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2022.09.09

쳐내지기만 하는 손을 언제고 다시 뻗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는 거절을 버티어낼 수 있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준 감정이, 헌신이, 내뻗어진 손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생이 아닌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저지른 짓은 아마 큰 잘못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네 ■■만은 견딜 수가 없어서.


탁,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던 한 권의 책은 그 외마디 비명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자신을 떨구었다. 그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이내 주변의 모든 것은 침묵에 휩싸였다. 새들은 노래를 멈추고, 나무는 제 몸을 살랑이기를 멈추고, 심지어는 바람조차 그 숨을 죽인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멀고, 또 너무나 멀어서. 단지 안개 속에 휘감긴 것처럼 흐릿할 뿐이었다. 웅웅대는 소리로 묻힐 뿐이었다. 둔감해진 감각들 소리로 사라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선명해진 것도 있었다. 가령, 당신의 일그러진 채로 눈물 흘리는 얼굴이라든지, 물 속에 빠진 것처럼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 주먹 진 제 손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물방울들이 그러했다. 그것들은 가깝고도, 너무나 가까워서. 그의 눈을 부시게 하고, 그의 귀를 울리게 했으며, 그의 손을 뜨겁다 못해 달군 쇠로 지진듯한 아픔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각하며 당신을 보았다. 꺼져가는 새까만 눈동자는 일렁이는 물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하나는 가해자의 것,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것. 하나는 사그라드는 것, 다른 하나는 침잠해가는 것. 그러나 그들은 놀라울만큼 서로를 닮아 있어서.

네가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잖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소리는 11살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뭍에서 삐져나온 나뭇가지를 잡아채듯, 그는 간절히 당신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지막 남은 생의 간절함이, 마지막 남은 삶을 향한 투지가, 한때는 증오의 이름으로 불타올랐던 그것이 지금 당신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나에게 악몽 속의 어린아이를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내 뭍이, 내 양달이 되어주겠다 말했잖아. 내가 스스로를 구할 때까지 손을 내밀어주겠다고 했잖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아까의 당신이 그러했듯 겨우겨우 호흡을 삼켜가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깨어지고 부서져도, 사그라들고 어딘가에서 나자빠져 죽어버려도 괜찮아. 그것은 내 죄의 대가야. 내가 받아야 하는 마땅한 결말이야. 내 악업의 결과야. 하지만 너는.”

손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이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길로부터 나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손을 제 양 손으로 감쌌다. 흐느끼며 당신의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가 믿지 않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흐르는 눈물로 당신의, 그의 손을 씻었다.

“너는 아니야. 아스트리드. 너는 그래서는 안 돼.”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제가 가진 악으로부터, 죄업으로부터, 결코 지워지지 않을 피비린내로부터. 그것을 당신이 감당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진창에 빠져있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당신을 더욱 침잠하게 만들 줄은, 당신의 마지막 남은 버팀목마저 없애버리는 행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떠올리지 못했다. 너도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아무리 너를 위한 행위였다 하더라도, 거절에 지쳐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필연의 결과였는데. 

아스트리드. 그는 당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애타는 간절함이 배인 목소리로.

“나는,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 생을 그저 흘려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끝에 끝에서, 모랫빛 건물과 시들어빠진 정원들 사이에 둘러싸여 서서히 숨이 꺼져가던 그 순간, 그는 당신의 얼굴을 떠올렸더랬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니.

우리는 삶 속에서 무수하게 잘못할 수 있지만. 모든 인생이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잘못한 모든 사람들이 영영 그 잘못에 매몰되어 살 필요는 없다는 걸요.

그는 그 말을 하던 물빛 눈동자를 기억한다. 바람에 흩날리던 분홍빛의 머리카락도. 그 뒤를 환히 비추던 햇살도. 그때만큼은, 그 태양이 그를 태워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그를 다정히 제 품에 품어주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죄책감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그는 떠올리지 못했다. 

어둠 밖으로 나오는 법을 모르겠다면 당신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을 찾으세요.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보다 당신을 먼저 믿을 사람이 어딘가 있겠죠.

그렇다면 너의 손은 누가 붙잡아주는지.

너보다 너를 믿을 사람은 누구인지.

칼날을 갈아 남의 심장을 찌르는 법 밖에 몰랐다면 이제는 칼날을 갈아 누군가를 지키는 법을 배우세요.

하지만 이미 칼에 찔려버린 너는, 어찌 되는지.

온 세상이 쇄파라면 제가 당신의 뭍이 될게요.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을 양달이 될게요.

누가 너의 뭍이 되어주는지, 양달이 되어주는지.

죽어가는 너를 붙잡아주는지, 네 닳아버린 삶을 이해해주는지.

그는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메말라버린 동공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푸른 물을 마주했다. 

자신의 상처만을 보느라, 자신의 아픔만을 느끼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당신 역시도 세상에 상처입은 사람이었는데, 당신 역시도 세상의 쇄파에 부서져가던 사람이었는데. 

“네가 땅에 발을 디뎠으면 좋겠어. 마침내 살아갈 수 있었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당신을 향해 속삭였다. 절대적인 존재에게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비는 것을 기도라 부른댔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 그의 행위는 분명한 하나의 기도였다. 단지 그 대상이 신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너는 내가 무너지는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말했지. 나는 네가 스러지는 상상만으로도 버겁고 두려워.”

그는 당신의 손에, 그 손을 감싼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안경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고인 뭍이 되는 것은 싫다. 침잠해가는 찰나가 되는 것은 싫다. 그리 생각하며. 

“그러니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 네 곁에 있기를 그치지 않을게.”

그것은 당신의 선언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고백이었다. 보잘것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말해야 했기에. 애원해야 했기에.

“감히 너를, 내 악업 위에 올릴게. 감히 너와 함께 하는 속죄를 꿈꿀게.”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사그라들던 불꽃은 이내 너의 물로 가득 채워졌다. 물은 차오르고 솟아 또다시 그의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짭쪼름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바다의 그것과 같은, 파도의 그것과 같은 짜디짠 물이었다. 그는 애타는 눈빛으로 당신을 보았다. 흐려지는 시선 속에 당신을 담았다.

“오래 전 너는, 더 이상 악몽 속의 어린아이를 죽이지 말라 했지. 나를 죽이지 말라고.”

목이 메여오는 소리와 함께 그는 읊조렸다. 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당신의 말을 지킬 수 없었다. 끝의 끝에서까지, 그 어린아이는 악몽 속에 침잠해 있었다. 진창으로부터 그를 붙잡아 줄 손을 잃은 채로.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오직 그 자신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함께할 누군가가 있어야만이 가능하기에. 그렇기에 구원은 결국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방향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침잠해갈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서로가 필요하다. 함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이니.

 그러므로 이제 그는 감히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네 영혼은 누가 구해주지?

감히, 당신을 향해 말했다.

“이제는 내가 부탁할게. 너를 삭아 해지게 만들지 말아줘. 내 앞에서 사라지지 말아줘. 내가 닿을 수 없는 하늘로 멀리 떠나버리지 말아줘.”

그는 당신의 손을 간절히 붙잡았다. 그것을 놓는다면, 당신이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제 눈 앞에서, 무無로 화할 것 같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당신을 붙잡았다. 거짓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절박함을 외쳤다.

“나와 함께, 이 땅에 발을 디디자. 함께, 스러지지 말자.”

맹세이자 선언을 외쳤다. 자신조차 감히 희망하지 못하던 꿈을 외쳤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하던, 그 불가능을. 

당신의 말대로 그는 여렸다. 애써 도망치는 것을 붙잡으려는 주제에 흐리기 짝이 없었다. 별을 좇으면서도 확신이 없었고, 그것이 없으면 영영 어둠 속을 헤매일 주제에 단호히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어둠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길을 잃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무너져내려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히 말했다. 당신을 이 세상에 붙잡아둘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영영 멀어지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증명하려는 듯. 애끓는 마음을 담아 당신을 향해 속삭였다. 

그러니 아스트리드. 희미한 떨림 섞인 호흡과 함께 작은 목소리가 그 공간을 가로질렀다. 나로부터, 너를 향해.

“우리, 함께 살아가자.”

그것이 당신을 이 세상에 묶는 올가미가 되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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