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최후

2022.09.06

상해와 관련하여 다소 잔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네가 돌아왔어도 나를 구할 수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구할 수 없다.

― 주세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심장은 세차게 가슴을 두들겼다. 눈 앞은 흐릿하여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삽시간에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붉고, 또 붉기만 했다. 그는 밭은 신음을 내뱉었다. 온 몸이 아파왔다. 팔은 수많은 칼날로 베인 것처럼 너덜너덜했으며, 다리는 살점이 한움큼 떨어져나가 마치 심한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몸의 모든 부분,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아찔할 정도의 통증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못 쓰게 된 제 한쪽 팔을 부여잡고,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단지 살아있기에, 아직 숨이 붙어 있기에. 그는 걸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뜨거운 입김을 허공에 뿌리며, 통증에 신음하며 그는 걸었다.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목적을 쫓아서….


“오래 전에, 처음으로 이 조직에 들어왔을 때 그분과 약속 하나를 했었지. 이제 내가 그분께 승리를 안겨드렸으니, 그분께서 그 약속을 지켜주실 차례야.”

마왕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 모든 것은 체스판 위에 놓인 기물에 불과했다. 그것은 시린도, 자흐로미 집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고, 어느 극동 지방의 속담에 기록되어 있었던가. 그것이 그들이 처한 운명이었다. 불사조 기사단은 처참히 와해되었다. 마왕을 대적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단체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아무도 감히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언제나 단 한가지였다.

과격분자들, 테러리스트들, 시민들에게 공포를 주는 자들. 그들은 한때 마왕에게 필요했으되 더는 쓸모가 없었다. 공포심은 심을 만큼 심어주었다. 채찍을 휘두른 다음에는 약을 주어야하는 법이다. 

마왕은 말했다.

마법부는 여러분, 곧 더없이 순수한 마법사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불사조 기사단은 와해되었으나 아직 그 잔당들이 남아 테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법부는 여러분을 최선을 다해 보호할 것입니다.

자, 이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합시다.

그렇게, ‘내부 정리’가 시작되었다. 

자흐로미 집안은 손쉬운 목표였다. 그들은 영국 마법사 사회 내에서 아무런 위치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외부인이었다. 이방인이었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치워지는 대상은 언제나 그런 이들이었다. 이 나라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들. 우리와는 다른 이들. '타자'들.

마왕은 그들을 낙인찍었다. 자흐로미 집안은 사실 순수혈통이 아니며, 우리 모두를 속여온 것이라 말했다. 그들은 불사조 기사단의 스파이라고, 그랬기에 자신의 명령 없이 그토록 날뛰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을 욕보이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기 위해 그 모든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야 했다. 마왕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모든 것은 영국의 마법사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모래색 건물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든 세월과, 비명과, 죽음 이후에도.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둥 대신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졌고, 벽과 지붕에는 찬란한 빛깔의 무늬들이 촘촘히 새겨졌다. 사시사철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정원은 또 어떻던가. 한가운데를 졸졸 흐르는 물을 따라 양 옆에 심어진 꽃과 나무들은 매일매일 다른 빛깔을 내었다. 때로는 새들이 와서 그 위에서 지저귀었고, 나비와 벌들은 그 주위에서 팔랑이고 붕붕거리며 떠돌았다. 그리고 사람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웃고 떠들고 싸우고 화해하고 혼나고 벌을 서고 복도를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때로는 자애로운 미소로, 때로는 엄격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곳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가족들이 거기에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기억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간절히, 너무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는 생각했다.

아, 그 모든, 찬란했던 세월들이여. 그 환상이여. 한 여름밤의 꿈이여. 

그러나,

환상이란, 꿈이란 본래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흐린 시야로도 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벽의 무늬는 차갑게 바랬고, 정원의 물은 고이다 못해 썩었으며, 식물들은 시든지 오래였다는 것을. 그들이 이곳을 떠났던 때가 1980년이었다. 19년의 세월동안, 이곳을 아무도 찾지 않았다. 19년의 세월은, 이곳을 폐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제 이곳에는 더 이상 노래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없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곤 오직 색 바랜 건물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초라한 피투성이의 여자 하나 뿐.

오러들에게서, 죽음을 먹는 자들로부터 그는 자그마치 수 개월을 도망쳐왔다. 그 수 개월의 시간 동안 그의 가족은 그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그는 그들의 죽음을 신문에서 보았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들었다. 고귀한 여인도, 왕위의 계승자도. 그런 이름을 가졌던 이들은 전부 죽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자흐로미 집안 최후의 계승자였다. 모든 유산은 그의 것이었다. 단지 건물과 정원 뿐만이 아닌, 증오와 복수조차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들은 떠나버렸는데. 그 유산들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었던 모든 이들이 그의 곁에서 사라졌는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시야는 더 이상 별들을 담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캄캄한 어둠 뿐. 빛을 두려워하던 이는 그렇게 영원한 어둠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눈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니.

천천히, 그의 다리가 무너져내렸다. 영국으로부터 이란까지. 참으로 머나먼 거리를 지났다. 대륙 간 순간이동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한정되어 있었다. 아주 위대하거나, 아주 뛰어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간절하거나. 그는 위대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으나, 간절함만은 가지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무릎이 바닥에 닿고, 그 다음으로 어깨가, 머리가, 팔이, 손이, 마지막으로 머리가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그 몸뚱아리는 이제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약해서,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누운 채로, 그는 거의 꺼져가는 숨을 뱉었다.

“사피야….”

복수만을 위해 달린 인생이었다. 증오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증오는 잿더미로 화했고, 복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은 오래 전에 지나쳤다. 그는 내밀어진 손을, 온기를, 이해를 거부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니 불가해한 재해가 되기를 선택했다. 모두를 집어삼킬 암흑이 되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는 무엇을 얻었던가? 실패한 복수와, 잿더미가 된 증오와, 공허와, 후회와, 죄. 그리고 죽음 뿐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집을 태우고 사람을 태워도 내 안의 불길은 꺼지지 않아.
죄는 더욱 커지고, 추함은 여전히 남으니!¹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추위가, 졸음이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통증은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팔도, 절뚝이는 다리도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비치던 것은….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그는 구원받지 못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택한 길이었으며, 그가 택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만일, 다른 길이 있었더라면. 다른 삶을 택할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¹마츠우라 다루마, 카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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