집니다. 총성 뒤로 마치 귀신의 곡소리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바람 소리가 따라붙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면 귀곡성을 꺼내 들고 있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할머니는 먼저 거리의 가로등을 쏴서 맞춘 뒤, 어둠 속의 군인들을 보이는 족족 쏴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든 탓인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귀곡성의 총알이 떨어지자 사슴 박제 아래쪽에 있는 엽총을 꺼내서 장전합니다.
그때 밖에서 쏜 눈먼 탄환 한 발이 할머니의 다리를 스칩니다.
다리를 맞은 할머니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탁자를 그대로 넘어뜨려서 엄폐물 삼아 등을 기대앉습니다.
버팬
몽희는 할머니가 총 쏘는 장면을 처음 봐서 넋을 놓고 보다가, 할머니가 총에 맞자 “할머니! 괜찮아? 총에 맞았어?”
부셈이
할머니의 한복 위로 피가 느리게 번지는 게 보이고요. 할머니는 총을 장전하면서 테이블 뒤쪽으로 응사를 하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직감한 표정으로 당신한테 말합니다.
“몽희야, 먼저 가.”
버팬
“야, 약방 할아버지한테 가면 바로 나을 거야. 시간도 얼마 안 걸리니까…….”
“조금만 걸으면 돼. 내가 부축할 수 있어.” 하고 할머니의 팔을 잡아끌려 합니다.
부셈이
할머니가 한숨을 쉬곤 당신 멱살을 잡고 앉힙니다.
그리곤 “별이니 뭐니 찾으러 간다고 안 했냐 이놈아!”
“경성 아니면 사람이 못 산다더냐?”
“상해든 동경이든 만주든 어디든 마음만 붙이면 거기가 집인 거야.”
버팬
“무슨 소리야 할머니! 집은 같이 있어야 집이지!”
부셈이
그러자 뒤쪽에서 총알이 탕탕하고 날아오면서 엄폐물이었던 책상도 관통하고요.
“내가 여기서 죽을 년 같냐?”
버팬
총알이 날아오자 몽희는 깜짝 놀라 고꾸라지고요.
눈앞에는 할머니의 피범벅이 된 다리가 보이고, 머리 위쪽으로는 총성이 팡팡하고 지나가면서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나요.
몽희는 난생처음 겪는 일에 눈물이 줄줄 납니다.
“나, 나 혼자 어떻게 먼저 가라는 거야?”
“할머니랑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할머니 다리도 아픈데 어떻게 혼자 도망칠 수 있겠어!”
부셈이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얼굴입니다. 할머니가 당신한테 자신의 귀곡성과 광야의 빛 지도,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할머니 동료들의 모습이 담긴 꼬깃꼬깃한 사진입니다.
“만주로 가면 그 사진의 키 큰 놈을 찾아.”
“이름은 임석진이다.”
“그놈한테 내 총 들이밀고 말해.”
“‘저승사자가 보냈다’고!”
버팬
할머니를 붙잡고 싶은데 할머니의 눈빛이 너무 결연해요.
몽희는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의지가 굳고, 고집이 세서 아무리 남이 설득해도 자기가 한번 결정한 건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몽희는 자신이 아무리 말해봤자 할머니가 함께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를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귀곡성과 지도, 사진을 꽉 부여쥡니다.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할머니를 봐요.
“할머니, 만주의 전설이랬잖아.”
“저승사자라고 했잖아.”
“저승사자는 안 죽는 거지……?”
눈물에 흐려지는 눈을 껌뻑껌뻑할 때마다 피범벅이 된 할머니가 보이지만 다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부셈이
“내 말 믿어라.”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야.”
“수도 없이 겪은 일이야…….”
“뒤돌아보지 말고 경성역까지 뛰어라.”
“기죽지 말고 이것아!”
버팬
“할머니, 꼭 만주로 와야 돼.”
“나, 이번에는 할머니 말 잘 듣고 만주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꼭 와야 돼. 알았지?”
그렇게 얘기하고, 눈을 질끈 감고 뒷문을 향해서 뜁니다.
부셈이
할머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고요.
할머니가 엽총에 대고 있는 눈가엔 핏발이 서 있고, 눈에 눈물이 살짝 보입니다.
당신이 뒷문으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폭발 소리와 함께 불길이 여관을 에워쌉니다.
버팬
몽희는 뒷길을 따라서 뛰다가 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면 청맥여관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서 활활 타고 있어요.
매캐한 연기와 화약내가 코를 찌르고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귀에 이명이 울립니다.
여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속으로 생각해요.
‘아……. 만주는…… 혼자서 가야겠구나.’
부셈이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밤안개에 감싸인 경성역이 보이고요.
그리고 당신이 출발 직전에 열차에 간신히 오르면 경적이 울리고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합니다.
창밖을 보면 일본 순사들과 군인들이 주변을 수색하는 모습이 보여요. 그에 무색하게도 열차는 플랫폼을 떠나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열차는 만주 철도를 타고 국경을 지나는 대륙행, 대륙행 열차입니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하는 승무원의 안내가 들립니다.
복잡한 심경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면 평생 살아온 경성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갑니다.
버팬
몽희는 경성역을 벗어나기 전까진 창문 밖을 몰래 보면서 일본군이 쫓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요. 귀곡성과 지도, 사진은 품 안에 넣은 채 꽉 잡고 있어요.
그러다 열차가 경성역을 지나서 멀어지고 사람이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면 털썩하고 사람 없는 통로에 주저앉습니다.
어두운 밤 칙칙- 폭폭- 하면서 울리는 기적 소리와 끼익- 끼익- 하는 선로 소리에 몽희의 오열이 묻힙니다.
품 안에 있는 것들을 꼭 부여잡고 꺽꺽 숨이 넘어갈 듯이 울어요.
검은 열차가 나아가는 장면이 멀리 페이드 아웃 되면서 장면을 마무리합니다.
부셈이
다음 날 새벽입니다. 반쯤 잿더미가 된 청맥여관에 일본군 장교가 걸어들어옵니다. 여관 곳곳을 둘러보다가 쓰러진 자개 서랍장을 뒤져서 반쯤 불탄 사진을 한 장 찾아냅니다.
당신과 저승사자가 몇 년 전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많이 불타서 저승사자의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고,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역시 그 소녀는 대륙행 열차를 타고 도주한 것 같습니다. 국경 수비대엔 전보를 보내놨습니다만 거의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곳이라…….”
“고맙습니다.”
“만주는 법이 느린 땅이니…….”
“그렇다면 법보다 빠르고 질긴 놈을 부르면 될 일이죠.”
“그 말씀은…….”
“물귀신에게 연락하세요.”
몽희의 도입 장면은 여기서 닫아도 될까요?
버팬
네.
부셈이
며칠 후. 미노루의 꿈속입니다.
거센 불길과 땅에 흐르는 피 웅덩이 위로 오도깨비가 눈을 부릅뜨고 쓰러져있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자신을 배신했던 물귀신과 그 일당들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그 악몽과도 같은 환영이 다가오더니 총을 들고 당신에게 방아쇠를 당깁니다. 미소 짓는 물귀신의 입가에는 금이빨이 보이고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는 문어 다리 문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느리게 날아온 총알은 당신의 몸을 관통하고 등 뒤로 선홍빛 피가 솟구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강렬하게 솟구치던 핏방울들이 이내 포커 칩과 마작 패의 모양으로 뒤바뀌며 허공에 흩어지고…….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악몽에서 깨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웨이터와 여급이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카지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요.
당신 앞에는 마작 패가 놓여 있습니다.
“아니, 마작 치는 사람 어디 갔나?”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듭니다.
에이미
“아, 이번 국이 너무 재미없어서 집중력을 잃었네요.”
부셈이
“그렇게 전부 잃고 있으니 재미가 없겠지.”라고 하면서 패산에서 패를 가져옵니다.
에이미
“아니요, 너무 예상대로 되고 있어서 재미가 없는데요.”
“다들 너무 착했으니까.” 하면서 패를 까보면 영상개화입니다.
부셈이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사기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에이미
“어머, 본인이 좋은 패를 주시고선 저한테 사기라 하시면…….”
부셈이
“이봐! 이, 이놈이 사기를 쳤다고!”하고 난동을 부리자, 저쪽에 있던 기도가 다가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시죠 손님.”
“내,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이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그러자 기도가 손님의 배에 주먹을 퍽 하고 갈기더니 끌고 나갑니다.
기도가 나가면 그 뒤에는 카지노 지배인이 서 있습니다. 지배인은 당신한테 슬쩍 가서 돈을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이 카지노는 당신과 협력 관계에 있어요. 당신이 사기도박을 하는 걸 눈감아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거죠.
에이미
영상개화 만들어놨던 패를 옆으로 탁 치면 도미노처럼 쭈르르 무너집니다.
“내가 계약보다 더 번 것 같은데. 아까 준 걸로 충분하지 않아?”
부셈이
“그럼 우리 카지노 말고 다른 데서 돈을 버시든지.”
에이미
“아이, 섭섭하게 왜 이래. 우리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니고.”
부셈이
당신한테 가까이 다가서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착각하는 모양인데, 물귀신이 네 뒷배 봐주던 시절은 갔다고.”
에이미
생글생글 웃고 있다가 그 말에 눈빛이 싸늘해집니다.
“……물귀신 얘기가 왜 나오지?”
품속에는 쿠나이를 쥔 상태입니다. 딱 1초면 상대를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상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관계없는 얘기 아닌가?”
부셈이
“(조금 당황한 듯) 아아, 뭐 그렇지. 우린 친구 사이 아닌가. 친구끼리 조심하자는 얘기를 하는 거였지. 어차피 우리 카지노 말고 달리 갈 수 있는 카지노도 별로 없잖아?”
에이미
살기를 없애고 다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자기야. 친군데 우리 서로 봐줄 건 봐주면서 해야지?”
부셈이
“……자네 이름 앞으로 달아두지.”
“그건 그렇고, 동업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에이미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슬슬 시간이 됐네.”
“자기, 마차 좀 불러줘.”
부셈이
“(빠직) 아 그래, 우리 우수 고객님인데 불러드려야지. 마차 불러라 얘들아.”
“(작게) 제일 싼 거 불러.”
에이미
마차가 오면 바로 “이거 아닌데요~” 하면서 비싼 걸로 바꿔서 타고 갈 것 같아요.
별로 멀지도 않아. 접선 장소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타고 갑니다.
부셈이
지배인이 남아있는 마차를 보고 “뭐야? 이 허름한 마차 왜 그대로 있어?”
“예? 손님이 비싼 걸로 얘기하시던데요.”
“……이 멍청한 자식!” 하면서 멀어지는 마차를 봅니다. 침을 뱉고는 카지노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이 접선 장소인 다방으로 들어가면 어둑어둑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합니다. 축음기에서는 오래된 재즈 음악이 나오고 있고, 곳곳에 러시아 사람들이 앉아있어요.
안쪽 방에서 석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그 장면을 먼저 하죠.
일을 보통은 미노루가 물어다 주는데요, 이번에는 석진에게 직접 온 의뢰였습니다.
당신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접선 장소만 아는 채로 다방에 찾아왔습니다.
웨이터가 안쪽 방으로 안내해주고 그곳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위엔 촛불 하나가 있고, 뒤쪽에 누가 가만히 앉아있어요.
그 사람은 한쪽 팔에 의수를 달았고요, 흑산동 고지 전투에서 당신에게 말을 걸었던 그 전우입니다.
“오랜만이군.”
하누
걔 이름을 뭐로 할까요?
에이미
완 어때요? 김완.
하누
중절모를 살짝 붙잡고 고개만 까딱하는 걸로 인사를 갈음합니다.
“완.”
전우들에 대한 옛정 같은 건 조금 남아있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라고 물어요.
부셈이
“뭐 여전하지.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신수가 훤해졌는데.”
하누
“독립군 하던 시절보단 훨씬 좋지.”
부셈이
완은 품에서 만주 지도를 꺼내 펼쳐 보입니다.
“열차에서 물건 하나 챙겨서 조용히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야.”
“문제는 누구랑 가느냐인데.”
“물건 빼 오는 거야 자네 혼자서도 충분하겠지만, 불청객이 끼어든다거나 골치 아픈 상황을 피하려면 발 빠르고 꾀가 많은 놈이 필요할 거야.”
“자네 동업자가 그런 처리를 잘한다고 들었네.”
하누
그 얘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사정상 꽤 많은 일을 함께해오긴 했지만 전 여전히 미노루가 불편해요. 가능하다면 같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건을 빼 오는 일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해.”
에이미
그때 제가 눈치 없이 들어올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거의 다 들었어요. 석진이 ‘나 혼자서도 충분해’라고 할 때 문을 벌컥 열면서 “자~ 기야~♡” 뒤에서 끌어안으며 “나 불렀어~?♡” 합니다.
부셈이
그렇게 하면 이쪽은 당황해서 벙쪄가지고 “어, 어…….”
에이미
“어머 누구야? 애인~?♡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하누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작게 욕설을 뇌까린 다음에, 한쪽 팔로 밀쳐내면서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에이미
그러면, “흥, 헨나 오토코.” 하면서 “뭐긴 뭐야~ 자기 오늘 임무 맡을 것 같아서 얘기하러 왔지. 혼자서 할 수 있겠어?”
부셈이
“……설마 이 친구가 그 발 빠르고 꾀 많다는 동업자…….”
하누
“동업자 같은 거 아니야. 저 녀석이 찰거머리처럼 쫓아다니는 거지.”
부셈이
한숨을 푹 쉬더니 “우리 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자금일세.”
얘기하면서 다양한 국가의 지폐를 공처럼 뭉쳐놓은 것을 당신에게 줍니다.
에이미
그걸 챙겨서 세요.
하누
완이 돈을 내밀 때 석진이 이렇게 손을 뻗고 있었는데, 미노루가 중간에서 가로채 간 거죠.
에이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보통 이이한테 바로 일이 들어오진 않거든.”
“그런데 바로 들어올 정도라는 건 상~ 당히 재미있는 임무라는 거겠지.”
“액수는 괜찮은데?”
일반적인 임무 2~3번 정도 했을 때 받는 액수거든요.
하누
미노루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곤, 의자에 몸을 기울여 앉습니다.
에이미
“열차 쪽이면 시게로한테 부탁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이쪽에 들어오는 사람 라인은 우리 아즈키한테 얘기하면 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가 할 일도 별로 없지 않을까? 단지…… 흐응……. 여기서 한 8할 정도만 주면은…….” (일동 큰 웃음)
하누
“5 대 5, 그 이상은 안 돼.”
부셈이
와; 처음부터 5 대 5를 부르다니 진짜 딜을 모른다; 7 대 3으로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에이미
“아이, 또 융통성 없이 구네.” 까르르 웃으면서 완 쪽에게 딜을 쳐요. “조금만 더 얹어서 나한테 주면은 같이 해줄게.”
부셈이
“아니, 일본 놈인 줄 알았으면 얘기 안 했을걸세.”
에이미
“뭐, 나처럼 근본 없는 놈이 어딨다고.”
“일본 놈이 어딨어? 만주에 살면 다 만주 놈이지.”
부셈이
“정말 속 편하게 얘기하는군, 일본 놈들은.”
에이미
“어쩔 거야~ 아무튼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 정도인 것 같은데?”
완을 무시하고 석진과 마저 딜을 해요.
“3 대 7.”
하누
“4 대 6, 그 이상은 절대 안 돼.”
에이미
“(신나서) 콜!”
“아, 내가 많이 봐줬다. 4 대 6, 어쩔 수 없네~”
하누
불청객이 끼기는 했지만 “나 말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라며 의뢰를 받아들여요.
에이미
중요한 얘기도 끝났고, 분위기 보아하니 둘이 얘기하려는 것 같으니 평소에 갖고 다니는 여우 도장을 툭 찍은 다음에 “계약한 거다~?”
“그러면 얘기들도 더 하시고요. 난 잠깐 나가서 한잔해야겠네? 오늘 많이 벌었으니까~”
나가서 마시고 있겠습니다.
부셈이
나가는 미노루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일을 받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독립군 쪽 일인데 수락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정말 비즈니스적인 의미냐 이런 질문입니다.
하누
“아까도 말했잖아. 이 일 하는 게 독립군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다른 의미는 없어. 난 그저 돈벌이 하는 장사꾼일 뿐이야.”
부셈이
“사람은 어느 역사에 자기 이름을 올릴지 선택할 순간이 반드시 오네.”
“자네도 생각해보게. 그 총에 담긴 제세안민이라는 글자가 울겠네.”
하누
이 총은 스승님의 유품이고, 스승님에 대한 일은 저의 역린 같은 거죠. 목소리에 가시가 돋칩니다.
“내 인생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함부로 말하지 마.”
“자네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 총의 의미도, 내가 독립군을 떠난 이유도!”
“자네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난 지금이 좋아. 독립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돌아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
“그러니 그런 허튼 소리 다신 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한 번만 더 그랬다간, 아무리 자네라 해도 다신 얼굴 보고 싶지 않게 될지도 모르니까.” 으르렁거리듯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담배를 꺼내려는 듯이 주머니를 뒤지는데 담배가 없어요.
부셈이
자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밀어주면서 “여전히 거짓말은 서툴군.”
하누
탁하고 그 손을 쳐내요.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시험해보고싶다면 그렇게 해.”
부셈이
“……아니야.” 그러면서 미노루를 다시 부릅니다.
에이미
밖에서 마시고 있다가 빼꼼하면서 “뭔데?”
부셈이
“마저 작전을 설명하지. 내일 아침 일곱 시, 경성에서 출발한 열차가 신의주를 지나 국경을 넘는다.”
그러면 시점이 PC들을 천장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 쇼트로 옮겨지면서 테이블 위의 만주 지도를 클로즈업합니다.
풍경은 설국을 달리는 열차의 모습으로 바뀌고 열차의 경적이 크게 울리며 페이드아웃 됩니다.
서막 상편 대륙행 열차는 여기서 끝을 냅니다.
- ..+ 7
댓글 2
예술적인 까치
모르는 룰인데도 상황이랑 연출이 드라마틱해서 너무너무 흥미진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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