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평범했던 악이 평범한 선에게

2022.09.21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옷깃을 붙잡은 작은 손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드라지고, 피부가 새하얗게 질려버리도록 힘을 준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뭉개지는 시야로 저를 바라보는 물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작은 하늘에 담긴 것은, 메마른 물 아래 일렁이는 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조금 전의 그는 생각했었다. 차라리 원망을 하라고. 저를 향해 화를 내라고. 그것이 네 그 피로한 눈동자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모든 것에 지쳐버린 시선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거짓말이었다. 그 자신조차 믿어버린, 터무니없는 거짓말. 거울이 자신을 바라볼 때, 거기에 더 이상의 애정어린 시선도, 다정함도 존재하지 않을 때, 그는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 거울이 끝끝내 자신을 향한 증오를 담는 것 같을 때, 그는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

새까만 진흙과도 같은 죄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디디고 있던 바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끝없는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이곳이 밑바닥이다. 아니,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지옥이 있었다. 이것으로 그의 죄는 끝나겠지. 아니,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죄악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끝없이 밀려오는 죄책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깊어서, 영원히 그 아래에 잠기게 될 것만 같았다. 결코 그곳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감당해야 할 죄였다. 그가 받아들여야 할 업業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가슴으로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항상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늘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득한 기억 속의 환상이 그를 덮쳐왔다. 그조차도 잊고 있었던 그의 기억. 수많은 피와 비명에 파묻혀 이제는 분간조차 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죽음.

그 날의 하늘은, 꼭 지금과 같이 푸르르고 화창했었다.


무언가를 축하했던 날로 기억한다. 아니면 호그와트 입학철이었던가? 다이애건 앨리는 수많은 마법사와 마녀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고, 모든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고 장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문도 사람들의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그것은 바람결에 떠도는 속삭임에 불과했다. 공인되지 않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진위여부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 날의 다이애건 앨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찼고, 시끌시끌했다. 그 날은 저 하늘의 해조차 구름 따위에 가려지지 않고 환히 빛났다. 마치 어떠한 어둠도, 이곳에 침습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는 그 날 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이애건 앨리를 찾았었다. 셋이서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은 6년만의 일이었다. 그의 부모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틀어박힌 채로 보냈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제 자식을 돌볼 수 있을까. 그는 매 학기가 돌아올 때마다 홀로 이 곳을 찾아야 했다. 혼자서 교과서를 사고, 필요한 용품을 구하고, 가끔씩 돈이 남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다른 아이들이 부모와 형제와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닐 때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기뻤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의 부모는 여전히 신경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고, 그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먼저 가버리기 일쑤였지만 괜찮았다. 이전처럼 셋이서 함께 이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증오가 많은 것을 앗아갔음에도 여전히 감정이란 게 잔존하던 때였다. 아직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즐거워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마법사들의 기준으로 성인이 되고도 남는 나이였지만, 그 날만큼은 마치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제 부모를 좇았다. 같이 가자며 투정부리고, 손을 잡아 그들을 이끌고, 때로는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들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며,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인 자였다.

그렇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속삭임을. 그들의 정처없이 떠도는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그들이 일으킬 행위를. 그가, 그 손에 이끌려 저지르게 될 죄악을.

“저주받을 머글본들.”

주문을 읊는 소리조차 없었다. 여자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곳곳에서 쩍하니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붕괴음과 함께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구멍은 그 자리에 서 있던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이 들려왔다.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머글처럼, 건물이 무너진다 해서 무력하게 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잔해가 덜컹이며 움직였다. 하나 둘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프로테고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한 것 같았다. 그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잔해를 치우고, 서로를 치료했다. 치료가 어려운 사람은 성 뭉고 병원으로 수송하기 위해 마법을 걸었다. 서서히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땅 위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시린. 따라와라.”

그 목소리를 끝으로 두 사람의 형체가 구멍 안을 향해 사라졌다. 이윽고 사방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은 또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올라오던 형체들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펑,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순간이동을 하려는 소리이리라, 그는 생각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 눈 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다른 이들의 지팡이를 빼앗고 그들을 향해 저주를 날렸다. 화염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또한 그의 부모가 일으킨 불이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고통에 소리치고, 온 몸이 뒤틀린 채로 버둥거렸다. 사람의 신체 일부가 곳곳을 나뒹굴었다. 저주에 걸린, 또는 순간이동에 실패한 이들이 남긴 잔해였다. 

거기서 그가 무슨 감정을 느껴야 했을까? 불타오르는 증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한 기쁨? 그러나 그는 단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을 상상했던 광경이었다. 저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게 만들고 싶었다. 살려달라고 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부모 곁에 서지도, 그렇다고 그 반대 편에 서지도-그것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못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못박힌 채로,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위험해요. 그렇게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빨리!”

순식간에 제 손을 무언가가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쳐내었다. 두려움과 어쩌면 일말의 증오가 섞인 눈을 하고 제 앞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빛깔의 머리에 그와 대조를 이루는 푸른 눈동자. 몸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경미한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지옥같은 이 아비규환에서도 여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면서도 다른 쪽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저주가 퉁, 하고 튕겨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그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멀찍이서 그의 부모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그들이 쏘아대는 저주를 최대한 막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순간이동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펑. 한 순간에 존재가 사라지면서 그 빈 자리를 채우려고 공기가 밀려들었다.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사방을 향해 흩날렸다. 붉은 머리카락과 새까만 머리칼이 서로 뒤엉켰다. 불꽃이 번쩍일 때마다 여자의 몸에는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팔에서는 피가 흘렀고, 몸이 서서히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집중하느라, 여자는 자신을 보호하는 데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자보다 약한 법이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목소리는 그렇게 여자를 비웃었다. 응시하는 시선은 그의 것처럼 새까맸고,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한 번 크게 하, 하고 웃음을 뱉었다.

“그러는 너도, 딱히 강해보이지는 않는데?”

번쩍. 주문이 여자의 몸을 때렸다. 길게 이어지는 붉은 빛이 여자의 몸을 지지고, 비틀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비명은커녕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단지 축축하고 차가운 액체만이 그의 어머니를 향해 날아갔을 뿐이다. 퉤. 여자는 한 손을 들어 제 입을 닦았다. 모든 동작은 천천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여자는 그것을 티내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야? 겨우 이 정도로 우리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분노와 조소가 그 안에 섞여있었다. 고문은 전혀 여자의 힘을 빼지 못했다. 손의 마디마디가 부러지고, 벌에 쏘인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리고,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온 몸을 휩쓸었음에도, 여자는 여전히 외쳤다. 비웃었다. 절규와도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너희가 아무리 발악해도, 우리를 저주하고 괴롭혀도, 너희는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어!”

“그야말로 패배자의 변명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나? 이 긴 역사 속에서 결국 패배하는 쪽은 너희야. 증오는 절대,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니들의 알량한 혐오는 우리의 연대를 이길 수 없어. 지금도 봐! 나한테 고통 하나 제대로 못 입히는 주제에.”

다시 한 번 붉은 빛이 여자를 강타했다. 상처가 벌어지고, 거기에서 피가 쏟아졌다. 여자는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여전히 두 발은 땅에 단단히 디딘 채였다. 결코 무너서지 않을 방벽처럼, 여자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나, 크루시아투스는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저주가 아니었다. 이미 체력은 꺾일 대로 꺾였고, 상처는 입을 만큼 입었다. 천천히 무릎이 무너져내렸다. 안 돼. 여자는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내 등 뒤에는….

“왜 아직까지 안 도망쳤어요! 도망쳐요, 어서! 내가 조금이나마 더 막아볼 테니―”

“아, 시린. 거기 있었구나. 어딜 갔나 했잖니.”

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절박함에서 의아함으로, 다시 놀람으로, 이해로 변해 갔다. 그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조용히 마주했다. 광기어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다정하면서도, 소근거리는 어투였다.

“거기 숨어있었던 거니? 이런. 당연히 나를 도울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네게 조금 벅찼나 보구나.”

“너―.”

“쉿. 더러운 피는 입을 다물어야지.”

여자의 혼란스러운 목소리는 이내 비명으로 변했다. 서서히, 그의 눈 앞에서 붉은 빛깔의 머리가 쓰러져갔다. 그 뒤에는 그의 것처럼 새까만 머리를 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산발이 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단지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아버지는요?”

“샤푸르 말이니? 그쪽은 다른 고약한 녀석을 상대하고 있단다. 그이도 참. 더러운 피 하나에 뭘 그리도 고전하는 것인지.”

여인의 말투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과는 걸맞지 않게 평온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상냥한 그 목소리는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자, 시린. 이쪽으로 건너오렴. 어서.”

“안 돼. 제발….”

붉은 머리의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을 믿는 얼굴이었다. 너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텅 빈 검은색과 다정한 물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여자가 아닌 그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검은 머리칼의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여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그의 몸을 돌리고, 다시금 여자를 보게 했다. 

“저길 보렴, 시린. 감히 우리에게 대항한 더러운 피야. 우리 가족을 죽였던, 나의 딸, 네 언니를 죽였던 피가 저 몸뚱아리에 흐르고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망설임이 증오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인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지었다. 천천히, 그의 오른팔이 올라갔다. 그 끝에는 거미 다리처럼 휘어진 새까만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여인은 그의 어깨를 붙들고, 오른팔을 잡은 채로 말했다.

“자, 내 아이야. 지팡이를 휘두르는 법은 알고 있을테니 굳이 언급하지 않으마. 사실, 이 마법은 한 번 익히고 나면 놀라울정도로 쉽단다. 단지 증오와 분노를 담으면 충분하지.”

여인의 손아귀가 어깨를 파고들었다. 손톱이 옷자락을 긁고, 그 안의 피부를 눌렀다. 그는 통증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뭐 하니. 어서 말하지 않고.”

그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똑바로 보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믿음이 배신으로, 다정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순간을 그는 목격했다. 증오와 분노를 담아서. 그는 다시 한번 떠올렸다. 폭발과 총성, 제 눈 앞에서 쓰러지던 언니의 모습. 그들이 자신을 향해 외치던 그 저주받을 말….

“아바다 케다브라.”

풀썩, 여자의 몸이 쓰러졌다. 물빛 눈동자에서 생기가 떠나갔다. 이제 ‘여자’가 아닌 ‘그것’이 된 몸뚱아리는 비틀린 채로 바닥을 향해 누웠다. 서서히, 피가 웅덩이를 이루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살며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만족에 겨운 목소리로, 여인은 속삭였다.

“잘 했다. 시린.”


발에 아무것도 매여있지 않던 부엉이를 기억했다. 폭풍우가 치던 날이었다. 구름이 빽빽하게 하늘을 애워싸 낮과 밤이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것처럼 연신 비가 쏟아져내렸고, 때때로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다 번개가 번쩍, 시야를 환하게 달구었다.

부엉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은 파르르 몸을 털며 물을 사방에 뿌리고는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쪼아댔다. 그는 찬장에 마련해두었던 먹이로 부엉이를 달래었다. 한 손으로 그것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숨소리를 내뱉었다. 

부엉이의 생김새는 익숙했다. 그와 아스트리드 사이를 오가던 그 녀석이었다. 그들은 이 부엉이를 통해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아스트리드의 언니와 관련된 서류뭉치부터, 서로의 근황을 묻는 사소한 편지까지. 그러나 단 한번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아무런 편지도, 정보도, 물건도 없이 부엉이만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쿵, 심장이 한 번 크게 철렁였다. 부엉이를 쓰다듬는 손이 서서히 떨려 왔다. 떨리는 탄식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도출해 낸 해답이라기보다 직감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아, 그렇구나. 너도 알아버렸구나. 

시린 자흐로미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부엉이가 도착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아스트리드와 함께 그 날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동안에, 항상 그의 마음 언저리를 맴돌던 느낌이 있었다. 기시감. 어딘지 익숙한 장면들. 흩어진 채로 끼워맞춰지지 않는 기억들. 진실을 좇으면 좇을 수록, 파헤치면 파헤칠 수록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이 차올랐다. 어쩐지 이 이상 파고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한 앎이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아스트리드, 당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비극은 돌이킬 수 없으나, 당신의 비극만은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너만이라도 구원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은, 당신이 제 지극히 사적인 재앙이었던거야….”

끝내 떠오른 기억들은, 짜맞추어진 진실은 명백했다. 아스트리드의 언니를 죽인 것은 시린 자흐로미였다.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는 제 의지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증오와 살의를 담아 외쳤다. 초록빛 광선이 쏘아지고, 또 다른 몸뚱아리가 그 앞에 쓰러졌다. 수많은 죽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최초의 살인.


“당신의 증오가 당신의 언니와 가문을 잃었기에 정당하다면, 저는 당신들이 벌인 테러에 언니를 잃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죄는 누가 받아야 하나요?”

죄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오로지 그 자신 뿐이었다.

자신을 악몽으로부터 끌어올려준 사람을 되려 악몽에 쳐넣었다. 세상의 쇄파로부터 뭍이 되어주겠다던 당신에게 그는 쇄파가 되어 밀려들었다. 그렇게 당신을 부수었다. 망가뜨렸다.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토끼굴 밖으로 나오도록, 전쟁을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너를 죽였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네 원수를 사랑하는 법 따위는 몰라요.”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금 당신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무함마드도 아니다. 신께 선택받은 이도 아니고, 그렇기에 우리 중에 가장 선하고 모범이 되는 이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 평범하게 원수를 미워하고, 제 곁의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요. 구원할 수도 없죠.”

당신의 얼굴이 아득하니 일그러졌다. 그것은 웃음일까, 아니면 울음일까. 하나의 손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뺨을 때리든, 침을 뱉든, 모욕을 하든, 저주를 외치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그러나, 다가온 것은 단지 제 눈물을 닦아낼 뿐이었다. 깨져버린 거울을 다룰 때 처럼 섬세한 손길로.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다만 미워하면, 그 미움 전에 있었던 사랑은 어떻게 되나요?”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단지, 사라질 뿐이다. 무한한 증오에 먹혀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될 뿐이다. 그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사랑이란 증오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다. 그는 그것이 이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을 것이다. 홀로 절망에 투신해버리라고. 신 없는 신전에서 기도하지 말며, 정갈하지 않은 손으로 애원하지 말라고. 더러운 입술로 기원하지 말며, 사람 아닌 인생을 살았으면서 이제 와 기도하는 인간의 흉내 따위 내지 말라고.

“그건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외침 중 하나가 될까요?”

그렇지 않느냐고 그는 묻고 싶었다. 언제나 그래오지 않았느냐고. 세상이란 본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사랑이란 증오 앞에서 무의미한 읊조림이 되고, 오직 증오만이 끝내 살아남아 사람을 태우지 않느냐고. 그는 증오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었으되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탓에 그는 그것을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당신의 말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시린, 단 한 마디만 하세요. 용서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그 한 마디만….”

용서 받을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아요. 우린 또 다시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테니.

그는 언젠가 히르슈베르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알고 있다’고 그는 대답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자신에게 용서를 빌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아닌, 용서해 달라고 외치라 하고 있었다. 물빛 눈동자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당신은 또다시 헐떡였고, 웃었고, 간절히 애원했다.

증오는 절대,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언젠가 당신의 언니는 제 부모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말. 그렇기에 오히려 뒤바꾸어 조롱했던 말. 하지만, 사실은 그 자가 옳았던 것일까? 사랑은 정말로, 증오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는, 결코 닿지 않을 용서를 구해도 되는 것일까?

하나, 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을 보는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지고 뭉개질 따름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자 나오는 것은 꺽꺽대는 소리일 뿐이었다.

“용서, 해줘.”

그는 텅 빈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다시금 당신의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용서, 해줘. 아스트리드….”

이어지는 흐느낌에는 수많은 단어가 섞여 있었다. 용서. 제발. 부디. 아스트리드. 미안해. 나를. 잘못했어. 알아. 그럼에도. 나는. 그는 더듬거리며 단어를 읊었다.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 파편들이 흩어졌다. 흐느낌 사이로 섞여들어가고 뭉개졌다. 

수많은 말들이 차올랐다.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는 말. 죄사함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 그럼에도 네 손을 놓을 수 없다는 말. 그럼에도 너를 떠날 수 없다는 말. 무슨 짓을 해서든 이 죄는 갚아내겠다는 말. 그러나 그는 단지 한 마디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용서해 달라’는 오직 그 한 마디만을.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아스트리드….”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는 것처럼. 그는 그것을 외치고 또 외쳤다. 처참하게 무너진 목소리를 하고 그는 저 세 문장을 반복해서 읊었다. 시야 끝에서 땋아내린 분홍빛의 머리가 아른거였다. 그는 끝없는 눈물 속에 당신이라는 별을 담았다.

“용서해줘….”

한 때 증오에 사로잡혔던 악은 그렇게 평범하디 평범한 선 앞에 무릎꿇었다. 눈물로 손을 씻고, 고개숙여 입맞춤을 바랐다. 그 앞에서 불가능한 속죄를 구걸했다.

그는 당신의 손을 꼭 쥐었다. 구명줄을 붙잡듯 절박하게, 그럼에도 부서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아스트리드….”

감히 그 이상은 닿지 못하겠다는, 그럼에도 이 손을 놓기 싫다는, 간절한 눈빛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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