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약속했다.
2022.10.09
그 날의 숲을 기억한다. 시체와 피를 미처 다 빨아들이지 못한 땅 위에서, 하늘은 울고 숲은 무너져내렸다. 짐승들이 달아나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네 동료들은 너의 시신을 관에 넣었고, 너의 부모님을 향한 편지를 써내려갔으리라. (그 편지가 닿았을지, 문득 나는 궁금해진다. 너의 부모님은, 지금 나를 이리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은, 알았을까. 네 죽음을.) 나는 너의 유서를 알지 못했으니, 기억하지 말라는 네 말은 나에게 닿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나는 그저 너를 기억하며 울었다. 숲을 내달리고 짐승을 쫓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땅을 향해 발을 구르며, 지금 이 자리에서 태산이 무너져내려 나를 뒤덮기를 바랐다. 이것은 공평하지 않다. 나는 말했다. 세계는 자신을 지키려던 자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던 자를 살렸으니, 이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야말로 나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손을 붙잡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떠났으니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이대로 나는 그 끝이 파멸임을 알면서도 달려가겠지.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이제 무얼 해야할까? 증오는 나를 떠나갔어. 희망도 나를 떠나갔지.
내 동료들이 너를 죽였고, 네 동료들은 우리를 죽였다.
이미 굴레는 시작되었어. 한 쪽이 죽기 전까지는 이제 멈추지 않아.
나에겐 그것을 멈출 힘이 없어. 내가 시작한 증오를, 끝맺을 힘이 없어….
그러니, 그래. 너를 추모하던 모든 이들로부터 한 걸음 비껴간 곳에서, 하나의 형체는 검디검은 눈동자 아래로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 눈물 사이로 증오가 흘러내리자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절망 뿐이었다.
적어도 그 때 저는 당신의 슬픔이었군요….
그랬지. 뻗어오는 너의 손에 눈을 감으며, 나는 대답했다. 너는 나의 슬픔이었지. 그것은 나의 비극이었고, 나의 절망이었지. 내 모든 감정은 너를 향해 있었고, 내 모든 눈물은 너를 위해 흘렸으니. 첫 번째 비극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그 날의 광경. 두 번째 비극은 그런 나를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리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 그렇다면 세 번째 비극은 그럼에도 겨우 닿았던 이해를 빼앗겨버린 때가 아니었을까. 그리 생각하면서.
너는 저곳에, 나는 이곳에. 한 명은 불사조로서, 한 명은 죽음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나. 그 사이를 흐르던 강은 얼마나 깊고 넓었던가. 그럼에도 때로 사람과 사람은 그 강을 건너 이어지는 법이고, 그 찰나의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 불렀다. 그것이 비록 어긋나고 미끄러질지라도. 그래서 네가 나의 양달이 되고자 한 순간 내 곁을 떠나버렸을지라도.
아스트리드….
네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나를 제 품 속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아팠겠다. 우리 시린. 모래색 건물. 차가운 돌바닥. 별이 보이지 않던 하늘과, 단지 손에 묻어있던 핏자국. 싸늘하게 식어가던 몸뚱아리. 죽음 직전에 보였던 풍경은 내게도 붉고 붉었다. 그것은 꼭 내가 흘리게 만든 피처럼 느껴졌었지.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추위가, 졸음이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통증은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팔도, 절뚝이는 다리도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비치던 것은….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응, 아팠어.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절망과, 끝내 내 곁에 남은 것은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밀려드는 죄책감과, 그 사이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통증. 몸의 것은 차츰 무뎌졌으되, 마음만은 그렇지 않아서. 아팠다. 괴로웠다. 힘들었다. 비통했다. 슬펐다. 네가 대신 소리내어 주기 전까지, 나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감정들. 그런 위로가 필요했음에도, 감히 그것을 바랄 수 없어서 묻어두었던 것들이 너라는 비에 쓸려서 드러났다.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리고, 눈가가 시큰하니 뜨거워졌다. 너무, 아팠어.
네가 만든 상흔은 분명 유일하지 않았다. 둘만의 세계란 필시 무너지는 탓이다. 둘로는 변화에 때로 실패해버리는 탓이다.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 순간 떠오른 것은 너였다. 네가 내밀어주었던 가능성, 함께했다면 바꿀 수 있었을 미래. 비록 똑같이 배신자로서 쫓기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지라도 그랬다면 낫지 않았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되던 순간. 핏자국 뒤를 스치던 분홍빛 머리카락….
그래요. 우리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이란으로 가요. 그 나라 말은 할 줄 모르니 시린이 도와줘야겠네요. 달을 보러, 별을 보러 갈까요. 지금 그곳에도 눈이 온다면 그걸 함빡 뒤집어쓰러 가요. 몇 박 몇 일이 걸려도 괜찮으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한 껏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심장이 작게 뛰었다. 불안. 흥분. 두려움. 떠오르는 비극들. 그럼에도, 당신이 있기에.
…내 고향에는 눈이 잘 오지 않아. 그곳은 사막이거든. 구시가지에 난 건물은 전부 흙으로 지어져 모랫빛을 띠고, 공기는 건조해서 숨조차 말라버릴 것 같아. 그래도, 달과 별은 잘 보이고는 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야. 그러니 사막을 건너고, 우리 집도 가 보자. 통역은 내가 맡고, 가이드도 내가 맡을테니까. 사원을 보여주고, 내가 뛰놀던 골목을 보여줄게. (무너진 정원과, 언니가 쓰러지던 곳, 그 시체들이 묻힌 어느 구석.)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야. 긴 여행이 될 테지. 단지 당신과 함께한다면 기쁠 것이다. 어쩌면 내 비극도 마침내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집을 수리하고, 정원을 예쁘게 꾸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집을 그렇게 둘이서 하염없이 바라보자. 이곳은 나의 것. 동시에 내 손을 잡아준 너의 것이기도 할 테니까. 그렇게 매듭을 지어보자. 그러므로.
… 약속한 거야. 아스트리드.
나는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웃었다. 그러니 살아야 해. 우리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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