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삼월토끼
금지된 숲은 추웠다. 전 날 세차게 쏟아진 비로 땅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발 밑의 낙엽은 진흙처럼 철퍽 소리를 내며 뭉그러졌다. 흐린 구름 사이로 해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사위는 여전히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의 현실을, 어느 쪽이 승리하든 간에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왜냐하면 전쟁이란 그것이 제아무리 옳은 명분이더라
…특별한 상대예요. (…)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 뒤에서 험담하지도 않고, 상대보다도 친한 사람은 만들지 않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고민거리도 모두 의논하고,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평생의 벗이에요. ―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 어릴 적의 일이다. 아직 모든 것이 부서져내리기 전, 평화로웠던 찰나의 기억
번쩍. 최후의 섬광이 눈 앞에서 빛나는 순간, 시린 자흐로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몸이었다. 화상입고 찢기운 몸이었다. 살갖이 타는 냄새와 함께 불타는 듯한 고통이 저를 감쌌고, 그 와중에 베인 상처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찌릿거리는 통증으로 저를 쑤셨다. 다가오는 붉은 섬광이 그 순간, 차라리 자비에 가깝게
그 날의 숲을 기억한다. 시체와 피를 미처 다 빨아들이지 못한 땅 위에서, 하늘은 울고 숲은 무너져내렸다. 짐승들이 달아나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네 동료들은 너의 시신을 관에 넣었고, 너의 부모님을 향한 편지를 써내려갔으리라. (그 편지가 닿았을지, 문득 나는 궁금해진다. 너의 부모님은, 지금 나를 이리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은, 알았을까. 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그건 모두들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였다. 세상은 나를 저주했고, 세상은 나를 몰아냈고, 세상은 나를 비천한 자로 만들었으며, 세상은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옷깃을 붙잡은 작은 손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드라지고, 피부가 새하얗게 질려버리도록 힘을 준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뭉개지는 시야로 저를 바라보는 물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작은 하늘에 담긴 것은, 메마른 물 아래 일렁이는 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조금 전의 그는 생각했었다. 차라리 원망을 하라고
스코틀랜드의 가을은 날이 갈수록 추워져만 갔고, 그에 맞추어 기숙사 휴게실의 벽난로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타닥 타닥. 오늘도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은 제 아래 깔린 나뭇가지들을 살라먹었다. 붉은색 소파. 금빛 사자가 그려진 테피스트리. 벽난로 위에 올려진 섬세한 장식들…. 텅 비어있는 휴게실은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왁자지껄하니 떠드는 학생들도, 시
벽난로의 불은 게걸스레 제 발밑에 놓인 먹잇감을 삼켰다. 타닥거리는 소리는 삼켜지는 나무들이 외치는 최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가 살라먹히고 나면, 이내 그것은 다른 것에게 그 불을 쏟아버린다. 그들은 스스로 타기를 선택했을까, 아니면 옮겨붙은 불에 어쩔 수 없이 절규하며 타오르는 것일까. 모든 것을 그리도 불타오르고 나서 그들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자흐로미 씨는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으신가요? 너는 나를 바라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한 눈빛을 하고. 그것은 충격이었을까, 흔들림이었을까, 매혹됨이었을까. 나는 다시 너를 본다. 텅 비어있는, 비탄에 잠겨있는 눈빛을 하고. 그것은 숨기려 했으되 숨기지 못한 마음이다. 감추려 했으되 감추지 못한 감정이다. 아, 가슴이 아려온다. 또
잔인한 살해와 고문, 시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악마의 화염은 불붙은 대상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그 붉게 타오르는 화마는 모든 것을 살라 먹고서야 겨우 저 자신의 눈을 감는다. 태울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그것은 움직이고 잡아먹기를 그치지 않으니. 그것은 그야말로 홀로 살아 움직이는 죽음
쳐내지기만 하는 손을 언제고 다시 뻗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는 거절을 버티어낼 수 있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준 감정이, 헌신이, 내뻗어진 손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야 비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를 가지고도 이 조그만 손 하나를 향기롭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오! 오! 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지주를 잃으면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때가 있어. ― 마츠우라 다루마, 카사네 하지만 그 노인이 그렇게도 피가 많으리라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 날은 사시사철 안개와 구름에 둘러
상해와 관련하여 다소 잔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네가 돌아왔어도 나를 구할 수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구할 수 없다. ― 주세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심장은 세차게 가슴을 두들겼다. 눈 앞은 흐릿하여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이
너는 나의 뭍이 되어주겠다 했었다. 너는 나를 상처입히지 않을 양달이 되어주겠다 했었다. 너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왜 나의 무엇이 되어주리라 말한 것일까. 아마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아름다운 것에게 빛을, 추한 것에게 어둠을」 아아 어둠은 무섭다. 밤은 무서워… 그러나. 「 추한 것에게 빛을, 아름다운 것에게 어둠을」
툭, 머리끈은 그 작은 소리를 끝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시린의 머리는 그의 맞추어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마치 폭풍처럼, 귀신처럼,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그는 그런 모습을 하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표독스러운 눈과, 증오로 이빨을 드러낸 입과,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창백해진 손을 한 채로. 우리의 말은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