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悼의 書
2022.09.04
너는 나의 뭍이 되어주겠다 했었다.
너는 나를 상처입히지 않을 양달이 되어주겠다 했었다.
너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왜 나의 무엇이 되어주리라 말한 것일까.
아마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아름다운 것에게 빛을, 추한 것에게 어둠을」
아아 어둠은 무섭다. 밤은 무서워… 그러나.
「 추한 것에게 빛을, 아름다운 것에게 어둠을」
빛을 내게 비추지 마!
— 마츠우라 다루마, 카사네
산발적인 전투가 끝나고, 너희와 우리는 각자의 진지로 돌아갔다. 우리는 오늘 형 쪽 하인베르크와 스스로를 연극 속 인물로 일컫던 알메이다를 잃었다. 너희는 오늘 동생 쪽의 칼릭스와, 너를 잃었다.
너희도,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는 없는 날이었다. 우리 쪽 머저리들은 동료를 잃었다며 펑펑 울거나 씁쓸함에 잠긴 채로 쓸데없는 하늘만 괜시리 들쑤셔댔다. 그것은 아마 너희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각자의 진지에 있기에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뭐 뻔하지 않은가.
너희의 선은 알량했고, 우리의 악 역시 알량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시작한 전쟁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지는 않았을텐데도, 우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을 그저 길바닥에 내팽겨친 무생물로 취급하는 대신, 하나의 숫자로 대하는 대신, 사람으로 바라본다. 삶이라는 고유한 이야기의 주인공,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창조자, 인생이라는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고 끝마친 고행자로서.
참으로 알량하고도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그들을 비웃는다. 그들을 조롱한다. 너희를 향해 조소를 던지고, 우리를 향해 경멸을 흘린다. 그중에서도 더욱 우스운 쪽이 있다 한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수많은, 수많은 이들의 가족과 친구를 죽여놓고서- 친구 하나를 잃었다고 우는 꼴이란. 그것은 나약이다. 그것은 인간성이다. 그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아니, 그것이 무엇이든지는 상관 없다. 내게 있어서 비웃어야할 대상임은 별반 다르지 않으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돌아온 이들의 침울한 표정을 보며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이들과, 제 곁에서 죽은 이들의 목록을 읊었다. 나는 지팡이를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있는 힘껏 조소할 준비를 했다.
“토비아스 하인베르크, 비비안 알메이다, 루크 칼릭스, 아스트리드 슐랭.”
그렇게 나는 너를 마주했다.
전사자 명단의 글자로서, 건조한 목소리의 음절로서, 보고서에 적힌 숫자로서.
“자흐로미, 제 손을 봐요.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한 나무의 그림자 속에 서 있다. 나무는 너무나도 높게, 너무나도 널리 뻗어 있어서 태양을 온전히 가려버린다. 그렇기에 이곳은 서늘하며, 이곳은 어둡다. 이곳에서는 지팡이에 묻은 피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나의 죄악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붓지 않아도 피비린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그래. 이곳에서는.
나는 이곳에 어울리며, 이곳은 내게 어울린다. 마치 여기야말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듯이. 여기, 이 춥고 어두운 암흑이야말로 네게 마땅한 곳이라는 것처럼.
“이 세상에 악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삶 옆에 무덤을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 앞에 제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이 있어요.”
너는 그 그림자의 바깥에 서 있었다. 나무는 차마 그곳을 가리지 못했기에, 온전한 태양이 네 위로 쏟아졌다. 그렇기에 그곳은 밝았으며, 그렇기에 그곳은 따스했다. 그곳에서 모든 죄악은 온전하게 드러났고, 모든 핏자국은 그 흔적을 보였으며, 모든 선은 찬란히 빛날 수 있었다. 그래, 그곳에서는.
너는 그곳에 어울리며, 그곳은 네게 어울렸다. 그곳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 따스하고 찬란한 광명은 너의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네게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네가 싫었다.
너는 나의 죄악을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었다. 나는 머글들에 의해 언니를 잃었고, 너는 우리들에 의해 언니를 잃었다. 그래. 하필이면, 언니를 잃었다. 동생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였다 하면 더더욱 그러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이 너의 부모였다 해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언니를 잃었다. 내가 잃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이 내게 어떤 감정이었을지, 너는 알까?
네 앞에서 내 모든 말은 공허해졌다. 네 앞에서 내 모든 행동은 의미없는 발악이 되었다. 나와 같은 것을 겪었음에도 너는 달라서. 나처럼 증오에 휩싸이지 않아서.
“세상이 당신을 상처입혔다고 당신에게 세상을 다시 상처 입힐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
내가 복수를 택할 때 너는 수호를 택했다. 내가 남들을 나와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려 할 때 너는 그 누구도 너와 같은 일을 겪어선 안 된다 말했다. 내가 사람을 죽일 때 너는 사람을 살렸다.
네 앞에서 나는 추해졌다. 증오는 바래고, 복수는 허무해졌다. 그러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증오가 사라진 너에게는 무엇이 남지?
죄.
너무나도 붉고, 너무나도 검으며, 너무나도 선명한,
나의 죄악. 나의 증오. 내가 만들어낸 그 굴레.
“언젠가 당신이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았다면, 당신은 지금 머글세계에 있는 또 다른 당신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머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에게 미움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하는 거라면, 당신은 지금 먼 옛날의 당신이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쉬이 미움받아도 아무 말 할 수 없는거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보았다.
보지 않으려 했으나, 네가 날 보게 만들었다.
듣지 않으려 했으나, 네가 날 듣게 만들었다.
알지 않으려 했으나, 네가 날 알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밀쳐낼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어둠 밖으로 나오는 법을 모르겠다면, 당신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을 찾으세요.”
한 번은 쳐내었으나 두 번은 쳐낼 수가 없어서. 두 번은 쳐내었으나 세 번은 쳐낼 수가 없어서. 네가 내민 손이 언제까지나 허공을 떠돌게 하는 것을, 나는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아서.
“온 세상이 쇄파라면, 제가 당신의 뭍이 될게요.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을 양달이 될게요.”
그것은 내가 온 힘을 다해 거부했으나 간절히 원했던 말이었기에. 내밀어진 손을 한번 더 쳐내이면서도 나는 울었다. 너를 피해 도망가며 나는 잃었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짐승처럼 통곡하고 소리질렀다. 네가 역겨워서, 내가 역겨워서. 네가 싫어서, 내가 싫어서. 너를 증오해서, 나를 증오해서, 나는. 하늘을 향해 찢어져라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 대가를 내 손에 들고 있다. 너를 뒤로 하고 도망친 대가.
내가 죽인, 우리가 죽인 이들의 목록.
그들을 죽이느라 죽은 우리의 목록.
증오로 마비되었으나 내밀어진 손으로 풀려버린 나의 가슴이, 그 모든 숫자와 글자들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곳에 있다. 울창한 나무가 태양의 자리를 조금 훔쳐낸 그 그림자 속에서. 나는 19년만에 온전히 돌아온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금지된 민족의 관습처럼 로브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차오르는 슬픔을 그대로 토해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리도록, 숲이 무너지고 짐승들이 달아나도록, 나는 울었다.
나의 그림자로 감히 그 걸음을 옮기던 빛은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에 네가 스스로를 구원할 때까지 손을 내밀겠다던 너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엎드린 채로 하늘을 바라본다. 별들은 무심히 나를 비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그들을 비난하듯 말한다.
“너희를 지키려 하던 사람이 쓰러졌어.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겠다던 사람은 이제 떠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찬란히 빛나는가? 그런데도 너희는 그토록 반짝이는가?”
나는 고개를 숙인다. 빛을 더 이상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네가 두렵다. 네가 내게 행한 모든 일들이 두렵다. 내가 두렵다. 내가 네게 행한 모든 일들이 두렵다.”
그만 둬…. 빛을 비추지 마라.¹
“나는 이제 무얼 해야할까? 증오는 나를 떠나갔어. 희망도 나를 떠나갔지. 내 동료들이 너를 죽였고, 네 동료들은 우리를 죽였다. 이미 굴레는 시작되었어. 한 쪽이 죽기 전까지는 이제 멈추지 않아. 나에겐 그것을 멈출 힘이 없어. 내가 시작한 증오를, 끝맺을 힘이 없어….”
사람은 타인이 구원할 수 없으나 그렇다 해서 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기에.
“아아, 나는, 참으로―”
나는 온 몸을 웅크린다.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일그러뜨린다.
“참으로―”
그것은 결심도 발악도 회개도 변명도 아닌,
“외롭구나.”
그저 순수한 무너짐.
나는 세상에 복수하고자 했다. 너는 세상을 지키고자 했다. 세상은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자를 남기고 자신을 지키려는 자를 죽였다. 이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래, 공평하지 않아….
비틀대는 걸음,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목소리. 나는 물 속을 헤엄치듯 허우적댔고, 진창 속에 가라앉듯 발버둥쳤다. 우리가, 네가 죽어나자빠진 곳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심한 하루가, 또다시 시작된다.
아아, 삶은 이리도 허무했던가.
¹마츠우라 다루마, 카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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