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유년기의 끝

2022.09.23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건 모두들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였다. 

세상은 나를 저주했고, 세상은 나를 몰아냈고, 
세상은 나를 비천한 자로 만들었으며, 세상은 나를 상처입혔다. 
그러니 세상은 마땅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폭력과 배제, 죽음과 고통, 비명. 무한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절규. 

그것은 세계가 그에게 가르친 첫 번째 언어였다. 

나에게는 복수할 권리가 있다.
나에게는 세상을 저주할 권리가 있다.
나에게는, 세상을 상처입힐 권리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세계와 맺은 첫 번째 관계였다.

그것만이 그가 세계와 맺은 유일한 관계였다.

왜 내가 너희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
왜 내가 너희에게 증오를 뿌려서는 안 되지?
왜 내가 너희를 쉬이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아무도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낯선 땅의 그 누구도,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호그와트에 들어가기조차 전에 내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였다. 
나의 가족 밖을 벗어나면, 모든 것은 낯설고 생경했다. 

묻고 싶었다. 너희들에게는 이 폭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고. 
너희들에게는, 이 비명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고. 
너희들은 끝없이 유예된 죽음 속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아이는 모두를 미워하기로 했다. 

자신의 울타리 밖을 벗어난, 모든 것을 증오하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그러면서 천진하게 미소짓는 것.
너희의 행복이야말로 네가 가진 진정한 죄악이다.

난 너희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어. 더럽고, 역겨운 잡종들 같으니라고.

사람이 아닌, 재앙으로서 세계에 새겨지기로.

 
그는 내밀어진 손을, 온기를, 이해를 거부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니 불가해한 재해가 되기를 선택했다.
모두를 집어삼킬 암흑이 되기를 선택했다.

아이는 달렸다. 복수만을 목표로 삼고, 증오만을 연료로써 태우며.

끝의 끝에서,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내릴 때까지.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추위가, 졸음이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통증은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팔도, 절뚝이는 다리도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비치던 것은….

끝내, 자라버리지조차 못한 채로.

그렇게 삶을 마칠 때까지.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내쳐진 어린아이였다.

모두에게 배척받았고, 모두에게 내쫓겼다.
이란에도, 영국에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마법 세계에도, 머글 세계에도 나는 속할 수 없었다.

나는 두 세계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두 세계로부터 전부 도망쳐야 했다.

폭력과 배제, 죽음과 고통, 비명. 무한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절규. 

그것은 세계에 대해 그가 가진 유일한 이해였다.

“저주받을 것들, 신께서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야 했다. 마왕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모든 것은 영국의 마법사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보았고,

오로지 그것만을 들었다. 

나는 어둠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부재 사이에서 숨을 쉬었고 적대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었다.
내가 세계와 맺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관계였다.

아무도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낯선 땅의 그 누구도,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신만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생각했다.
아무도 저의 신음을 듣지 않는다고.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최초도 유일하지도 않은 또 한번의 삶 속에서.

“제 삶을 당신에게 줄게요. 당신과 이 땅을 밟고 있을게요.
그래요, 우리 함께 살아가요.”

“그러니까 어때? 친구하자, 시린.”

“그냥 너라서 손을 내밀어 준 걸거야.
내가 지금 너한테 아무 이유 없이 손수건을 내밀어주는 것처럼.”

“나중에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같이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너의 옆에 있는 그 어떤 이가 단 한 순간 너를 보지 못해 쓰러진다면,
그 때는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나.”

“시린도 나랑 같은 기숙사니까,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네가… 괜찮아졌으면 좋겠어. 그것 뿐이야. 응.”

사람들은 아이에게 알려주었다.

내밀어진 손을 붙잡는 법을, 울타리 안에 타인을 들이는 법을.

“제가 당신을 다만 미워하면, 그 미움 전에 있었던 사랑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외침 중 하나가 될까요?”

“나는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되고,
괜히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끼는 거라고 생각해.”

“만약 네가 또다시 같은 길로 들어서려는 낌새가 보이면,
언제든 말해주고 또 막아주마.
지난 생보다는 나도 조금 발전을 하지 않았겠냐.”

… 세계를 미워하지 않는 법을.

그제서야, 아이는 사과를 할 수 있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용서해줘. 아스트리드….

재앙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마를 맞대고서, 시린은 물기어린 눈으로 아스트리드를 보았다. 담기는 것은 축축한 푸른 색의 눈동자. 미소 짓는 얼굴. 살랑이는 분홍빛 머리. 자비로운 손길과 엄혹한 시선으로, 성자도 이맘도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 아스트리드는 말했다.

“허무가 아닌 인간이 되어요, 시린. 그럼 애정을 줄게요.”

아, 그것은 분명 잔인한 말이었다. 시린이 듣기에 마땅한 말이었고, 아스트리드가 내뱉기에 마땅한 말이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잔인한 말이었다. 비극을 잊지 말고, 그 무게를 잊은 채 두 눈을 감고 살아내지 말며, 이미 지난 미래이자 지나간 과거를 짊어지고 살라는 말은.

시린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는 맞대었던 이마를 살짝 뗀 채 다시금 아스트리드를 마주했다.

“한 번도, 도망치려고 한 적은 없어.”

한 때 외면했던 죄과는 이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파도가 되어 시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상을 살면서, 깨어있을 때나 잠에 들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공부를 할 때나, 눈을 감을 때나 눈을 뜰 때나, 죄업은 언제나 그의 곁에 존재했다.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던 것 뿐이야.”

한 평생을 재앙으로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이 휩쓸어간 뒤의 풍경을 돌아볼 줄 몰랐다. 두 번째 삶을 허무로서 살아온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으되 그것을 대하는 법을 몰랐다. 그렇기에 모든 사과는 공허했고, 모든 속죄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결말 속에 시린의 자리는 없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탓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엇나간 자인 탓이었다.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아이인 탓이었다.

“하지만.”

시린은 조용히 아스트리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손으로 아스트리드의 손을 받친 채였다. 

“너는 나를 길들였지.”

너는 아직 내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너도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나는 너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¹

“어쩌면 너를 통해,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세계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그러니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빛의 머리카락이 땅을 향해 쏠렸다.

여전히 작은 입술이, 여전히 작은 손등에 닿았다.

“맹세할게. 신의 이름도, 모르타자 알리의 이름도 아닌 오로지 나의 이름으로. 내가 저지른 짓을 잊지 않고, 내가 만들어낸 비극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내 남은 생 동안 짊어지고 살겠다고.”

악몽 속을 헤매이는 어린아이가 아닌, 현실에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으로서 그는 말했다. 아스트리드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는 더 이상 텅 비어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잔잔한 물결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작게 꽃피운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맹세할게. 허무가 아닌 인간이 되겠다고.”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별빛이 그를 비추었고,
별빛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으니.

그러므로 아이는 더 이상 무지할 수 없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렇게 아이의 무지는 종말을 고했다.


¹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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